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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심령의 제사” 시편 51:1-19 (02/11/2018)

 

미 원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그리고 백인과 원주민의 아픔과 문제를 잘 이해했던 오히에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때 원주민들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버지는 수용소로 끌려 갔지만 극적으로 도망쳐 나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백인 사회에 들어가 공부하며 의사가 되고 미 대통령들의 자문관이 됩니다. 두 문화를 잘 아는 그는 ‘교회로 간 인디언’이란 책을 펴내 백인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위해 경건한 자세로 조용히 명상에 잠깁니다. 아이의 수용적인 영혼 속에 모든 창조물이 한 가족이라는 생각과 위대한 신비의 사랑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 내용을 요약하면…, 임신한 어머니는 아는 사람 중에 아이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인물을 고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의 훌륭한 행위와 용감한 위업들에 대한 것들을 마음속으로 되새긴다고 합니다. 더욱 생생하게 담아두기 위해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요하고 거대한 숲이나 인적 없는 대초원을 산책합니다. 태어날 아이의 마음속에 영웅들의 어머니의 영혼이 담겨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드디어 그녀의 가장 중요한 날이 밝아오면 홀로 기적을 맞이하러 나섭니다. 모든 자연이 “이건 사랑이야, 사랑! 생명의 완성!”하고 북돋아주는 곳을 찾아 홀로 출산의 시련을 맞이합니다. 잠시 후 그녀는 위대한 창조의 노래 속에서 자신의 분신을 무사히 출산했다는 기쁨에 젖어듭니다.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 날입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에야가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분명합니다. 백인 사회 내지 서구사회가 갖고 있는 힘을 너무도 잘 알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원주민들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아마도 원주민들은 깜짝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말입니다. 그러면서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는 교회가 왜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아마 원주민들은 사순절을 생각하면서 희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여인들이 임신했을 때 한 위대한 인물을 생각하듯 한 인물을 사모하면서 교인들이 사순절을 보낸다면 수 많은 인물들이 새로이 태어날 것을 희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물이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물론 죄를 지은 다윗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는 이 시에는 다윗의 위대한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자기의 사랑하는 부하를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하고는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죄를 범했습니다. 곧 살인과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고, 다윗은 곧 회개합니다. 그리고 지은 시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통해서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생각하며 다윗을 본받아 새로워지는 축복을 여러분 모두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의 죄를 인정함에서 시작됩니다. 하찮은 것 같지만 이것이 다윗을 다윗 되게 만든 그의 위대함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데 있습니다. 아담과 비교하면 다윗의 위대함을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찾아오셔서 묻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곧바로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벗었다는 것만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 때 겨우 아담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고백을 하지만 끝까지 핑계를 댑니다. 여자에게 죄를 돌립니다. 궁극적으로는 누구에게 돌리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이것이 아담의 모습입니다.

 

사실 다윗도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왜 대낮에 여인이 목욕을 합니까? 게다가 이 당시는 왕이라면 못 할게 없는 때가 아닙니까? 기왕 임신이 되었으면 차라리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죽이는 것이 장군을 위해서 좋고 장군의 부인을 위해서 좋고 결국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냐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백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의 모습은 아담 보다 더 비참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아담은 처음 만들어질 때 죄중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은 어머니의 죄중에서 잉태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인생 첫 시작부터 죄와 뗄레야 뗄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이상으로서 알수 있는 것은 죄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아담의 길, 다윗의 길. 먼저 아담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는 우리를 거짓말을 만드는 기계로 만들어 갑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 씨나리오작가가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준 여자로 인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라도 기가 막힌 씨나리오를 만들어 나갈 태세입니다.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이 모습이 가인에게서 꽃이 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이 시작한 씨나리오를 가인이 멋지게 마무리짓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가인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말하는 순간 그것이 그에게는 사실이 됩니다. 진실이 됩니다. 철저히 믿게 됩니다. 전에 살인한 것을 잊어 버립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그래서 Josef Pieper라는 철학자는 이를 ‘falsification of memory’. ‘기억의 거짓화’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 안에는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falsification of memory.’(기억의 거짓화.)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든 거짓 기억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아담과 가인이 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안에 깊게 숨겨져 있는 이 죄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억의 거짓화.’ 고백되어지지 않은 죄들이 쌓여질 때 우리의 기억은 거짓으로 새롭게 꾸며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이런 놀라운 재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받은 후 바쁘게 살던 삶에서 멈추어서서 자신을 성찰했습니다. 다윗은 기억의 거짓화에 올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간음을 하였는데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씨나리오를 작성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멀리 나가 있는 우리아 장군을 포상의 뜻으로 휴가를 줍니다. 자신의 간음을 숨기려고…. 그런데 우리아 장군은 “자기의 부하들이 싸우고 있는데 어찌 자기만 편하게 지내리오.”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씨나리오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더 씨나리오는 악해집니다. 우리아 장군을 최전방에 보냅니다. 다윗은 스스로 이와 같은 씨나리오를 만들어 가고 있는 자신의 깊은 죄성을 발견합니다. 아파합니다. 통회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눈물과 통곡으로 이 고백을 했을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아는 다윗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St. Teresa of Lisieux가 지은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두 아들 모두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무서워 멀리 도망 갔습니다. 두번째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의 품에 던집니다.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더 잘 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끝으로 부탁합니다. 벌을 주되 키스로 벌을 줘 달라고…. 아버지는 기쁘게 아들에게 키스합니다.

 

다윗은 두번째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입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어느덧 삶의 축제가 찾아 옵니다. 이 삶의 축제는 새로운 경지로 발전이 됩니다. 13-15절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죄의 도구가 되어서 아끼던 부하 장군도 죽이고 간음했던 삶에서 이제는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갑니다. 아울러 최고의 찬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죄를 가만히 놓아 두면 우리는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반면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면 다윗처럼 최고의 찬양인이 되어 갑니다. 죄의 고백은 최고의 제사입니다. 결국 다윗이 있는 곳은 바로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절들이 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사실 그동안 수많은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왕이니 원할 때는 어느 때든지 최고의 제사를 드리고 또 드렸었습니다. 소 양 비둘기 그 어떤 것도 최고의 것으로 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왕이니 드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제사를 드릴수 있었고 드릴 물건도 언제나 풍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사도 자꾸 형식적이고 지루한 느낌을 갖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죄로 인해서 심히 괴로워 하는데 어느 순간 고통 중에 하나님의 키쓰를 느낍니다. 최고의 희생제물을 수없이 드릴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축복입니다. 이에 그는 확신 가운데 고백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 없이 드리는 제사는 참 제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고 가는 세대에 상한 심령의 제사가 모든 제사의 시작임을 알리는 첫 예언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사실 이 고백은 모세가 세운 제사제도를 뒤흔드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켰는데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그 선언과는 비교도 안 되는 shocking한 고백입니다.

참 제사는 본인 스스로 죄를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로 인하여 괴로워 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가 거룩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소유한 자들만이 참 제사를 드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만이 다음의 고백을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이 고백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고백이 아닙니다. 민족을 위한 고백이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고백입니다. 곧 상한 심령의 소유자는 어느덧 온 인류를 위한 고백을 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한 마디로 그가 있는 곳은 이웃을 위한 축복이 흘러내립니다. 곧 성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위대하게 된 것은 다윗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실로 하나님께서 위대해서 입니다. 죄로 인해 통회하는 자들로 하여금 온 세상에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편 이웃을 위해 축복이 흘러나리려면 누가 제일 먼저 그 복을 누리게 될까요? 자기 자신이 아닙니까? 다윗은 그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다윗은 끝으로 고백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그는 모세의 제사를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의 제사와 함께 모세의 제사를 드릴 때 위대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주 말씀을 준비하면서 카톨릭 신학자가 쓴 참회에 대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고해 성사에 대해서 재미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고해 성사를 아주 중요시 여깁니다. 반면 종교개혁과 더불어 우리가 직접 주님께 죄를 고백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믿기에 고해 성사는 개신교에서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처음에는 물론 고해성사를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고해 성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루터교 예식 중 하나로 넣었다고 합니다.

한편 유명한 개신교 저술가인 C.S. Lewis도 고해 성사가 자신의 영성에 너무 소중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다시 카톨릭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성공회 신부에게 정기적으로 고백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1. S. Lewis가 세기적인 기독교 저술가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자서 참회의 기도를 했을줄 압니다. 한편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 겸손히 고백의 시간을 갖곤 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금번 사순절 기간 우리가 지은 죄가 기억의 거짓화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깊게 깨달으십시다. 도리어 죄로 인해서 상한 심령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리십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바꾸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오히에라씨가 언젠가 원주민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나누었다고 합니다. 경청한 후 어느 나이 많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법은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따르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창조주에게서 비롯된다고 믿었으므로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지요. 햇살이나 비처럼 음식도 땅도 주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백인들이에요. 그런데도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떠들어댑니다! 백인들은 그들 아버지의 품성을 하나도 안 물려받고, 그들의 형제인 그리스도가 보여준 본보기도 따르지 않는 것 같아요.”

잠시 후 한 나이가 더 많은 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예수가 인디언이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도,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도 반대했어요. 또 평화를 사랑했고, 우리 인디언들이 그렇듯 계산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대가없이 사랑을 전했지요. 그런데 백인문명의 근본은 이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디언들이 상식처럼 지키는 이 간단한 원칙들을 백인들은 따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 따름입니다.”

 

이 원주민들의 음성은 다윗을 책망한 나단의 음성이 아닐까요?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 앞에서 이들의 음성을 나단의 음성으로 듣고 참회의 시간을 가지십시다. 각자의 방법으로 고해성사의 시간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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