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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천 명을 남기리니…” 열왕기상 19:1-18 (01/27/2019)

 

언젠가 말씀드린 줄로 아는데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제일 좋아 하지 않은 과목이 역사와 미술이었습니다. 요즘은 시간 날 때 책도 그렇지만 유튜브로도 제일 관심 있게 보는 분야가 역사와 미술입니다.

가만 뒤돌아 보니 환갑이 지난 후 더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60을 환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한번 잘 살았다는 뜻인줄 압니다. 60이 넘으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인데 저는 두 번째 인생에서 비로서 역사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젊은 교우분들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60이 넘으면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미국의 건국 이야기에 대한 일화를 먼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실은 한 두 번 소개해 드렸던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죽음 직전에도 이웃을 위해 심장을 양보했던 하형록 목사님이 당신의 책에서 미국의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표현하고 있음을 읽어 보았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희생의 이야기다. 초기 미국 역사를 주도한 사람들에게는 미국 시민들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들은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벤쟈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존 행콕 등 56명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들의 신념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56명 중 5명은 영국인들에게 붙잡혀 죽기 전까지 고문을 받았다. 12명의 집은 수색을 당하고 불태워졌다. 2명은 아들을 잃었다. 1명은 두 아들이 포로로 잡혔다. 9명은 싸우다 전쟁의 상처와 고통으로 죽었다.

버지니아주의 부유한 농장주이자 무역상이었던 카터 Braxton의 배는 영국 해군에 의해 침몰했다. 그는 집과 재산을 팔아 빚을 갚았고 가난 가운데 죽음을 맞았다.  

John Hart는 아내가 죽어 갈 때 끌려갔다. 13명이나 되는 자녀들은 평생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농지와 공장은 파괴되었다. 그가 겨우 탈출해서 1년 넘게 숲과 동굴에서 살다 돌아 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몇 주 뒤 탈진해서 죽었다. 미합중국은 이러한 엄청난 희생 위에서 탄생했다.”

 

아마도 하 목사님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마음 속 깊이 자신의 희생이 오늘의 미국에 공헌하고 있다는 겸손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어 보면 그는 심장을 양보하는 희생을 치렀고 아울러 회사 운영할 때도 이웃 회사를 위해 희생하면서 운영하고 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곧 옛 로마제국 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큰 나라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거대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까지는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 마디로 기가 죽습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 위에 덕을 보기 위해 미국에 왔고 미국에서 희생 없이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이야기이지만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도 꽤 있으실줄 압니다. 어떻게 보면 범생들이라고 할까요…?

얼마 전 시민권을 받는 이민자들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보았는데, 거의 모두 다 미국에 온 이유는 본국에는 자유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자유와 기회의 나라인 미국에 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곧 남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나라에 주어진 자유와 기회를 누리러 왔다는 것입니다. 비판적인 눈으로 본다면 본국이야 어떻게 되던 본인과 가정만을 위해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본국으로 돈을 보내면서 본국을 위하여 여러모로 수고하실줄 압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모두 범생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용감한 사람들만 살아야 하는 곳일까요? 우리와 같은 범생은 아무런 공헌할 것은 없고 남들이 세워 놓은 곳에서 악세사리가 되어서 살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크게 희생한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야는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자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치룬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들어 가기 전에 그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이었는지를 본문 말씀 전의 배경 이야기를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왔을 때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합니다. 사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게 하라고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1대 850.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자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결과는 잘 아시는대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제사는 받으시고 바알 선지자들의 제사는 받지 않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곧 엘리야는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고, 가뭄을 멈추게 한 후 혼자서 아합왕 마차 앞에서 단거리 마라톤을 하여 성내까지 들어 갑니다. 천하에 이런 영웅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영웅은 다음으로는 어떤 일을 했을까요? 이제 부터 오늘 본문 말씀 이야기로 들어 갑니다.

 

아합왕이 엘리야의 이야기를 왕비 이세벨에게 합니다. 놀랍게도 이세벨은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엘리야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용감했던 엘리야가 겁을 먹고 36개 도망을 칩니다.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는 혼자서 광야로 향하여 하룻길을 도망쳐 갑니다. 마침 로뎀 나무가 보여서 그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넉두리 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던 용감한 엘리야와는 무척 대조적입니다. 그 용감한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한 여인에 쫓겨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나왔습니다. 로뎀 나무에 앉아 넉두리하다가 잠이 든 것입니다. 이에 천사가 어루만저 깨우며 먹을 것을 줍니다. 먹자마자 다시 눕습니다.

천사가 두번째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주면서 일어나 사십일을 걸어 호렙산으로 가라고 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엘리야는 사십일을 걸어 호렙산에 갔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이번에는 한 굴을 찾아 들어 갔습니다. 굴 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절 말씀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은근히 자랑합니다. 자기만 하나님께 유별나게 열심이다고 말합니다. 자기처럼 용감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범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가막히다는 듯이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단지 굴 밖에 나가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강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 후 지진이 납니다. 그 후 산불이 납니다. 그러나 바람과 지진과 산불 가운데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궁금해 집니다. “아니 나에게 고작 이 세 가지를 보여주시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셨나…?”

그런데 시끄럽고 요란한 것들이 다 지난 간 후 세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굴 밖에 나가 섰습니다. 이 때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전처럼 똑 같이 답변합니다. 아마 조금 전에 아무 답변이 없으셔서 반복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속하게도 그의 용맹에 단 한 마디의 칭찬도 하시지 않으십니다. 대신 마지막 일감을 주십니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후임자로 엘리사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은퇴하라는 것입니다. 은퇴하기 전에 두 왕들을 세우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후임자를 임명케 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좀 아리송했을줄 압니다. “이를 위해 40일 씩 걸어서 오게 하셨나…? 이 정도면 로뎀 나무 아래서 천사가 나타났을 때 말씀하셨어도 충분했을텐데…. 고작 은퇴하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호렙산 굴속까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뼈가 있는 한 말씀을 하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는 이 말씀을 들으며 쇼크를 받았을줄 압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마지막 남은 남은 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 하소연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7천명의 남은 자들이 아직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깨닫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기와 같은 용감하고 위대한 선지자들로 이어온 것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7천명에 의해서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맞추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아마 이때 엘리야는 또한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그동안 바람과 지진과 산불이 되어서 용감하게 선지자의 삶을 살아 왔지만, 정작 역사의 주인공들은 자기 눈에는 범생으로 보이는 7천명은 외로운 곳에서 홀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지내 왔던 것이 아닐까…?

범생 7천명은 눈에 띄지 않은 각자의 굴속에 갇혀 있었지만 각자의 굴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광야의 길을 걷는 자들이었습니다. 때로는 40일을 주야로…. 그러나 아무에게도 보여지지 않는 자기 만의 광야의 길을….

이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져 갈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로뎀나무에서 깨워서 호렙산 굴까지 오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은퇴를 하는 엘리야에게 이 놀라운 깨달음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미국 독립선언문에 싸인한 56명은 강한 바람이요 지진이요 산불과 같은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미국이 세계 최대의 선교국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이유는 범생 7천명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들은 비겁하게 어려운 모국을 등지고 이미 용감한 사람들이 세워 놓은 미국에 후에 도착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개척자들처럼 용감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광야의 길을 갔고 끝내 굴 속에서 바알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절하는 자들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시지 않으실까요?

 

9/11 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은 사실 잘 아실줄 압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이 때 많은 경찰관들과 소방대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소방대원들….

어떤 분들이 희생을 당하셨나 인종별로 찾아 보았습니다. 대개가 백인, 다음으로 흑인 그리고 히스패닉…. 아시안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twin tower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시안들은 꽤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것이 우리들의 현주소구나 느껴 봤습니다. 지금도 변화는 거의 없을줄 압니다. 조금은 나아졌겠죠. 나아졌길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지난번 올랜도 세미나에 갔는데 한 교우님댁을 방문했습니다. 아드님이 소방관이라고 말씀하셔서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른 인종들처럼 용감하지 못합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 잘 할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호렙산 굴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얼마전 새해를 맞이했는데 세배를 받으신 분도 꽤 계실줄 압니다. 특히 손주가 있으신 분들은…. 세배를 받게 되면 손주의 어느 부분이 보입니까?

등, 등이 보입니다.

 

7천명의 범생들이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각자의 등을 매일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는 할수 있지 않습니까?

 

이운진 시인은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신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때 인간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보이지 않고 등을 보여. 난 언제나 그 모습이 숙연하게 느껴져. 기도라는 것보다 기도의 자세가 내겐 더 기도처럼 느껴지는 거야. 얼굴로 말하지 않고 둥글게 깊이 굽힌 등으로 하늘에 말을 하는듯 하거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등을 보여 줌으로써 내 마음의 진실을 읽어 달라는 것 같아. 그래서 시인도 신이 등을 만들었다고 한 걸까. 신이 사람의 진심을 읽어 낼 곳으로 등을 만들었다고 말이야.”

 

사실 등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통찰력있는 글입니다.

얼마전 오랫만에 어느 교우님이 나오셨는데 저를 보더니 항상 얼굴에 웃음을 활짝 띠고 있어서 좋다고 하시더라구요. 글쎄 오랫 만에 나오신 분이라 더 활짝 웃음을 선사해드렸을지도 모릅니다만…. 우리들의 얼굴은 우리가 만들수가 있습니다. 화장도 할수 있구요. 웃음도 만들수 있구요. 그런데 우리들의 몸에서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는데 바로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범생들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등을 보시니…. 우리들의 인생의 모든 아픔이 담겨 있는 등을….

 

그러니 인류 역사는 용감한 자들을 통해 펼쳐질수 없습니다. 범생들로 인하여 펼쳐집니다. 그들의 등을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 등을 보여 드리는 자들이 바로 역사를 이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두 왕을 세우고 엘리사를 후임자로 세우게 하신 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이스라엘에 7천 명을 남기리니….”

이 7천명의 범생들로 인해서 엘리사가 또한 엘리사가 되어 간 것입니다.

 

신년 예배에 금년도 표어를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깃발.’ 이는 용감한 자들을 위한 표어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각자의 굴 속에서 각자의 등을 하나님께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 등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등만 보셔도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입에서 이웃과 전 세계를 위한 기도의 제목이 올라 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시지 않으실까요? 이처럼 제사장된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시고 삶에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범생들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그의 흑인의 인권을 위한 투쟁은 곧 모든 정의와 평화를 상징하는 운동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암살을 당하였고 스스로 언젠가 암살 당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Rosa Parks라는 여인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고 여러가지 고통을 치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많은 범생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등을 보였던 연약한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요? 역사 속에 전혀 밝혀지지 않은 범생들 말입니다.

이처럼 칠천명의 범생들로 인해 오늘의 인류 역사는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이 칠천 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웅을 보내십니다. 이 들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대신에 엘리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 해 칠천 명의 범생들 중 한 사람이 되어서 제사장의 역할을 다 하십시다. 우리들의 상처투성이인 등을 하나님께 보이십시다. 엎드린채 입으로는 이웃을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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