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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에 선 모세” 신명기 34:1-8 (12/30/2018)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한 군인이 전사했습니다. 그 군인에게는 가족이 없었기에 친구가 성당 바로 뒤편에 있는 묘지에 가서 신부에게 그곳에 군인을 묻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는 군인이 천주교 신자인지 물었습니다. 친구는 개신교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울타리 밖에 묻으라고 합니다. 어쩔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친구는 무덤을 다시 찾았습니다. 울타리 밖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당에 가 보니 다행히도 당시 신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부에게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타리 밖에 당신의 친구를 묻으라고 말하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울타리를 밖으로 옮겨 당신의 친구가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도록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모세의 죽음과 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어려운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중 한 질문이 어떻게 모세가 그렇게 훌륭하게 살았는데 한 번 잘 못 한 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수 없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모세는 광야에서 물을 달라는 백성들의 불평에 못 이겨 화를 내는 바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 밖 곧 모압 땅에 묻힙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설명을 해 드립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화를 내면서 돌을 친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의 잘 못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라고 또 되묻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습니다.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만일 방금 소개해 드린 예화를 알고 있었더라면 이 예화로 그 분의 굳은 마음을 녹일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도 후에 울타리를 넓혀서 그 군인을 자기들의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하나님도 울타리를 넓혀서 가나안에 묻히게 하시지 않았을까 라고 대답하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래도 이렇게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서 들어가야지 죽어서 들어간들 무슨 소용입니까?”

 

맞습니다. 사실 모세도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 가고 싶었습니다. “죽어 들어간들 무슨 소용입니까?”라는 말에 강하게 “아멘” 할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모세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가고 싶었던지 신명기에만 해도 세 차례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야기를 합니다. 1:3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3: 26절 말씀,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32: 49, 50절 말씀입니다.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처럼 모세는 세 차례나 신명기에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을 기록합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모세는 머리로는 이해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러 차례 간청한 것입니다.

“단 한번의 실수로…?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오늘 송년주일로 지킵니다. 느보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와 이제 한 해를 보내는 우리들과는 좀 비슷한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세는 이해가 안 되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광야 40년의 마지막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풀수 없는 아픔을 안고…. 한편으로는 미련을 갖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해가 안 되는 수수께끼를 안고 한 해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우리는 남은 한 해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이제 모세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지 않을까요? 1절 말씀을 보면,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느보산에 오르기 전까지 모세는 몇 차례 하나님께 졸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매섭게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제 모든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해 주시면…’이라는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느보산에 오른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길르앗 온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귀한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아무나 길르앗 온 땅을 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련을 버린 자들만이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보 산에서 길르앗 땅만 보여주실까요? 길르앗 땅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있는 땅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물론 이 땅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 땅만 보여주시려고 느보산에 오르게 하셨을까요? 2, 3절 말씀입니다.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재미 있는 것은 아직 가나안 땅은 납달리 에브라함 므낫세 지파들이 땅을 분배 받지 못한 때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 및 유다 지파들의 땅을 보고 있는 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미래의 가나안 땅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 “그만해도 족하니…”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모세에게 주신 축복을 주실줄 압니다. 두 가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는 느보산에 오르는 축복입니다. 이는 광야의 생활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토록 힘들던 광야를 뒤로 하게 됩니다. 광야 18에서 벗어난 다는 것입니다. 광야 18은 2018년도의 광야를 의미합니다.

아울러 우리들 눈 앞에도 가나안 19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가나안 19은 2019년도의 축복의 땅을 의미합니다. 오늘 송년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앞에는 멋진 가나안 19이 보일 것입니다. 광야 18은 사라지고….

그런데 확실한 것은 가나안 땅이 보이는 축복만 보장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보는 축복만 받았습니다. 누리는 축복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는 가나안 19은 누가 누리게 될까요?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누가 건너가지 못하냐 하면 40년간 광야의 삶을 살았던 모세입니다. 모세는 보긴 보아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오늘 송년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광야 18을 살았던 우리는 가나안 19를 보기만 하고 누리지 못 할까요? 5, 6절 말씀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는 느보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본 후 하나님 품에 안깁니다. 산꼭대기에서 죽지만 그의 시체는 어느 골짜기에 묻힙니다. 그런데 어디가 무덤인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 밖에 묻혔는데 그 무덤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왜 신명기 기자가 기록했을까요?

첫번째 소개한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모세는 이방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결국 신부가 울타리를 넓혀서 군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도 울타리를 넓히신다는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울타리를 넓혀서 모세의 무덤도 가나안 땅에 포함시키시지 않으실까요? 곧 모세의 광야 40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 꽃 피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 말씀디린 어느 교우분의 질문이 다시 생각납니다. “살아서 들어가야지 죽어서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세의 삶과 오늘 송년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삶에 비슷한 점도 있지만 큰 차이도 하나 있습니다. 모세는 “그만해도 족하니…” 말씀을 들으며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후손들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느보산 18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서 있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가나안 19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좀 억지인데요…!”

그런데 이것은 제 생각만이 아니라 주석가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지 용서의 하나님께서 모세를 한 번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못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바로,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모세는 예수님처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한 양이 되어서 가나안 밖에서 죽을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을 모세의 삶과 똑같이 비교할수 없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셨던 것입니다. 느보산은 곧 갈보리 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보산에서 죽는 모세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모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광야 18을 뒤로하고 가나안 19를 차지할 권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모세의 여러 아픈 경험들이 후에 가나안에서 꽃이 피어서 후손들이 그 축복을 누렸지만 우리들의 광야 18의 아픈 이야기들이 가나안 19에서 아름답게 피어날 것인데 이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느보산에 서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할지 좀 더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듣는 것입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이웃에 대한 원망과 미련을 버릴 때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그런데 원망을 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원망을 버린다고 해서 쉽게 버려집니까? 오뚜기처럼 또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것이 원망 아닙니까? 원망을 버리는 최고의 길은 그 빈 자리에 대신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렸던 바이올린 제작자 마틴 슈레스케의 글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17세기에 제작된 멋진 아마티(Amati) 바이올린을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나는 그 바이올린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했습니다.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악기였습니다. 나는 그 바이올린에 매료되었지요. 하지만 완벽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린이었습니다. 형태가 대칭을 이루지 않았고, 바이올린의 덮개에는 어두운 마디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 바이올린의 개성을 이루었고,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그 바이올린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흠이 없지는 않군, 하지만 뭔가가 있어.””

우리의 광야 18도 매한가지가 아닐까요? 흠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뭔가가 있습니다.

 

사실 지난 일년간 우리 모두 겨자씨를 뿌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온전히 뿌리지는 못했습니다. 흠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우리를 늘 괴롭혔습니다. 고난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겨자씨는 뿌려졌습니다. 뭔가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겨자씨를 뿌리면서 겪은 많은 어려움과 상처들도 흠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흠으로 인해 우리는 도리어 독특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악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들의 광야 2018은 아름다운 악기가 되어서 2019년도에 멋진 음악을 펼쳐가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느보산 2018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곳에서 광야 2018을 보시렵니까? 가나안 2019를 보시렵니까? 광야 2018을 보시면서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과 후회의 줄을 붙들고 있으렵니까?

주님께 순종하며 그 줄을 놓으십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원망의 줄 미련의 줄을 놓으십시다. 쉽게 버려집니까? 오뚜기처럼 또 살아 나고 또 살아 나는 것이 원망과 미련이 아닙니까? 이를 버리는 최고의 길은 그 빈 자리에 대신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가나안 2019를 바라 보십시다. 우리가 가나안 2019를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모든 삶의 자취는 아름다운 악기가 됩니다. 이 악기들은 이미 가나안 2019에 내려가 있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연주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원망과 미련을 버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악기인데 우리가 연주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광야 18로 인해서 감사하십시다. 작년도 한 해에 주어진 여러가지 경험들로 인해는 우리는 더 멋진 악기가 되었습니다. 이 악기는 가나안 19이라는 연주장에 꼭 맞는 악기입니다.

그리고 이 연주장은 우리가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연주하냐에 따라 변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연주에 따라 더 아름답고 멋지게 그 때 그 때마다 변모할 것입니다. 이 때 광야 18의 어두웠던 삶도 밝게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연주하시렵니까?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 아니 느보산에서 온 인류의 죄를 안고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연주를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고의 연주를 하십시다. 우리들에게만 주어지는 가나안 19에서…. 모세도 밟아 보지 못한 땅에서….

우리가 기쁨의 연주를 할 때 막혔던 길이 열리고 골짜기는 돋아나며 온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참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미국 대통령이자 건축가였던 Thomas Jefferson이 세운 학교가 University of Virginia입니다. 건물들 한 가운데 큰 잔듸밭을 만들었는데 제퍼슨 대통령은 이 잔듸밭은 자유와 훈육(discipline)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The Lawn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 한번 가 봤었는데 The Lawn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고 가서 아마도 넓은 잔듸밭이구나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모세의 눈 앞에 넓은 가나안이라는 The Lawn이 펼쳐졌듯이 우리들에게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가나안 2019.

함께 들어가 각자에게 주어진 악기를 가지고 멋지게 연주하십니다. 가나안 2019를 향해 신나게 뛰어 내려가십시다. 광야 2018을 느보산에 남겨두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리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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