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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문 목사,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요한복음 21장 3-14절) 04/23/2017

지난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것을 기념하며, 기쁜 마음으로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부활의 기쁨과 희망으로 희망찬 새 봄을 맞고 계시길 바랍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의 희망은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입니다. 20세기말 가장 유명했던 신학자, 몰트만은, “기독교의 희망은 곧 부활의 희망이다”라고 외치면서, ‘희망의 신학’을 펼쳤습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는 희망을 강조하면서요.

저는 이번 부활절을 맞으면서, 그 어느때보다 이 ‘부활의 희망’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기시고 다시 사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선사하셨지만,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적인 삶에서 이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부활신앙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할까 질문을 해보면서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많은 고난과 좌절, 비탄과 슬픔이 난무하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생활은 여전히 지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씨름해야 할 과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 고통, 상실과 절망으로 오늘도 얼마나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런 삶에 부활 신앙은 어떤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걸까요?

Oak Hill Church란 교회를 목회하셨던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그 교인들이 보내온 편지와 이멜들에 담긴 질문들에 하나 하나 답하시는 책을 한권 쓰셨습니다. 제목은 [목사님, 사는게 힘들어요]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호소를 하였으면 책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까요? “목사님, 사는게 힘들어요…”
많은 다양한 질문들이 들어 있는데, 한 질문만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회사에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할머니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합니다. 정말로 힘든 한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귀를 기울이기나 하시는 걸까요? ”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늘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삶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기에,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삶을 잘 아시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에 철저한 신뢰를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르바 던이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 이 “힘들다는 말이 희망의 표현과 맞물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에서도 대개는 “한편에는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는데서 오는 신뢰와 믿음의 고백이 있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라고 지적합니다. 이 둘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리들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야기는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펼쳐졌던 주님이 부활하신 이야기,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책속에서 이야기가 거의 끝맺어진 후 이어지는 에필로그처럼, 바로 그 사건의 뒷 이야기로 붙여진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사훌만에 사셔셔 부활하신 이야기가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장 큰 절정, 클라이막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았고,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로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 외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이야기가 뒷이야기로 기록되고 있는것이죠. 학자들은 복음서가 회람되면 읽혀질때 이 부분도 반드시 붙혀져서 읽혀졌다고 주장합니다.
왜 이 에필로그와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서와 같이 중요한 복음서에 더해졌을까요? 여러분들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디베랴 호수입니다. 이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데, 복음서가 쓰여지던 당시 로마인들이 이곳을 황제 이름에서 따온 디베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 갈릴리 바다, 실제로는 호수인데, 이곳은 에수님이 제자들을 만나고, 실제로 사역을 하셨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죽으심을 보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 7명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하자, 모두가 함께 가겠다고하며 한 배에 올랐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나간 이유에 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 먹을 것이 필요했었을지…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이제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업이던 고기잡이를 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다른 제자들도 배를 타고 나가서 밤에 열심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새벽이 되기까지 고기가 하나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고생하며 밤새 일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렇게 날이 새어갈 때쯤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실, 마가복음 16장 7절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셔서, 그들이 거기서 볼것이다란 말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지만 다 잊어먹고, 막상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을때 몰라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을 거십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밤새 잡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절망속에 있던 제자들,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시고,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결과는 어떠햇습니까? 밤새 내내 한마리도 끌어 올지 못했던 그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들이 잡혀 올라왔습니다. 제자들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가 베드로를 향하여 말합니다. “주님이시라”(It is the Lord!). 절망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 계신 이분,이제야 이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것을 알아채고 말합니다. 이말을 듣고 베드로는 고기잡느라 벗어던졌던 겉옷을 챙겨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달려갑니다. 제자들도 잡은 물고기들이 든 그물을 배에 싣고 호숫가에 서계신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숫가에 계셧던 주님은 그냥 서계시지 않았습니다. 숫불을 피워놓으셨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올려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곤, 아침을 차려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제자들은 다 이분이 바로 살아나신 예수님이신 것을 깨달습니다.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수,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십니다.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번째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새벽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한 장면을요. 새벽 안개가 끼어있는 호숫가에, 배와 그물이 너불어져 있고, 피어놓은 숫불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신선한 생선굽는 냄새가 자욱한 그곳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허기진 배고픔과 절망의 마음을 새롭게 채워주고 계시는 모습을요. 제자들은 이렇게 세번째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갈릴리 호수가에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의 삶의 자리에 직접 찾아오시고, 고단한 그들의 필요와 갈망을 아시고, 손수 그것들을 채워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마음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절망 대신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삶의 터전에서 주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따르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희망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 이후에는 주님게서 시몬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 물으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라는 새로운 명령을 주고 계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위대한 일을 시작하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후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엮어가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의 한 인물이 되어 갔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는 부활의 사건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을 통해서 부활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이 에필로그의 이야기를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상에서 못다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제자들에게 위탁하셨듯이, 이 세상에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맡겨진 일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목마름과 절망에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안겨주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속으로 끌어당기시고 계신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희망을 찾는 제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고, 오늘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를 이어가고 계시지 않을가요?

교우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님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도 들어올린 것이 없는 그물을 채워주시며, 함께 아침 상을 나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으까요? 그런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희망을 마음에 안고, 여러분들의 삶이 새로운 생동력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나오는 제자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곳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은 마치 갈릴리 바다과 같이,
마냥 잔잔하고 평안하기만 한곳은 아닙니다. 때룬 바람이 불고, 폭풍이 닥치기도 하고, 그래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픔과 상실,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그물을 내려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던 제자들과 같은 심정으로 절망하고,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들의 아픔의 삶의 현장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면 어떨까요?

지난주 부활절 예배때에 대표기도 하신 집사님이 기도에 이런 간구가 있어습니다. “ 고단하고 불안한 삶의 현장, 저희들의 갈릴리 바다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사실,
우리 모두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티베랴 바닷가에서 타고 있던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어둠이 깃들어 있는 차가운 물위에, 바람이 불고, 때론 혹독한 스톰이 닦치는 그 바닷가에 떠 있는 배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일상 생활속에서…가정과 직장, 학교와 일터에서…때로는 애써 끌어오려고 나갔던 고기잡이에 허탕을 치기도 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모든 크리스챤들이 세상에서 직면하고 있는 이 현실, “하나도 건진것이 없어요”라는 현실앞에서 말입니다.

작가인 오혜령씨는 많은 질병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분입니다. 그분은 – [ 당신 없는 그물은 빈 그물이오니…. ]란 글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서 살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계신 부활의 주님! ……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에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는 각오을 다(지게 하소서….)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 없이, 혼자서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안겨주시는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날마다 호숫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부활의 주님을 못알아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만일,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만나고 있는 부활의 주님, 절망 가운데서도 찾아와주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와 아침 식탁을 나누시는 그 주님을 매일 매일 만난다면 어떨헤 될까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이 준비하여 주시는 것들로 우리의 삶을 채워갈때 우리들은 삶은 달라져가지 않을까요?

만일,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도 우리는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있다면,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그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들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함게 살아간다면요, 주님의 부활의 희망과 능력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면요…그때,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부활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하시는 그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_delete)

여러분은, 그런 삶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고, 매일 매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희망을 품고, 여러분들의 삶이 새로운 생동력으로 채워지기를 바래야 합니다.

오늘 갈릴리 호숫가로 찾아와 주셔서, “애들아,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며, , ,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말씀하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늘 새롭게 주시는 그 부활의 주님을 매일 매일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찾고,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십시다.

그때,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들의 계획에만 사로잡혀있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갈 수 있을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매일 매일 만남을 통해서, 그분이 주시는 부활의 희망을 발견하여, 때론 우리들의 ‘작은 꿈의 상실’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의 한발짝씩 내딧는 삶을 걸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delete)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타임지가 ‘세계 역사 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의 한분으로 선정했던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사춘기 시절, 주님을 만난 다시 태어나는 -회심의 체험을 겪고, 후에 인도에 선교 사역에 뛰어들었고,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르쳐준 본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 이후 그분은 그리스도의 품에 뛰어 들어갔다라고 말합니다. 이 당시 단짝 친구였던 래스에게 스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래스,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헌신할거야, 너도 그럴꺼지?” 래스는 대답합니다. “아니, 나는 내 인생을 먼저 알거야” 그렇게 헤어진후 30년이 지난후 어느날 다시 만났습니다. 래스는 스텐리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참된 인생을 찾은것 같군. 나도 자네가 걷는 길 쪽으로 붙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스탠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붙잡으며, 인생에서 맛볼 수 없는 깊은 것을 맛보며 만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래스는 경마에 빠져 요행의 길을 걷다가 불만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던 래스와 달리, 스탠리 존스는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따라 살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에 뛰어들어 멋진 삶을 살게 되었던 분인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활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에 뛰어드는 자들이 되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부활의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 개인의 꿈을 넘어, 더 큰 꿈,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에 뛰어드는 자들을 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자신만의 생각과 계획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에 뭍혀가는 삶은 얼마나 더 멋진 삶이 될까요?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멋진 삶으로 인도해 주시려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 일상생활이 펼쳐지고 있는 갈릴리 호수로 친히 찾아 오십시다. 우리를 친히 찾아 오시는 하나님이 되셔서, 부활의 주님으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따뜻한 불을 짚혀 놓으시고, 함께 생선을 구어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채워주십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부끄러웠던 모습들, 절망했던 순간들, 낙담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시고,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기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함께 식탁을 나누기 위하여 불을 짚혀놓으시고,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하시면서요.

여러분의 갈릴리 호수로 와서 만나주시는 그 부활의 주님을 오늘 다시 만나십시요.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열어가시는 더 큰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그 하나님의 큰 이야기속으로 걸어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부활의 희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갈 수 있을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들의 계획과 욕망으로 써내려가는 우리들의 작은 이야기가 아닌, 부활의 희망과 능력으로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에 사람들이 될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새롭게 시작하는 이번한주, 우리의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와주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희망을 마음에 품고, 여러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 새롭게 펼쳐가시기 바랍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어오시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매일 매일 그분과 만나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속으로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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