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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문 목사, 다른 생각, 다른 길 (이사야 55장 3-9절) 05/21/2017

 

킴벌리 커버거란 분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 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신경쓰지 않았으리라….(중략)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류시화시인이 번역하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살다가 후에 알게 되는것을 과거의 어떤 싯점에서는 알 수 없기에 많은 것을 잃고, 후회하곤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결말을 앞당겨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있들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를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가?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들의 어떻게 풀려갈지 알 수 없을때가 많습니다. 때론,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일이 풀려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때가 더 많습니다. 가끔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때는 우리가 생각한것 보다도 더 나은, 멋진 결과가 나올때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며,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링컨 센터의 Metropolitan Opera House에 한 특이하게 생긴 멋진 상들리에가  걸려있습니다.  원래 이 모양은 디자이너가 했던 원 스케치와 전혀 다른것이어습니다.  작가가 스케치를 다 완성할때쯤에, 스케치 북에다가 마지막에 페이트를  잘못 떨어 틀여서 주위로 흰색 페이트가 다 튀어 큰 얼룩이 지었습니다.  그는 다 망쳤다고 생각하며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망친것 같은 스케치를 본 록펠러가 폭발한것같이( explosion)된 이 모습에 더 매료되어서 그 디자인으로 상들리에가 만들게 되었고,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사람의 원래 계획과는 다랐지만,  결과는 더 아름다왔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예상과 달리, 우리 생각을 뛰어넘어, 더 위대한 걸작품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후의 결과물을 보기 전에는 혼란스럽고, 막막합니다.

 

하나님을 섬겼던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들처럼,후에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결과를 알았더라면, 자신들의 생각과 길을 그렇게 고집하지 않았을 것일텐데 말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여러 질곡과 아픔, 패배를 맞보며 살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대로,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당시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앗시리아에게 BC 721년백경 침략당해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아래쪽 남유다에서도 우상숭배로 타락하여 가는 풍조가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런때에 이사야는 오직 하나님게만 의지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부르짖었지만, 그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기 보다는 애굽과 동맹을 맺으며, 결국 후에 바벨론의 세력이 침략당하고 맙니다.

 

예언자로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았습니다.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와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더 의존하였죠. 후에, 비참한상태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까지 된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후에 펼쳐진 그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자기의 생각데로,  자신의 길로만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는 자신들의 생각과 방식만을 고집하며, 돌진해갔습니다.

 

그렇게 70여년이란 세월을 바벨론에서 지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하나님게서는 다시 제2이사야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그들을 불러내가실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후에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었던 자들이, 그 당시 ‘후에 알게 될것을 지금 알았더라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더, 자유롭게,  즐거운과 기쁨이 있는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 않았을까요?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 말씀에서는 구원의 약속을 확증해주고 계신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남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던 강대국이었고, 건축, 문화, 금융등에서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던 곳입니다.

 

독일에 페르가몬 뮤지움에 당시 바벨론의 문명이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잘 볼수있는 유적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현대인들의 눈에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엄청난 위엄을 풍기는 문화임을 알수 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느브가네살 왕때 세워진 풍요의 신인 이쉬타르 문(Ishtar Gate) 모습이고,  두번째 사진은 힘의 상징인 사자들의 행렬의 길의 모습입니다. 보시는것처럼, 풍요와 힘을 자랑하던 그 강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오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와와 들으라” 말씀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들으면, 그들의 영혼이 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이들의 영혼에 관심하고 계십니다.  오늘 봉독은 하지 않았지만, 앞절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꿰뚫어 보시며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그들은 비록 풍요와 파워가 넘치는 바벨론이란 곳에 살곤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또, 2절에 보시면 그들은 하나님 눈에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으로 사고,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간곡히 요청하고 계십니다.

더아가서는,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듣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찾고, 그분을 부르라 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의 모습은 어땠던 것일까요?

 

하나님 눈에 그들이 모습이 어렇게 비춰지고 있었습니까?  거대한 왕국인 바벨론 문명 아래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 무엇을 쫓아 살고있었던 것일가요?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침략으로 멸망당하는 아픔과 설움,절망을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포로기를 견디다가, 그들에겐 자신들을 구원해줄 하나님께 경청하기를 포기하며 세상에 다른 곳에서 양식을 찾으며, 채워지지 않을 것들을 위해 수고하며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힘과 풍요라는 우상을 쫒으며,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위에 두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었을지요?

제가 매년  세례교육반을 인도하고 있는데, 십계명을 다룰때면 꼭 둘째 계명인 ‘우상’에 관한 토론이 많이 오고갑니다. 현대에 우리가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않지만, 좀더 깊숙히 우리 문화를 꿰뚫어 보면 여전히 많은 우상이 있음을 발견하며 새교우님들이 활발한 이야기를 나누곤합니다.

마르바 던 교수도 [고귀한 시간 낭비]란 책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만일, “잘못된 삶의 목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고 있다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분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갈망’,( C. S. Lewis가 독일어로 ‘젠주흐트’라고 부른), 쉽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깊이 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채우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절절한 목적’으로 채우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인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찾고 있는 많은 것들이 우상이 되어감을 폭로하면서요. 그분이 말하는 요즘 사람들의 추구하는 우상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쫓는 것입니다. 둘째로 물질적 소비주의, 즉, 물질적 소유에 대한 끊없는 추구가 우상이 될 수 있죠. 아울러,때론 지나친 자율(autonomy)과 권력의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때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지난친 자율을 주장하며,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노예”가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분의 말에 동감하며, 오늘날뿐 아니라,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벨론이란 강대국에서 힘없이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도 사실 목마른 영적 메마름이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맺으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이런 우상들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양식아닌 것에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한 것들을 위해 수고하고 잇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살면서, 그냥 노예도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사야서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찾으라고, 부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허락하신 확실한 은혜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은혜의 구원의 약속은 다윗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만민들에게 주실 약속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그 은혜의 약속을 주시기 위하여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을 만날 만한 때에, 가까이 계실때에  나를 “찾아라, 부르라”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외치고 계십니다. 그들이 찾고, 부를때에, 흔쾌히 만나주시기를 원하시며 관대히 그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7절에 보시면, 심지어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초대하고 계십니다. 7절,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말씀하시죠? 여기 악인과 불의한 자들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길을 바꾸지 않았던 자들을 언급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그 음성을 들지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살던 자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까지도 자기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기 바라시며, 만일 돌아오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8절에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들과의 생각의 다름,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전에 자기 생각대로만 했던 자들이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시기에,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음절에서 좀더 근본적인 설명을 주십니다.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들의 생각과 다를뿐이나라,  하늘과 땅 만큼이나 높이가 차이가 난다는 , 그것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생각 대신 가져다 놓기 일쑤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것이 우리들이 쉽게 빠지는 종교적 오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을 들어주실 것라 기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범하는 오류라는 지적하십니다. 우리들이 잘 빠지는 오류입니다.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대로만 요구하던 한  농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의 농부들이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일 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 년 동안 너희 원하는 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에 곡식이 잘되어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신이 나서 추수를 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

 

그제서야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에 의해서 하나님께 주문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구하며 하나님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알곡있는 열매를 얻는다는 것을요…

 

자기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고집하며, 하나님께 자기의 욕망대로 요구하는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방식대로 하나님께 요구하며,  하나님의 생각대신 자신의 생각을 올려놓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의  높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자신의 일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뒤바꾸는 일-‘전복’ 시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여러분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 여러분들의 기대와는 다름을 느껴보셨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생각의 높이는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삶에 미래를 알수 없고, 때론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나중에 가셔야 후외합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요.

사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생각을 접할때 우리는 가끔은 낮설고, 불편하기까지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늘 찾으며, 부르며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살아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 그때 우리들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 좋은 길로 인도해 가지 않을까요?

그때, 나의 삶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바뀌어져 가고, 우리는 더 높은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 지어져가고, 세워져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게 되고, 그때,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 세상의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우상들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려 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면서 어느덧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문화속에서 삽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가야 할까요?

 

오늘 이사야 말씀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생각과 길이 나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낮은 자의 모습으로 따라 가며, 때론 하나님의 길을 기다리며 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로 대치하며 살아가는  유혹을 이기며,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을 알려주시면서요

.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시려고, 자기의 생각대로가 아닌,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며, 하나님의 생각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길을 우리들 모두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생각대로 살던 자였더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긍휼히 우리는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게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많은 계획과 우리 자신들의 생각으로 살아가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먼저, 우리들의  생각과 길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 다른 길을 품고 계신 그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기뻐하십시요.  여러분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어드리시면서요…직장이던, 가정이던, 연구실이나 학교에서든..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만나실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면 살아가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시며,  삶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가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 자신의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다른 생각으로 펼쳐가실 더 좋은 길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 계획 안에 들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실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18세기 영국 노스햄프톤에서 태어난 윌림엄 캐리(William Carrey)는 당시  촌사람이었지만,  문맹률이 높던 시절, 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당시 전도유망한 직업이엇던 구두 수선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한 기도 모임에서 히브리서 13: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란 말씀을 읽고, 심령에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때, 그는  그동안 세상과 타협하며 산 신앙을 회개합니다. 그 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며,  후에 세계 선교에 눈을 뜨고  유럽에 세계 선교의 열풍을 확산시키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후에 인도 선교사로 살게 되 었던 윌리엄 캐리에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모토가 있었습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

 

이 분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를 찾으며 그했던 분이었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세상이나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는 다른, 더 높은 생각, 더 멋진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시는 하나님, 바로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시면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시도한 분입니다. 아마도, 이분은 이사야 55장 9절 말씀인,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라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생각에 의존하여 살아가신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어떤 삶을 내댓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생각과 방식만을 고집하며,  여러분 자신에 기대어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신, 그리고, 다른 방식들로 펼쳐가시는 하나님게 여러분의 삶의 계획을 기대고 계십니까?

요즘, 보스톤, 뉴욕 모두 졸업 시즌으로 졸업생들의 물결이 출렁되고 있습니다. 졸업하시는 분들은 새롭게 세상에 발걸음을 내딪으실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나아 가실 때, 오늘 들려주시는 이사야서의 말씀,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삶의 장을 시작하시는 분들, 또 새로운 계획을 품고 계신 분들, 여러분들의 생각에만 의지하지 않고,  그분의 음성에 귀 귀울이며 걸어가신다면, 여러분들과 다른 생각, 다른 길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더 멋지게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때 , 여러분의 영적 목마름에 세상의 다른것으로 것으로 채우지 않고, 하나님 자리에 다른 세상의 우상들로 채우지 않게 될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참 자유한, 참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펼쳐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와는 다른 생각, 다른 길을 가지신 하나님, 그분께 낮아짐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래서,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라’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요. 그래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시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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