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13 (08/27/2017)

 

류시화 시인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류시화 시인은 인도를 방문하기를 즐기는 분인데 인도의 어느 점성가 가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뛰어난 천문학자요 점성가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늘 천문학 책만 들여다 보고 있어서 별자리에서 쌀이 나오냐고 불평을 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연구가 헛되이 끝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지금 별자리들의 배열을 예측해 우주 역사상 가장 소중한 시간을 계산해 내고 있는 중이라고, 그 특별한 순간이 오면 옥수수 알갱이가 황금으로 변할 것이라고 장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언제까지 그런 허황된 소릴 늘어놓을 거예요? 당신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기적을 행한 적이 있다면 우린 이렇게 가난뱅이 신세가 되진 않았을거예요. 한 끼 식량도 구해오지 못하면서 어찌 옥수수를 황금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아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점성연구를 계속한 점성가는 어느 날 그 순간이 다가왔다고 선언했습니다.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행성들의 배열로 우주 에너지가 그 한순간에 집약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깊은 명상에 들어갈 것이오. 한순간에 모인 우리의 에너지를 이곳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요. 당신은 옥수수와 뜨겁게 달군 솥을 준비하시오. 내가 신호를 하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옥수수 알갱이를 전부 솥에 부어야 하오. 그러면 그것들이 팝콘처럼 터지면서 황금 알갱이로 변할 것이오. 그 순간을 놓치면 절대로 안 되오. 조금만 늦어도 천 년에 한 번 오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오”. 그 아내가 말합니다.

“눈 씼고 봐도 이 집에 옥수수가 한 알도 없는데 어떻게 황금알을 만든단 말이에요?’

“이웃집 여자에게 가서 조금 빌려 오면 되지 않소?”

점성가의 아내는 반신반의 하면서 옆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옥수수 알갱이를 한 솥 빌려 달라고 부탁하자 이웃집 여인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은 양의 옥수수가 필요해요?” 순진한 점성가의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여인은 선뜻 옥수수를 빌려주었습니다.

점성가의 아내가 떠나자 이웃집 여인은 천 년에 한 번 오는 우주의 역사적 순간이 점성가의 집에만 작용할 리 없다고 여기고 그 드문 기회를 자신도 붙잡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불을 지펴 솥을 뜨겁게 달군 뒤 옥수수 알갱이를 가득 준비해 놓고서 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는 사이 점성가의 아내도 얻어 온 옥수수를 앞에 놓고 달궈진 솥 옆에 앉아 남편의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명상에 잠겨 있던 점성가가 드디어 “바로 지금이야!”하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이웃집 여인은 즉각적으로 뜨거운 솥에 옥수수 알갱이를 부었습니다. 그러나 점성가의 아내는 미심쩍어하며 되물었습니다.

“지금 옥수수를 넣으라고요? 지금이 정말로 그 순간인 게 맞아요? 다시 한 번 잘 확인해 봐요.”

점성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우주의 바로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황금 같은 기회’가 날아간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점성가가 그동안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린 아내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을 때 이웃집 여인이 반짝이는 황금 알들이 가득 담긴 솥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사 표시로 황금 알 몇 개를 점성가의 아내에게 선물했습니다. 눈이 휘둥그래진 점성가의 아내가 남편에게 외칩니다.

“다시 한번만 그 순간이 되돌아오게 해 봐요! 이번엔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을게요!” 점성가는 소리칩니다.

“한번 지나간 우주의 순간을 내가 어떻게 되돌린단 말이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모르오?”

 

긴 이야기지만 바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임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황금 알 아니 그 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도 독자들에게 그들이 사는 현재라는 시간이 소중하고 그래서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와 독자들이 살았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그 시간이 오늘 우리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바로 그 전에 쓴 내용과 깊게 연관된 글을 쓰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전 귀절을 보아야 합니다. 11:4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나오고 ‘그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그들은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먼저 ‘그들’부터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부르는데 이 믿음의 장에는 아담의 아들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라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선배들을 일컷는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독자들입니다. 그런데 좀더 넓게 생각한다면 우리와 그들을 이렇게 구분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믿음의 선배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분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늘의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11:40절 말씀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처음 독자들은 이 말씀을 읽고 어리둥절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사는 자기들에게 더 좋은 것이 예비되었고 자기들이 이 예비된 것을 누림을 통해서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수고도 온전함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동안 무척 위대해 보였는데 그들이 도리어 자기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수고가 꽃이 핀다는 것입니다.

곧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믿음 생활을 했느냐입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후의 최고의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다윗 사무엘 그 누구도 이 놀라운 시간에 살지 못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믿음의 조상들이 살고 싶어했던 이 놀라운 시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멧세지를 들은 독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초대교회 당시에도 운동 경기는 아주 중요했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이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원형 경기장 안에 두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 그룹은 응원석에 앉아 있는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또 한 그룹은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2018월드컵 진출을 위한 아시아 예선전을 치루느라 축구 애호가들은 마음을 졸이며 지내실줄 압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의 장면을 축구 경기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이 예선을 통과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물론 아직 두 게임이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단 나머지 두 게임을 젖먹던 힘을 다 발휘해서 이겼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전력투구를 한 나머지 부상자도 많았습니다. 예선은 통과했지만 본선에 나가 뛸수는 없게 된 선수가 많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선에는 뛸수 없으니 후배들이, 예선에 참가 안했던 후배들이 뛸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월드컵 본선 경기장 안에 들어선 선수들은 후배들입니다. 반면 부상당한 선배들은 응원석에 앉아 있습니다.

 

물론 세상 월드컵경기에서는 예선을 치룬 대부분의 선수가 본선에서 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전에 뛴 사람들 곧 예선 경기만 치룬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 후에 뛰는 사람들 곧 본선 경기만 치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본선 경기에 선수로서 초대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을 포함해서…. 그러니 우리들이 참여한 이 경기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지만 소중한 만큼 아주 치열한 경기를 치루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전반 45분 후반 45분이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져도 좋으니 빨리 끝내기를 바랄 정도로 힘든 경기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힘든다는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예선전을 뛰었던 선수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응원석에 젊잖게 가만히 앉아 있겠습니까? 소리 소리 지르지 않겠습니까? 어떤 응원을 할까요? 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제는 특별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자기들은 응원석에 앉아 있습니다. 이 특별한 시대에 사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응원합니다. 그 응원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강한 멧세지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앙리 베르그송이라는 학자는 도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명령이 내려진 의무입니다. 모든 계명들을 포함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두번째 도덕은 ‘초대’ 혹은 ‘동경’에 기초한 도덕이라고 합니다. 이는 위대한 위인들을 바라 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첫번째 도덕에 속한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물론 첫번째 도덕 위에 한 가지가 더해 졌습니다. 주님을 바라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 볼수 있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 봄으로 두번째 도덕까지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선배들이 응원석에서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러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면 예수를 바라 본다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3절 말씀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낙심할 일이 생길 때마다 고난이 올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선 경기가 어떻게 보면 예선 보다 더 힘들고 많은 유혹이 있고 그래서 낙심하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본선이 더 힘들죠. 4절 이하 말씀이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8-10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늘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면 본선 경기에 참여한 자들 중에 누가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될까요? 응원단의 소리를 듣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새교우반을 통해 저의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저의 아버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서 대광학교를 세우셨는데,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대광학교 안에 사택에서 살았습니다. 집이 학교고 학교가 집이었습니다.

거의 17년을 대광학교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저의 기억에 제일 강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교문을 들어서면, 물론 교문이 집 대문이었습니다만, 제일 눈에 띄는 것이 강당 외관 벽에 붙여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는 큰 표어였습니다. 후에 새로운 강당을 지은 뒤에는 그 강당 외관 벽으로 옮겨졌는데 아쉬운 것은 강당이 정문과 마주 보지 않은 곳에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정문에 들어 오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보았던 그 하얀 색 바탕에 파란 글씨로 쓰여져 있는 글은 저의 삶에 깊게 뿌리 박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를 안 다니다가 대광에 들어 온 후 후에 훌륭한 목회자가 된 분들도 많이 있는데 아마도 이 표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이미 믿음의 선배들의 음성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대광 학교를 다닌 동문들도…. 그 표어를 볼 때마다 이슬에 옷이 젖듯이 어느덧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축복이 있습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인생을 오래 살다 보면 다리도 약해지고 새와 같이 날던 사람들도 날개를 잃어 버립니다. 나는 법을 잊습니다. 반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이지만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리는 고쳐집니다. 더 든든해집니다. 아니 날개가 달린듯 날아 다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특별한 시간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덧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0:31절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너무 다리가 든든해져서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8월 마지막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릴케의 표현을 빌리면 지난 8월은 위대했습니다. 저는 조금 릴케의 표현을 바꾸고 싶습니다. 지난 8월도 특별했습니다. 이제 또다른 특별한 시간이 찾아 옵니다. 바로 9월입니다. 9월은 하늘로 비상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9월이라는 특별한 시간은 아무에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응원자의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 찾아 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제가 처음 이야기를 류시화 시인의 책에서 읽은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책의 제목이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 보지 않는다’입니다. 그 책 제목이 좋아서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구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독수리가 왜 하늘의 황제입니까? 날 때는 뒤돌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종 앉아서 뒤를 돌아 봅니다. 그러나 날 때는 뒤를 돌아 보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 보는 순간 독수리의 힘은 사라집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안식월을 마치고 곧 바로 저희 교회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을 가지고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의 희년을 향하여 함께 날아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날아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네 가지 비전을 나눕니다.

  • 삼 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
  • 세계를 향한 교회
  •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
  • 사랑으로 정의를 이 땅에 세워가는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제2의 희년을 향하여 마음껏 날아 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우리와 같이 특별한 시간에 사는 위대한 분의 글을 어느 역사책에서 접해 보았습니다. 1860년도에 개신교가 세계선교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을 무렵 The Earl of Shaftesbury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Those who hold the truth have the means enough, knowledge enough, and opportunity enough, to evangelize the globe fifty times over.”

“진리를 아는 자는 온 세계를 50번 복음으로 뒤집어 놓을수 있는 힘과 지식과 기회를 가졌다.”

오늘 설교 내용에 맞게 각색을 해 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은 온 세계를 50번 뒤집어 놓을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왜냐하면 독수리의 날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잘 쉬셨습니까? 9월이 다가옵니다. 특별한 2017년도도 4개월이 남았습니다. 우리를 부러워 하는 응원자들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온 세계를 남은 4개월 동안도 50번 뒤집어 놓는 일에 동참하십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응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나시길 원하십니다. 제 2의 희년을 향하여 가는 우리를 위하여 응원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349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1-10 (02/18/2024) webmaster 2024.02.19
348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서 1:17-2:10 (02/11/2024) webmaster 2024.02.13
347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1:11-16 (02/04/2024) webmaster 2024.02.05
< Prev 1 2 3 4 5 6 7 8 9 10 36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