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김수영 목사, 털썩의 순간 번쩍 (누가복음 24:13-35) 04/30/2017

이생진 시인의 시입니다. 제목은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일흔 여섯이고
나는 여든입니다.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 하겠습니까
<후략>

여든의 연세에 다다르며 우리가 마냥 내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것들이 하나 둘씩 늘어감을, 망각의 현상을 비유 삼아 설명하고 있는 시입니다. 꼭 그 나이가 되지 않더라도 냉장고 문을 열고 ‘내가 지금 왜 여기 있지?’하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신 분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영원할 것 같은 시간들이 내 것이 아니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도 이 땅에서는 언젠가 작별 인사를 해야하며, 심지어 그들과 함께 했던 값진 추억들까지도 내 기억에서 희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이생진 시인은 우리 인간들의 유한한 삶을 초연하고 덤덤하게 시로 표현해주었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가 마주하는 인생의 유한함, 곧 죽음에 대한 반응들은 이보다 조금 더 격렬하고 다소 거칠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인생의 끝을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멸에 집착했던 진시황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내 삶, 추억, 젊음의 상실에 큰 거부감 없다고 그게 인생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삶의 유한함을 의식하고 있고 영향을 받고 있음을 봅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Sheldon Solomon이 쓴 ‘슬픈 불멸주의자’라는 책에 의하면, ‘자신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느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30여년에 걸친 수백 건의 실험을 통해 인간이 왜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고, 삶의 의미에 집착하며, 참 많은 아름다운 삶의 요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명예와 명품, 명가와 명차를 갈망하는 지의 실마리를 바로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 연약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소중하다’는 느낌을 확인하는 일에 끊임없이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어느 공동체에 소속이 되든,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의미가 있을 때에, 내 존재가 확인이 되고, 내 이름에 가치가 생기고, 내가 흘리는 땀이 헛수고가 아님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잠시나마 소멸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을 돌아보면, 놀라운 예술작품, 문학, 그리고 과학의 업적들이 우리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고자 발전해왔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결하지도 못합니다. 때로는 이와 같은 문제들이 사회적 현상이 되어 우울과 좌절이라는 감정들에 많은 이들이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털썩의 순간’이라고 이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들에 의해, 가던 길을 멈추고 털썩 주저 앉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털썩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가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 중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털썩의 자리에 가 있지요? 21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자’로 여기고 그들이 따르고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 때문입니다. 이미 서론에서 털썩의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연관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두 사람도 근본적인 죽음의 문제 때문에 슬픔의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의 기대가 죽은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로 인한 고달픈 현실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솟아났던 열정도 죽은 것입니다. 무언가 옳은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삶의 의미마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에 남아 예수님과 함께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보고자 했던 믿음 마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총체적 난국입니다. 털썩의 순간이 그렇습니다. 삶의 한 부분이 꺾이거나 넘어지면, 잘하고 있던 부분들도 우후죽순 넘어집니다. 기대했던 일 하나가 잘 안 된 것 뿐인데, 털썩 주저앉자 마자 용기도, 열정도, 신념도, 인간관계도, 심지어 믿음까지도 통째로 흔들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가장 큰 문제는 시각이 부정적으로 삐뚤어져 아무것도 균형 있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6절에 이 두 사람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들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형체가 부활 후에 조금 달라서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22-24절을 보면 이들은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천사에 의해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심지어 자기들과 함께 있던 이들에게 또 다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도 한 번 주저 앉은 믿음은 도저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눈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볼 눈이 없었고, 두 번이나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부활의 소식을 들을 귀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삐뚤어진 시각, 그렇게 의롭고 선하신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불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 세상은 결국 부정한 힘이 이긴다는 그릇된 신념이었습니다. 우리도 털썩의 자리에 가면 눈과 귀가 하나의 부정적인 필터를 장착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부조리들을 비판하는 시각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바만 보이고 들렸던 오늘 본문의 두 제자처럼 우리의 털썩의 순간에 함께 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희망의 소식, 기쁨의 소식, 용기의 이야기들은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청년부와 한 번 나눈 적이 있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두 태아의 대화입니다. 한 태아가 묻습니다. “너 이곳 밖의 삶을 믿어?” 다른 태아가 대답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 곳을 나가면 무언가 있지 않을까?” “말도 안돼!” 첫번째 태아가 대답합니다. “출산 이후의 삶은 없어. 이곳을 나가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어?” 두번째 태아가 대답합니다. “잘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 발로 걸어 다니고 입으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의 감각들이 생길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돼!” 첫째가 말합니다. “걷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입으로 먹는다고? 우리 탯줄이 이렇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는데 왜 입으로 먹어? 그리고 탯줄이 너무 짧아서 이곳을 나가 출산을 하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삶이 불가능해.” 둘째가 말합니다. “글쎄…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아. 여기와는 다른 방식의 삶이… 혹시 알아? 탯줄로부터 자유하게 될지…” 첫째가 답합니다. “얘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만약에 출산 후에도 우리가 살아있다면, 왜 지금까지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을까? 논리적으로 대답해봐! 출산은 곧 죽음이야. 그 이후엔 아무 것도 없어.” 둘째가 대답합니다. “음… 글쎄… 그래도 출산하면 엄마를 만나고 엄마가 우리를 돌봐주지 않을까?” 첫째가 대답합니다. “엄마?? 너 진짜로 엄마를 믿어? 너 똑똑한 줄 알았더니 바보구나. 만약에 엄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지금 내 앞에 데리고 와봐. 그러면 내가 믿을게.” 둘째가 대답합니다. “나도 엄마를 볼 수는 없어. 그런데 엄마는 늘 우리 주변에 있는 느낌이야. 우리가 엄마에게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랄까?” 첫째가 말합니다. “나는 보는 것만 믿어. 그래서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게 가장 논리적이야.” 둘째가 대답합니다. “그런데 말야. 가끔씩 조용히 있을 때, 귀를 잘 기울이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엄마의 사랑하는 음성이 들려. 여기는 어둡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게 분명히 느껴져.”

기대와 소망을 잃고 털썩 주저 앉아 예루살렘을 떠나던 두 사람의 곁에 예수님이 계셨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소식이 여기 저기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으면서 엄마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아기의 비유처럼… 하지만 이 비유 속 둘째 태아가 어둠 속에서 엄마의 존재를 느꼈던 부분에서 희망을 봅니다. 털썩의 순간, 우리의 눈은 감기고 귀는 막히지만, 그래서 비판적 시각으로 논리성을 운운하며 부활의 소식, 기쁨의 소식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가 있습니다. 털썩의 순간, 총체적 어려움에 휩싸이고, 어두운 감정들에 짓눌려 이대로 끝인가 할 때, 번쩍하고 새로운 시작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정서적 성장의 수준이 아닙니다.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내가 보고 만지는 것들 너머에 있는 세계가 보이고 들리고 믿어지는 기적입니다. 현실은 털썩 주저 앉아야만 할 것 같은데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희망의 씨앗, 기쁨의 소식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적입니다!

오늘 부활절 셋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부활절은 2주 전이었는데 왜 또 부활을 이야기하나 싶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부활절은 한 주일로 끝나는 절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40일인 사순절보다도 더 긴 50일을 우리는 부활절기로 지킵니다. 여기 설교 단상 앞에 있는 하얀 스카프와 찬양대원들께서 입으신 하얀 스카프가 날이 좋아서, 혹은 시원해 보여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현재 부활절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상징하는 흰 색으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긴 시간 부활을 기억하고, 또 매 주일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털썩의 순간이 올 때, 번쩍하고 눈을 떠 부활의 주님, 영광의 주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사람은 그렇게 번쩍하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들의 털썩의 이유 – 죽음, 불안, 우울, 좌절, 두려움 – 를 모두 무너뜨리시고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번쩍하고 보게 된 순간, 그들에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 그들에게 일어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32절에서 ‘마음의 뜨거워짐’이 그 첫번째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뜨겁다’는 의미로 번역이 된 헬라어는(καιομενη) ‘불타오르다’는 뜻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보고 잔잔한 마음의 떨림이 있었거나 핑크빛 사랑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내 마음이 불로 다 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회개입니다. 털썩의 순간에 주저 앉아 좌절하고 불평하고 슬퍼하던 것이 떠올라 가슴에 참회의 불이 타는 것입니다. 비판적 시각으로 삐뚤게만 보던 눈에서 나를 위해 살아나신 예수님이 보이니 뜨거운 눈물이 불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회개입니다.) 내 잘못된 기대와 꿈만을 좇아 삶의 의미와 명예를 갈망하던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불처럼 들어오니, 이전 것들이 재로 변해 사라지고 진리의 불만 가슴에 남은 것입니다. 우리 부활을 통한 뜨거운 가슴, 불같은 회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그 다음절(33절)에 나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실망과 좌절의 공허함을 외면하고자, 그나마 이제라도 내 삶의 의미를, 나의 소중함을 다시 찾아 보고자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진정 그들이 가야할 길의 방향을 확인한 것입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과 방향이 새롭게 정립된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삶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 복음을 가서 전하는 삶이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개인적 차원의 삶에서 공동체적으로 눈을 뜬 일입니다. 개인의 삶에 대한 불안으로 슬픈 기색을 하며 엠마오로 가던 이들이 눈을 뜨고 나니 예수를 주로 따르는 공동체로 돌아가는 변화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나 혼자의 종말을 해결해주는 밀실의 계약이 아닙니다. 사회를 향한 약속이고, 인류를 향한 축복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번쩍 눈을 뜬 두 사람의 발걸음은 다시 공동체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 발걸음이 바로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기적의 서막이 열리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미 잘 아시듯,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 누가가 연결적으로 쓴 책입니다. 실제로 오늘 눈을 뜬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 두 가지 변화, 가슴을 태우는 회개와 복음을 들고 공동체로 향하는 발걸음은 수많은 사도들과 바울, 초대교인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털썩의 순간 번쩍하고 뜬 눈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믿고 맛본 삶은, 이전의 그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좌절하게 했던 실패, 도태, 환란, 심지어 죽음마저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도 갑작스럽게 눈이 멀고 털썩의 시간을 보냈지만, 번쩍하고 눈을 뜨고는 배가 파선하고 옥에 갇혀도 다시는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사도행전에 보면 늘 하는 일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는 일입니다. 이 전 같았으면 벌써 엠마오로 백 번도 더 도피했을 그들은 뜨거운 가슴과 복음을 든 소망의 발걸음으로 인해 풀려나자마자 다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러 다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의 말씀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그들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임을 봅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에 두었던 스데반은, 번쩍하고 뜬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 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 몸에 소망 없지만, 번쩍 뜬 눈에 들어온 하늘 나라의 기쁨과 소망이 너무도 선명하였습니다. 이 삶엔 슬픔이 가득하지만 번쩍 뜬 눈에는 지금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천국이 보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엔 무엇이 보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양, ‘내 영혼이 은총 입어’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픈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비결은 바로 번쩍 뜬 눈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내 곁에 계신 부활의 예수님이 보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복된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면 뜨거운 가슴과 소망의 발걸음이 우리를 할렐루야 찬양하세 고백하게 할 것입니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우리 몸에 털썩의 순간은 어쩔 수 없이 찾아 옵니다. 연약한 우리 삶에 도전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도전들이 우리에게 임할 때 사탄은 우리가 털썩 주저 앉아 좌절하고 쓰러지기를 바라고 기다릴 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이와 같은 실의에 빠져 우울과 좌절과 분노에 넘어집니다. 예수님을 알지만, 엠마오로 가던 이들처럼 죽으신 예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살아계실 적에 기적을 베풀기도 하였고, 선하신 분이셨지만, 세상의 불의한 공격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까지의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꺾이지 않으셨습니다. 주저 앉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어두움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일어납시다. 사탄이 주시하는 털썩의 순간 그의 기대와 다르게 번쩍하고 눈을 뜹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봅시다. 이 땅에 임하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확인합시다. 그렇게 눈을 뜨셨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과 희망에 찬 발걸음으로 우리 주변의 공동체로 향합시다. 가정에 소망을 전하고, 구역에, 교회에, 일터에, 선교지에, 나아가 세상에 그 빛을 전합시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349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1-10 (02/18/2024) webmaster 2024.02.19
348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서 1:17-2:10 (02/11/2024) webmaster 2024.02.13
347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1:11-16 (02/04/2024) webmaster 2024.02.05
< Prev 1 2 3 4 5 6 7 8 9 10 36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