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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요한복음 8:1-11 (03/25/2018)

Terracycle이라는 뉴져지에 위치한 회사가 있습니다. 2001년에 창립된 회사인데 요즘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는 회사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recycle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보통 리싸이클 가능한 것을 모으는 회사가 아니고 unrecyclable 한 것들을 긁어 모으는 회사입니다. 대표적으로 plastic 포장지와 기저귀 특히 담배 꽁초등을 리싸이클하는 회사입니다. 현재 200개의 리싸이클 항목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모여서 시작하였고 2004년에는 7만7천불의 매출이었는데 2017년에는 2천만불이 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급격히 자라고 있습니다. 담배꽁초는 6년전부터 리싸이클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9천만개의 꽁초를 리싸이클했다고 합니다.

 

Is your city participating

스크린을 보시면 담배꽁초가 담겨진 것을 수집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보시면 도시 한복판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미 전역에 27개 도시에 설치가 되어 있는데 보스톤도 그 중 한 도시입니다.
한편 담배꽁초의 필터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것을 공원의 벤치로 만들어서 보내진다고 합니다.
Custom Inlay Benches _TheBenchFactory
물론 다른 리싸이클도 많이 있지만 담배 꽁초를 리싸이클한다는 것이 신기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사실 Terracycle이 리싸이클 전문회사로 소문이 나자 담배 회사들이 찾아 와서 함께 리싸이클하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한 것입니다. 6개월만에 공원의 벤치들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많은 품목들을 손대기 시작합니다. 콘택트 렌즈, guitar 줄, 화장품, 칫솔, 치약튜브….
이 회사와 연결만 되면 리싸이클이 안 되는 게 없어 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버릴 쓰레기가 하나도 없게 될 것 같습니다. 곧 쓰레기들의 전성시대가 돌아 오는 것 같습니다. 한 회사 때문에…. 쓰레기들의 전성시대는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사람들을 위한 전성시대는 언제나 올까요? 아니 이미 도래했을까요? 도래했다면 어떻게…?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때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합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주님은 당신을 시험함을 아셨는지 몸을 굽히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주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상상해 볼수는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생각하기를 아마 이 여인과 함께 간음한 남자의 이름을 썼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주 그럴싸 합니다. 하여튼 확실한 것은 후대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껏 상상하도록 여운을 남겨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남자의 이름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언급하는 율법은 레위기 20:10절 말씀인데, 레위기 말씀에는 간부와 음부 곧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여자만 데리고 와서 주님께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레위기 말씀을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보면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내지 적용하면서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같으면 당장에 욕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제가 무엇을 천천히 쓰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상의 날개를 필수 있는 여운을 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떤 예술가는 주님의 이 모습에서 예술가이신 주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가지고 예술과 종교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주님은 땅에 글을 쓰셨는데 어찌 보면 최초에 땅에 서예를 하신 분일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주님은 역정을 내지 않으시고 대신 어떤 작품을 땅에 그리십니다. 그런데 이를 군중은 참지 못합니다. 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그들은 주님의 입에서 ‘여인을 죽이라 아니면 죽이지 말라’ 둘 중에 하나를 빨리 듣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땅에 서예를 하시는 주님을 다구채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렇게 꼬뚜리를 잡고 저렇게 말씀하시면 또 저렇게 꼬뚜리를 잡으려고…. 어쩔수 없이 글을 쓰시던 주님은 멈추시고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군중은 당황합니다. 예상 밖의 말씀입니다. 죽이라든가 죽이지 말라든가 둘 중에 하나를 기대했는데 몹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땅에 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아까 쓰던 작품을 완성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무엇을 쓰셨던지 그리셨던지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예술가로서 남기신 유일한 작품이었습니다. 땅 위에…. 땅 위에 남기셨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곧 사라졌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땅 위에 남기셨다는 것은 앞으로 오고가는 모든 세대들 아니 이미 땅 위에 살았던 모든 세대들도 포함에서 곧 모든 인류를 위해서 남기신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작품을 남기셨을지 더욱 궁금해 집니다. 제일 먼저 이 작품을 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여인을 잡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이들을 위한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위한 작품이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죠? 다음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느끼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힌두교 탁발승과 유대교 랍비와 비평가가 우연히 같은 시간에 한 여인숙에 도착했습니다. 폭풍이 심하게 치는 밤이었는데 여인숙에는 빈방이 하나밖에 없고 침대도 두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헛간에서 자야만 했습니다.
힌두교 탁발승이 자신은 고행승이기 때문에 헛간에서 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헛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탁발승이 돌아와 방문을 두드리며 말합니다.
“내가 따르는 종교는 소를 숭배하기 때문에 소를 방해해선 안 됩니다. 헛간에 소가 있어서 나는 그곳에서 잘 수 없습니다.”
그러자 유대교 랍비가 “걱정하지 말고 당신은 이 방에서 편안히 주무시오. 내가 헛간에서 자겠소.” 라고 말하고 헛간으로 갔습니다. 잠시 랍비가 돌아와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헛간에 돼지가 있어서 나는 안 되겠소. 내 종교에서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기 때문에 돼지와 함께 자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비평가가 말했습니다.
“그럼 좋습니다. 내가 헛간으로 가서 자리다.”
몇 분 뒤 다시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여니 거기에 소와 돼지가 서 있었습니다. 비평가를 견딜수 없어서 소와 돼지가 헛간을 도망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비평가는 아마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소와 돼지도 피하고 싶은 바리새인들의 공세를 지금 주님께서 받고 계신 것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그러면 어떤 그림을 그리셨을까요? 소와 돼지도 싫어하는 이들에게….
나쁜 것을 쓰시거나 그리시지 않았을줄 압니다. 이유는 몸을 굽혀 무엇을 쓰신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민망스러운 표정을 하며 “우리가 졌다” 라는 표정을 하며 떠나는 모습을 보길 원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며 도리어 통쾌해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떠나는 사람들의 등을 보며 매서운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몸을 굽혀 무엇을 쓰시는 것은 돼지나 소도 싫어하는 이들을 향한 놀라운 애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을 남기셨을까요?

C.S. Lewis의 글에서 엿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피조물들을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단지 옛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함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을 길드려서 훨씬 잘 뛰는 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마치 말이 날개가 달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꽁초가 공원의 의자가 되듯이, 몸을 해치는 담배꽁초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벤치가 되게 하듯이,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꿈을 안고 땅위에 멋진 작품을 그리지 않으셨을까요? 지금은 돼지나 소도 싫어하는 존재들이지만 언젠가 이들이 날개가 달린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 돼지나 소까지도 사랑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꿈을 안고 그리시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비록 땅위에 남기시는 당신의 글은 그림은 곧 사라지지만 당신이 갖고 계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계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온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앞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셨다고 생각하면….

한편 주님께서 땅 위에 위대한 작품을 남기시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요? 9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는 표현을 보아 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금방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자리를 떠나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로 얼마 전에 다른 여인과 간음했던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떠나고 점차 양심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진 사람들은 그 양심의 울림에 맞추어서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군중이 서 있던 자리에는 놓고 간 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돌들 한 가운데 여인이 홀로 서 있습니다.
여인은 돌이 쥐어져 있지 않은 주님의 손을 봅니다. 그 손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아니 그리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나 아직도 마음을 놓을수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그 손이 주위에 널려져 있는 돌을 들을수가 있으니까…. 이런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인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이 죄인이 됩니다. 주님이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셨습니다. 레위기 20:10절 말씀 봉독해 드립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요 명령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군중으로 하여금 돌을 놓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죄 없는 자가 없었으니 아무도 돌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딱 한 사람 죄 없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 당신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돌로 쳐야만 하셨습니다. 주님은 끝내 율법을 위반합니다.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께서는 돌을 들으실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율법을 대신 어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 하나로 인해 댓가를 치루게 된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고백을 통해서 주님은 여인의 죄의 댓가만을 치루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죄의 댓가도 치루시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의 죄의 댓가를 치루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므로 모든 인류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온 인류를 대표해서 주님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 말씀을 하셨기에 그동안 그리셨던 그림들이 글들이 유효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그림을 그리셨더라도 이 말씀이 없으셨더라면 그야말로 모래 위에 그린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금방 사라지는…. 그러나 이 말씀을 하셨기에 여인과 바리새인과 우리 모두는 새로와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리신 그림은 결코 모래 위에 그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리신 그대로 모든 것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이 말씀을 하셨기에 오늘 예루살렘성에 나귀 타시고 입성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군중들은 잠시 후 마음은 바뀌지만 성경의 예언대로 주님을 환호하며 맞이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끝내 제자들에게 버림 당하시고 제사장들에게 붙잡히시며 빌라도와 로마군병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한편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끝까지 외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전에 땅에다가 멋지게 쓰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하늘에다 멋지게 쓰고 계신 것입니다. 최고의 작품을 땅에 남기셨던 주님께서 최고의 작품을 하늘에 남기시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에 이 작품을 남기신 이유는 땅에서 하늘의 높은 꿈을 안고 살았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입니다. 도리어 쓰레기 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의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이 더 잘 뛰는 말이 되게 하는게 아니라 날개가 달린 피조물이 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드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은 여인이 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이번 고난주간을 두려움을 안고 주님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십시다. 바리새인이든 그 누구든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영원한 새로운 세계 속으로 초청하는 초대장이 주어진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말씀을 거둡니다.
초대교회에 Perpetua라는 성인이 있습니다. 한번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봅니다. 사다리를 타고 혼자 오르는데 아주 사다리가 높습니다. 하늘로 치솟은 사다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오를 수 있도록 좁고, 좌우로 철창과 단도, 못, 쇠고리가 달려 있어 조금만 기울고 방심하면 살이 쇠창살에 찍히도록 아슬아슬하고, 발 밑에는 무지막지한 용이 올라올듯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다리 위만 보고 절대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됩니다. 큰 일납니다. 떨어져 죽게 됩니다.
이 환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사다리를 완벽하게 타고 오르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떨어지면 온 인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험한 여정이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끌고 왔을 때도 아차 하는 순간 떨어질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몸을 굽히십니다.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을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멋진 글을 아니 작품을 땅 위에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에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는 여인의 두려움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완벽하게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 갑니다. 아울러 주님을 닮은 예술가가 되어 갑니다. 이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날개를 달아드리십시다.

교우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 주님은 정죄자였던 우리들의 마음판에 귀한 작품을 남기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도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예술가가 되어 가십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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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349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1-10 (02/18/2024) webmaster 2024.02.19
348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서 1:17-2:10 (02/11/2024) webmaster 2024.02.13
347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1:11-16 (02/04/2024) webmaster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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