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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으로 향한 길” 누가복음 2:1-7 (12/23/2018)

 

지난 달에 주일학교에서 교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겨자씨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이 카드와 bookmark 그리고 쁘로찌를 만들었었는데 저도 카드와 bookmark를 받았다고 얼마전 주일 설교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받은 카드를 소개해드립니다. 아주 인상 깊은 카드입니다. 위에는 공룡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래는 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이 아이의 설명을 듣고 해설을 써 놓은 것 같습니다. 위 공룡 그림 옆에는,

“공룡이예요. 도망가고 있어요.”

그리고 제 그림 옆에는,

“목사님이 공룡을 잡으러 가세요.”

 

저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카드를 보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어린이는 공룡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공룡은 무서움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그것까진 좋은데 어린이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공룡을 잡을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카드를 받을수 있었는데 더 이상 공룡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한편 이번 성탄 주일 설교를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카드는 저에게 귀한 멧세지를 던져주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래 전 이 지구에 살던 공룡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공룡이 지금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데 이 21세기의 공룡을 잡을수 있느냐?’ 라는 멧세지로 들렸습니다.

제가 과연 21세기의 공룡을 잡을수 있을까요? 잡는다면 어떻게…? 1, 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그 때에’로 말씀이 시작되는데 한 마디로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가 되었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가이사가 영을 내려 모든 사람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때 아이를 출산하는 가정은 정말로 운이 나쁜 가정입니다. 이 운이 나쁜 가정 중 하나가 바로…, 4, 5절 말씀입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가이사의 영을 받은 후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기들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했습니다. 정말로 온 세계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온 인류를 구원할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그렇게 말했다가는 미쳤다고 소리를 듣겠죠. 하여튼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묵묵히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무거운 몸을 끌고 내려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이번에 성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유튜브로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짧은 비디오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animation곧 만화로 그린 영화였는데 제목이 눈에 강하게 들어 왔습니다.

‘The Adventure.’

보통 ‘모험’ 하면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영화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제목을 보고 무릅을 쳤습니다. “맞다. 모험이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기껏해야 나귀를 타고 갔을텐데 이는 모험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마음에는 확신은 있었을줄 압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것이라고 했으니 무사히 낳게 될 것은 확신했을줄 압니다. 그러나 실상 가이사의 명을 받았는데 그 때 나타났던 천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쩔수 없이 모험을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험이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스릴 만점인 모험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저보고 영화 제목을 붙이라면 이렇게 붙이고 싶습니다. 모험은 모험인데 한 가지 형용사를 붙이고 싶습니다.

‘The shameful adventure’(부끄러운 모험)

왜 부끄럽냐구요? 한 마디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통치자의 명령으로 인해서 베들레헴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모험이지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한 죄인의 명령으로 인해서 자기가 부모가 사는 나사렛을 떠나 멀리 험한 여정을 갈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를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으로 감수합니다.

한편 부끄러운 모험만이라면 다행입니다. 더 심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제 한 가지 형용사가 더 붙습니다. ‘miserable’ (비천한). 곧 ‘The shameful and miserable adventure’(부끄럽고 비천한 모험)이 된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모습은 비천한 모습의 절정이 아닐까요?

요즘 호텔을 5성호텔이 좋은 호텔이라고 하는데 듣기로는 7성 호텔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굿간을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별이 몇개일까요? 마이나스 7성 호텔쯤 되지 않을까요? 베들레헴으로 향한 여행은 마이너스 7성 호텔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곧 그들의 여행은 비천했습니다. 여관에 들어갈수가 없어서 마이나스 7성 호텔인 마굿간에 묵게 된 것입니다

이에 지치고 지친 요셉과 마리아는 인간인지라 한동안 많은 원망도 했을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하셨어야만 했냐고…. 아마도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셨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9:6, 7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마지막 귀절이 특별히 눈에 띄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말씀은 부끄럽고 비천한 여행을 마친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험한 모험을 마친 사람들만이 누릴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 모험을 마친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해 바로 연약한 아기의 모습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보게 됩니다. 곧 말구유에 뉘인 아기가 바로 가이사 보다도 위대한 왕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향한 길은 축복의 길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 왔기에 말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의 눈과 곤충의 눈에 비친 꽃의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곤충은 빛의 파장을 보는 범위가 우리보다 넓어 자외선의 영역도 볼 수 있는데, 색소가 자외선에서는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비와 벌은 빨강색은 보지 못하며, 노랑은 흰색으로, 흰색은 파란색으로, 녹색과 주황은 노란색으로 본다고 합니다.

 

사람과 곤충이 색깔을 보는 눈이 다른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다르지 않을까요?

분명히 다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기예수를 보는 눈입니다.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이 있고 안 믿는 자들로 나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한 길은 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계속 부끄럽고 비천한 여행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기 예수는 처음에는 연약한 아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눈에는 그냥 연약한 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가 될 만큼 강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 세상에서 강한 자입니까? 강한 자로 보이는 자일까요? 약한 자가 될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가 아닙니까?

사실 이 세상의 어느 왕이 가장 가난한 자로 태어나겠습니까? 아무도 그럴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놓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 권세를 놓을수 없습니다. 세상 권세가 자신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계속 권세를 키워가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어느덧 권세에 중독이 되어 버립니다. 가이사도 이미 세상 권세에 중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세를 더 굳건히 하려고 온 세상에 호적을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가이사는 어느덧 공룡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세상 권세 보다 더 높으신 분이기에 도리어 세상 권세자들의 명령을 받는 가정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공룡의 권세에 중독이 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한 자가 될수 있는만큼 강한 자이십니다. 그는 공룡을 두려워 하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도리어 연약한 자가 되어서 세상 권세가 아니 공룡이 미치지 못하는 놀라운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권세는 중독자를 만들어 내지만 연약한 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세상이 세상 권세 넘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실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것도 말구유에….  

 

처음에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공룡을 잡을수 있겠냐고? 정답은 당연히 잡을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베들레헴으로 향한다면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예수로 향하고 있다면…. 아기 예수는 세상 공룡들이 근접할수 없는 세계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한편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를 태어나게 하기 위한 길은 부끄럽고 비천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만나러 가는 길도 부끄럽고 비천하고 험난한 길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 길 마지막에 연약한 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아기는 공룡보다 더 무서운 존재도 당신을 닮은 자로 바꾸게 하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공룡은 힘에 중독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반면 아기 예수는 정반대입니다. 부끄럽고 비천한 자리에 처할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이십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 아기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구유에 누으신 아기를 뵈었습니다. 올해도 그 아기를 만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비한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세상 공룡들이 지배하지 못하는 축복의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한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요? 마약을 먹은 것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연약함 가운데 도리어 하나님의 강함이 임하고 있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왜 연약함 가운데 놓아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함 가운데 놓아 두실수 있으실 정도로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약함은 바로 하나님의 강함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말구유에 누우신 연약한 아기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자들은 바로 각자의 약함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에 우리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약함은 우리들의 가난함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증거입니다. 이를 고백하는 자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늘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연약함은 언젠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덧입히게 될 것입니다. 말구유의 아기 예수가 이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잘 아시다시피 설교 마지막에는 늘 설교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나 이미지로 끝을 맺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를 더 돗보이게 하는 이야기나 이미지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 세상 어느 이야기나 이미지로도 설명할수 없는 위대한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떠 올랐습니다.

 

세상 공룡들은 말합니다.

“I am not strong enough. I am not rich enough either.” 그래서 더욱 커지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 누우셔서 말씀하십니다.

“I am not weak enough. I am not poor enough either.”

그래서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서 나오신 후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성탄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 아침 아기 예수의 음성이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I am not weak enough. I am not poor enough.”

사실 이 아침 만왕의 왕 되신 주님은 더 가난해지기 위해서 당신의 살을 나눠주셨습니다. 더 약해지기 위해서 당신의 피를 나눠 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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