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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자들” (출애굽기 23장 1-13절) 08/06/2017

 

전갈이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장마가 되어서 물결이 너무 세서 도저히 자기 실력으로는 건너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거위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위는 다리를 절룩 거리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얼마전 전갈에 물려서 절룩 거리고 있었습니다. 전갈이 지나가는 거위를 부릅니다.

“거위야 거위야 지난번은 너무 미안했어. 다시는 착한 너를 물지 않을게. 헌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내가 강을 꼭 지금 건너야 하는데 물길이 너무 세서 도저히 건널수가 없어 나를 업고 건너가 줄래…?” 거위는 말합니다.

“너를 어떻게 믿어 너 때문에 아직도 내가 발을 절고 있잖아. 아직도 한 달은 지나야 다 나을 것 같애.”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로 물지 않을게. 하늘을 두고 내가 맹세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수가 없어. 너는 내가 강을 건너게 해 주면 즉시로 나의 목을 물어서 나를 죽일거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절대로 너를 안 물어. 한번 테스트해봐.”

마음 착한 거위는 말합니다.

“정말이지. 정말 안 물거지.”

“그럼 안 물고 말고.”

착한 거위는 전갈을 자기 등에 태웁니다. 강 중간쯤 되자 전갈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거위의 목을 쪼기 시작합니다.

“전갈아, 나를 안 문다고 했잖아.”

“그래 이건 무는게 아니야. 그저 쪼는거지…. 나도 무지 참고 있다고.”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전갈은 정말로 안 물기로 결심하고 거위 등에 탄 것입니다. 강 중간 쯤까지는 겨우 갔지만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쪼기 시작합니다. 약속을 했으니 물진 못하고….

이 전갈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인의 모습입니다. 급할 때는 결단을 잘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결단을 따라 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속에 깊숙히 숨어 있던 죄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안식월을 마치면서 저희 교회 네 개 비전에 대해서 설교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상록 기도회 헌신 예배로 비전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그 전 주일까지 세 개의 비전에 대해서 차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네 가지 비전 선언을 말씀드리면,

 

  • 삼 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
  • 세계를 향한 교회
  • 한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
  • 사랑으로 정의를 이 땅에 세워가는 교회

 

오늘은 네 번째 저희 교회 비전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으로 정의를 이 땅에 세워가는 교회.’

 

네 가지 비전이 다 그렇지만 네 번째 비전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린 전갈과 거위의 이야기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전갈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있는 전갈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전갈이 과연 사랑할수 있을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출애굽기인데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분 십계명을 비롯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계명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면,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불의를 만드는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삶의 첫 발걸음은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 것인줄 압니다. 2절 말씀입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숫자에 눌려서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숫자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갑자기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보통 성경에는 가난한 자 편에 서라는 말씀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잘 해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로 가는 세 단계인 것 같습니다. 거짓을 행하지 말고 숫자에 흔들리지 말고 선입견을 갖지 말아라!

 

어떻게 보면 여기까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과 거의 같다고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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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을 그린 그림입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공평한 저울을 상징합니다. 특히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는 숨은 뜻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정의의 칼입니다. 잘 못 된 것은 거침 없이 짤라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신의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입견을 없애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의의 원 투 쓰리 세 단계인 것 같습니다. 성경과 신화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여튼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속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이 말씀만 하시면 이스라엘 민족이 정의의 길로 갈 것을 확신하셨겠나요?

사실 그리스 로마에서도 정의의 개념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정의의 나라는 이 땅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인간은 전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종자인지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원수의 잃어버린 소나 나귀를 보면 기회는 챤스다 하고 원수 갚는 기회로 사용할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계명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갈이기 때문입니다. 6-8절 말씀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놀랍게도 또 다시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전갈이 전갈되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은 선입견이라는 것입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이유는 자기 스스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어느 책을 보니, 음악인들 오디션에서 특히 관악을 위한 오디션에서 여자 음악인들이 많이 불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으로 가리고 오디션을 하면 가리고 하지 않을 때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그 때 공평해 진다는 것입니다. 심판관들은 스스로 생각하겠죠. 당신은 보이는 것에 영향을 안 받는다고… 보는 순간 선입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생기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뇌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뇌물이 바로 선입견을 만들게 합니다. 뇌물을 보는 순간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의를 이 땅에 세워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갈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정의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정말 불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도 안 하셨을 줄 압니다. 과연 전갈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정의를 세우는 민족이 되어 갈 수 있을까요? 9절 말씀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뇌물을 안 받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진정 정의를 세우는 민족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돌보다가 힘들어 질 때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이 말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멧세지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나그네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되었기에 나그네를 돌볼수 있는 축복을 덧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전갈과 같은 민족이지만….

 

그리스 로마인들도 정의가 무엇인줄 알았습니다. 공평한 추와 같은 것이고 선입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알았지만 정의의 세계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정의의 세계는 사랑으로 나그네를 돌봄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전갈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도 나그네를 돌보기 시작한다면 정의를 세우는 민족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민족은 흥분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그네가 되게 하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민족이 되게 하심이었구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까? 이제 소매를 걷고 나그네를 찾아 다닐까?”

그러면 전갈이 성급히 다닌다고 금방 변합니까? 그래도 전갈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년과 안식일 계명을 함께 엮어서 말씀하십니다. 시간상 12절 말씀으로 건너 뜁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일을 지키는 숨은 목적 중 하나는 나그네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할 때 어땠습니까? 안식일을 지킬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안식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1주일에 하루는 정말로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곧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선물을 주시면서 꼬리를 붙이셨습니다. “너희가 쉴 때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어떻게 보면 안식일 계명 하나로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는 그토록 그리던 쉼의 시간을 1주일에 하루 주셨습니다. 아울러 나그네를 쉬게 함을 통하여 정의로운 삶에 기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전갈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도 정의를 세우는 삶을 살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 귀한 선물을 제대로 사용했을까요?

오래전 어느 교우님이 하신 말씀이 종종 생각납니다. 학생 시절이었는데 토요일 곧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이웃에 사는 유대인이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하면서 집으로 들어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기 스위치를 켜 달라고…. 자기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 키면 안 되고, 이방인들은 지킬 필요가 없으니 켜도 된다는 뜻이었죠. 전형적인 전갈의 모습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안식일을 본인들의 쉼의 시간으로만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나그네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더 이상 유대인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도 같은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선물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나그네를 위해서…. 이 때 우리는 정의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곧 안식일을 나그네를 생각하면서 지킬 때 진정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 유명한 Walden Pond가 있습니다. 이 pond에서 생활한 후 ‘월든’이라는 책을 지은 헨리 소루우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을 표현합니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번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의자에 대해서 김기석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진계유의 말을 소개합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두번째 의자인 우정의 의자는 마주 앉는 의자라고 표현합니다. 마주 앉을 때 눈과 눈이 마주칩니다. 상대방의 말이 들려 옵니다. 곧 화해와 평화가 시작됩니다.

세번째 의자인 사교의 의자는 둘러앉음의 의자라고 합니다. 둘러 앉을 때는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 사무실에 걸려 있는 어느 교우님이 그린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림에 보면 12명이 둘러 앉아 있고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자리는 나그네의 자리입니다. 빈 자리에 나그네를 영접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자리는 천국이 되어 집니다.

둘러 앉음, 이는 진실로 사랑으로 정의를 이 땅에 세우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 때 우리들 안에 있는 전갈의 모습이 자리를 감추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축복을 저희는 교회적으로 종종 누렸다고 생각됩니다. 3년전에는 저희 교회 정의 평화 환경 위원회 주관으로 보스톤 화음 체임버의 협조를 받아 씨리아 난민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가졌었습니다. 사진을 잠시 보겠습니다.

저희 PUSA총회가 현재 씨리아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사역에 사용되도록 모금액을 총회로 보냈습니다.

 

아울러 작년에는 저희와 같은 노회 소속인 흑인 교회 Roxbury 교회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가졌습니다. 이 자선 음악회는 Roxbury 교회가 운영하는 Social Impact Center를 후원하는 음악회였습니다.

최근에는 매년 5월에는 저희 교회에서 노회가 열리곤 작년 5월 노회 석상에서 제가 Roxbury교회에 전달하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돕는 분들의 수고로 이처럼 나그네를 위한 귀한 일들을 펼쳐 갈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음악인들만 이런 일을 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가는 축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전갈입니다. 언제나 이웃을 해할수 있는 저력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사랑으로 이 땅에 정의를 세워 갈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나그네를 사랑한다면…, 나그네를 마음에 두고 일주일에 하루 주님께 아름다운 예배를 드린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받은 감동에 따라 나그네를 위해서 우리들의 삶의 공간을 내어준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자들의 삶입니다. 나그네를 생각할 때 참 안식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토요아침 기도회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를 강해 설교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함께 생각한 말씀이 네 가지 비전 선언에 대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드리면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4: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하고 있었습니다. 잘 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도바울은 끈질기게 권합니다.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이는 제2의 희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 아닐까요?

“더욱 많이 힘쓰라.”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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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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