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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있는 곳에서” (창세기 13:1-18) 09/24/2017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어디에서 깨달음을 추구해야만 할까요?”
“이곳에서.”
“그것이 언제 가능할까요?”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럼 왜 저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스승이 말합니다.
“네가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가 묻습니다.
“왜 안 본다는 거죠?”
스승이 말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존재해야 한다. 너의 마음은 거의 언제나 다른 곳에 가 있다.”

축복의 삶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축복은 따라 온 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오늘 제 설교를 경청해서 들으시라고 이 예화를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경청해서 들으시면 깨달음이 올줄 압니다. 축복이 따라 올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 설교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곳과 그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사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예화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말은 쉽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구체적으로 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살았는지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아브라함과 정반대의 길을 갔던 한 사람도 소개 되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지금 여기에 사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더 잘 볼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피신 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왔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돌아와 벧엘 근처에 조카 롯과 함께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롯이 둘 다 재산이 많아서 그들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서 유명한 말을 하죠. 9절 말씀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갈대아 우르인 고향을 떠날 때 이미 75세였습니다. 그러니 못해도75에서 넉넉 잡아 80쯤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롯은 조카이니 50대였을 것입니다. 물론 50대도 새로이 이민 생활하기엔 젊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80세 할아버지보다는 훨씬 쉽지 않았겠습니까? 하여튼 이 말을 듣고 롯이 어떻게 하죠? 13:10절 말씀을 보면, 롯은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 봅니다. 그러다가 요단지역을 보게 되었습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요단을 택하고 그리로 떠납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민망하게 만들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그러면 이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습니까? 14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이에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을까요?
‘넓다?’ 아니면 ‘좁다?’ 아니면…?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도덕을 가르치는 유선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입니다. 혼자 고학을 하면서 대학도 졸업하셨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되셨는데, 하루는 남산에 올라가 보았다고 합니다. 남산에서 내려 보니 서울에 집이 가득히 들어차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고 합니다. ‘좁다’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넓은 서울에 자기가 살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마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좁다.’ 그럴수 밖에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오자마자 기근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 땅들을 지나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 한편 애굽에서 애굽왕에게 아내 사라를 뺐길뻔 합니다. 혼줄이 나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왔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조카 롯이 좋은 땅을 먼저 찾아 갑니다. 자기가 설 곳은 그 어디도 없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예비해 주셨으리라는 믿음은 마음 한 구석에 당연히 있었겠지만…. 이 때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 하시니 잔잔해 지려하던 그 아픔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아픔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 옵니다. 15절 말씀,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순간 보이는 땅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눈이 바뀝니다. ‘좁다’라는 시야에서 ‘넓다’라는 시야로…. 한동안 롯으로 인해 시험이 들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기대가 흐려지고 있었던 차에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약속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이제는 자기에게 주시는 땅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가슴으로 동서남북을 보게 됩니다. 아브람의 눈은 망원렌즈처럼 바뀝니다. 멀리까지 기가 막히게 잘 보입니다. 잘 보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경관이 사방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고 넓을줄이야….
물론 자기 땅이 되었으니 더욱 아름답게 보였겠죠. 이렇게 황홀경에 잠겨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까지 갖게 하십니다.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이 땅의 티끌 같게 될 것을 보게 하십니다. 아니 모래 한 톨 한 톨이 그 전에는 대수롭게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 톨 한 톨에서 자손 하나 하나의 모습으로 봅니다.
사실 그 동안 아브라함은 약속은 받았지만 자식은 없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늘 아픔이 있었습니다.
“없다.”
이제는 모래를 보면서 외치게 되었습니다.
“많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는 현재 보이는 세계를 새롭게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좁고 좁게 보였던 온 세상이 이제는 광대한 세상으로 보게 해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아직 자녀가 하나도 없지만 수 많은 보이지 않는 자손들을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곧 미래를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자손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광대한 땅에 꽉 차 있는 웅장한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는 축복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눈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이런 눈이 주어집니다.
“좁다”에서 “넓다”로, “없다”에서 “많다”로….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미래를 보는 눈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넓다” 외칩니다. 아울러 미래를 바라보며 외칩니다. “많다.”

요즘 미국의 남부는 홍수로 극심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곳곳에 홍수가 나 있습니다. 홍수 피해자들을 위해 많은 분들이 헌신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홍수가 나 있었습니다. 말의 홍수, “좁다” “없다”의 홍수가 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넓다” 많다”를 외치는 아브라함을 한 군데 머무르게 하실리가 없습니다. 이에 특별한 눈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당연히 순종해서 길을 떠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그 곳을 떠나 헤브론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이 어디라구요? 13:3절을 보면 벧엘이라고 추정됩니다. 곧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떠난 것입니다.
(스크린:이스라엘 지도)
벧엘은 가나안 땅 가운데이고 헤브론은 가나안 땅에 제일 아랫쪽에 있습니다. 일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어나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벧엘을 떠나서 헤브론으로 갑니다. 곧 종으로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 갑니다. 종으로 내려 가면서 횡으로 눈을 돌렸을 것입니다. 옆으로 넓게 펼쳐지는 땅을 바라 보면서 헤브론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물론 종종 신발에 모래가 자꾸 스며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래들은 자기의 수많은 자손들 미래에 펼쳐질 약속을 상징하니…, 보통 모래를 털 때 얼마나 짜증이 납니까? 그러나 모래를 털 때마다 벅차 오르는 기쁨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젠가 자기 자손들로 꽉 차게 될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매일 매일 감격의 삶을 살아 갑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넓다” “많다”의 축복을 이 땅 위에서 누리진 못했습니다. 후대가 누렸습니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확실히 아브라함이 이 땅 이에서 누린 것이 있습니다. “넓다” “많다”의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을 평생 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그런 약속을 받으면 그럴수 있겠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에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로마서 8: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는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 안에 과거 현재 미래 아니 영원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노래도 분명히, “넓다,” “많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의 축복의 세계가 환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롯처럼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받은 자 답게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는 것입니다.
“넓다.” “많다.”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음의 자녀가 된 후 “넓다” “많다”를 외친 한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이런 축복된 눈을 소유한 사람 중에 중세기에 살았던 로렌스 형제가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수도원에서 요리사로 일한 평민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느끼는 것을 조금 씩 써 놓은 것이 후대에 발견이 되면서 위대한 영성을 소유했던 평민 요리사였음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로렌스는 밤이 오고 낮이 오고 밤이 오고 낮이 오는 단순한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느낍니다. 뭐 특별한 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곧 오늘 아니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 축복의 세계를 누린 것입니다.
한편 어느 겨울날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를 보다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뭇잎이 새롭게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느낀 것입니다. 온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산 것입니다. 곧 미래라는 시간을 통해서 펼쳐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산 것입니다.
그는 수도사도 아니고 요리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이런 축복의 눈을 소유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수도원에 사는 수도승이 아니고 요리사입니다. 좁디 좁은 부엌에서 매일 하루 세끼를 만드는 요리사입니다. 그리고 장래 희망도 별로 없습니다. 많은 친구 요리사들은 늘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좁다.”
그러나 로렌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넓다,” “많다”를 외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 갑니다. 하루 하루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고 한 계절 한 계절이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렌스의 고백을 통해 구약시대의 고백에서 한 단계 발전된 신약시대의 고백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고백은 자기 민족을 위한 고백이었습니다. 로렌스의 고백은 민족의 벽을 넘어 온 인류가 함께 공유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고백을 하는 자들은 온 인류가 함께 누리는 세계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넓다” “많다.” 고백할 때 온 인류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족과 민족을 위하여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최고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보이는 온 땅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우리가 고백할 때 우리 가정에 교회에 축복이 옵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이웃과 온 인류에게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고백이 보스톤에서도 울려퍼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스톤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보스톤의 삶 하루 하루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담고 하루 하루를 맞이하십시요. 매일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실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는 것은 우리들의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이제 가을이 됩니다. 보스톤에 나무들은 올해 두번째 꽃을 피울 것입니다. 단풍을 바라 보면서 미래에 펼쳐질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십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고 노래를 부르십시다.
“넓다”, “많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서 있는 우리 가정과 교회를 넘어 보스톤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베트남 출신 구엔 반 투안 대주교가 있습니다. 월남이 공산화 되면서 체포되어 13년간 감옥 생활을 겪습니다. 감옥소로 끌려가면서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감옥 살이를 했던 선배 신부님이 석방된 후 삶의 반 평생을 기다림에 소비했다는 안타까운 고백이 떠 올랐습니다. 그 순간 투안 대주교는 결심합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감옥에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매일 글을 써서 면회 오는 사람을 통해 바깥 세상에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글이 모여져서 세 권의 책이 되어 갑니다. 특별히 ‘희망의 길’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그대에게 가장 아름다운 유일한 순간은 현재의 순간이다. 현재의 순간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살라. 만일 그대의 삶이 이러한 수많은 아름다운 순간들로 거대한 수정처럼 이룩된다면 그것은 진정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것이 얼마나 쉬운지 깨닫는가?”
특히 제일 마지막 귀절이 눈길을 끕니다.
“이것이 얼마나 쉬운지 깨닫는가?”
어떤 분들에게 쉬울까요? 약속을 가슴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쉽습니다. 약속을 믿고 “넓다” “많다”를 외치는 자들에게는 쉽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가슴으로 동서남북을 바라 보십시다. 온 세상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모래를 세어 가십시다. 모래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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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349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1-10 (02/18/2024) webmaster 2024.02.19
348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서 1:17-2:10 (02/11/2024) webmaster 2024.02.13
347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1:11-16 (02/04/2024) webmaster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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