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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겸손” 빌립보서 2:1-11 (2018. 1. 21)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서는 부족민 중 한 사람이 몸이 아프게되면 부족의 치료사가 찾아가 맨 먼저 묻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사들처럼 ‘어디가 아픈가?’가 아니라 다음 네 가지를 묻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

이 네 가지를 한적이 오래 된 사람들이 아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방은 당연히 이 네 가지를 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부족입니다. 아마도 부족민들은 이 처방을 받고 모두가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는 신앙 생활에도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립니다.
한편 노래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50편에 보면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고와 춤으로도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하늘 소리’ 곧 사물놀이 팀이 있습니다. 아울러 한동안 워싶 댄싱팀도 있었습니다.
세번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인데, 저희 교회 성경공부는 서로가 자기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시간은 토요 아침 기도회 시간에, 또 다음 달에 시작되는 사순절 새벽기도회 시간에, 어떤 분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고요한 시간을 가지시는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 아프리카 부족의 치료사가 묻는 질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답할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있게 대답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 아프리카 부족민들처럼 꽤 건강하게 사실줄 압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네 가지를 행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 크리스챤의 삶의 전부인가?’
사실 우리는 이 네 가지를 행하기 위하여 주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살면서 아프리카 부족민과 다른 점이 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에게 묻는다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모두 노래하고 춤추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살수 있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사도바울은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는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 하나만 있어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한 가지만 있어도 희망이 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품을수 있다.” 그런데 저는 개인의 차원에서 본문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봉독하면,
“그리스도 안에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제가 조금 각색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누구에게 권면하고 싶은 생각이 나던가 위로하고픈 생각이 나던가 성령의 교제를 갖고 싶은 생각이 나던가 긍휼을 베풀거나 자비를 베풀 마음이 생기거든.’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마음을 품을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하죠? 2절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주님의 마음을 품기 위한 두번째 필요한 것은 자기와 다른 생각과 은사를 가진 자들과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비록 다른 생각과 은사이지만 주님으로부터 왔으니 서로 한마음이 되어야겠죠. 그러나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노력하여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인간인지라 자기가 받은 것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자기가 먼저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말씀드린대로 어떤 교우님은 주님을 생각할 때 권면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어떤 교우님은 주님을 생각할 때 위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권면의 말씀이 떠오른 사람은 위로의 말씀을 하는 사람을 나무랠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필요한 것은 권면인데 왜 위로를 해…?”
반면 위로의 말씀이 생각난 사람은 권면하는 사람에게 대꾸할지 모릅니다.
“아니 지금은 위로할 때지…?”

각자가 받은 생각이나 은사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들의 죄성입니다. 교만의 죄성이라 할까요? 이를 사도바울이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한마음이 되기 위한 권면을 계속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얼마전에 선교지를 여러 군데 다녀 보신 분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평신도이신데 하시는 말씀이,
“선교지를 다녀 보면 선교사님들이 하나 같이 귀합니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함께 협력 사업에는 많은 경우 실패를 합니다.”
이처럼 때로는 선교사분들이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일까요? 그들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다를뿐입니다. 선교전략에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양보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권면의 사역을 중요시 여기고 어떤 이는 위로의 사역을 중요시 여기고…. 안타깝게도 다툼이 생깁니다. 반면 한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나의 은사보다 남의 은사를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요? 나에게 권면의 은사가 있고 이웃에게 위로의 은사가 있다면 위로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요? 이것이 진정 겸손한 마음이 아닐까요?

새해에 BNI자문위원이신 시드니에 계신 김호남 목사님과 새해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김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로 새해인사를 보내셨습니다.
“‘상선약수, 유수부쟁선’ 로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상선약수, 유수부쟁선을 찾아 보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유수부쟁선’만 소개해드립니다.
(스크린)
‘회남자’라는 책에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란 말의 근원이 나온다고 합니다. 뜻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앞을 다투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전문을 보면, 그러기에 오히려 빨리 흐르고 지체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곧 ‘흐르는 물은 다투지 않는다.’
김 목사님께서 저에게 주신 새해인사는, 물론 그 분은 시드니에 계시지만, ‘올해도 함께 겸손히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되자’였습니다.

곧 겸손한 자들이 있는 곳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겸손히 조용히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겸손한 자들이 있는 곳은 시끄러울수가 없습니다.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먼저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함께 먼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또 빨리 흐르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겸손한 삶의 모습은 자기 일을 돌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가지만 빨리 갈수밖에….
그런데 자기 일을 돌보면서 남의 일을 돌본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말은 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일을 돌보면서 남의 일을 돌볼수 있을까요?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수 있을까요? 다시 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주님으로부터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받은 자들은 모두 주님의 마음을 품을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중 하나를 우리들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가 받은 것을 자랑하게 하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툼과 허영에 종노릇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가 받은 것보다 다른 분들의 생각과 은사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를 가지고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때로는 내려 놓아야 합니다. 다툼과 허영의 도구가 될 때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우리의 것을 놓아서 우리가 품게될 그리스도의 마음의 위대함을 사도바울은 이어서 노래합니다. 6-8절 이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했던 노래요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주전 신년 예배시 저희 교회 올해 표어를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 그러면서 겸손 곧 humility의 라틴어 어원은 ‘흙’ humus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흙과 겸손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허리를 숙여 흙을 만질 때 겸손해집니다. 사실 이 노래는 주님의 겸손을 두 단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단계입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고….” 그런데 거기에서 머무시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것으로도 부족해서 죽으셨습니다. 흙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을 강물로 비유한다면 스스로 강바닥의 흙이 되신 것입니다. 흙이 되셔서 위에 흐르는 강물이 다투지 않고 흐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계속 노래합니다. 9절 이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흙이 되신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겸손을 뜻합니다. 흙에 무릎이 닿은 것입니다.
곧 흙이 되신 주님으로 인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모두 다투지 않고 흐르는 위대한 강의 강물이 되었기에 이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겸손한 피조물들이 겸손히 겸손한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는 영원한 나라를 사도바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주님께서 겸손히 우리 앞에 사람이 되셔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끝내 흙이 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올해도 우리를 위해 흙이 되시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십니다. 강바닥의 흙이 되셔서 당신 위로 강물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강물 중에 어떤 자리에 서길 원하십니까? 강바닥에 가까운 곳을 흐르는 물? 아니면 제일 위에서 경치를 보면서 흐르는 물? 가급적 주님이 계신 곳 강바닥에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물이 되면 어떨까요?
그런 분이 많을수록 강물은 소리 없이 빨리 흐르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1947년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천체물리학자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 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락을 했는데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는데 강의를 취소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두 명 밖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 해 겨울 시카고는 유난히 추었는데도 그는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 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계속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흘러갔습니다.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이고 또 한 사람은 충도 이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첸드리스카 박사의 겸손이 두 명의 노벨 수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과학계의 위대한 강물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흙이 되신 주님께 가까이 간 사람들은 어떤 인물이 될까요? 주님의 마음을 품은 위대한 인물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올 한 해도 겸손의 사람이 되어서 위대한 하나님의 2018년이라는 역사의 강물을 이루어 천천히 흘러 가십시다.
나와 다른 생각과 은사를 가진 분을 더 낫게 여기십시다. 그 분들을 위한 흙이 되십시다. 온 인류를 위해 흙이 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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