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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3-27 (05/12/2019)

 

조선시대에 유명한 유교학자 이율곡에 대해서 한국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익히 아실줄 압니다. 이율곡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어머니이신 신사임당 덕분이라고 많이들 알고 계실줄 압니다.

어느 책 표지에 보니 신사임당을 이처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천재화가, 훌륭한 어머니.’ 사임당의 그림 솜씨를 본 아버지는 사임당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천재화가가 되어 갑니다. 한편 신사임당은 어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가 부모님께 극진히 효도하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효행이 남달랐는데 왕이 열녀문까지 세워 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부모님의 효행을 보고 자란 사임당은 자매 다섯뿐이었는데 곧 오빠나 남동생이 없었는데 딸로서 자기가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에게 배운 효를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밤이면 신사임당은 자녀들에게 ‘시경’에 나오는 효에 관한 시를 자주 읊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교육을 받았기에 그의 자녀 중에 이율곡이 태어납니다.

한편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이 1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때 어머니의 어머니 곧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는데 어머니 대신 90세가 넘도록 사신 회할머니에게 효를 다하며 지냅니다.

그러다가 율곡은 33세에 외조좌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출셋길이 열려 있는 좋은 벼슬이었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병으로 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사표를 던지고 강릉으로 향합니다.

이 일로 왕의 신하들에게 파직을 권고당했으나 자세한 사정을 들은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파직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율곡은 이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효는 모든 행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반대로 불효는 가장 큰 죄이다. 외조모가 병중이신데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율곡의 효가 어디서 왔다구요? 천재화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배운 것입니다. 이율곡을 이율곡이 되게 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율곡의 아버지 곧 신사임당의 남편은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배운 여러 덕목들 특히 아름다운 효로 인해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효를 배우기 위해 신사임당의 삶을 살펴 봐야 할까요? 물론 도움이 될줄 압니다. 그러나 신사임당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범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효는 어떤 것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잘 아시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모습입니다. 사실 십자가에서 효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한번에 한 가지씩 풀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군인들은 주님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네 명의 군인이 하나씩 나눠 갖습니다. 그런데 속옷은 나눌수가 없으니 제비를 뽑아서 한 군인이 갖게 됩니다. 한편 이 장면을 누가 봅니까? 25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4명의 용감한 여인들이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서 있었습니다. 4명 모두 대단한 여인들입니다. 모두 친 자식이던가 친척이던가 아니면 주님을 극진히 모신 여인들입니다.

히브리 여인들이기에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제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보고 있었을까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것도 아들이 입었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심정은…?

 

저희 가정이 한 때 5남2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저에게는 세째 형이 중학교 때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하늘나라에 일찍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장례 예배는 물론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몇일후 무덤을 온 가족이 방문케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서 어머니도 함께 가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무덤 가까이 오시더니 늘 천천히 걸으시던 어머니께서 무덤을 향해 달려 가시더니 무덤에 엎어지십니다. 엎드린채 어떻게 보면 무덤을 껴 안고 한참 흐느껴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차마 장례예배는 참석을 하실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조금 기운을 차린 후 겨우 무덤에 찾아 가셔서 흐느껴 우실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가히 상상이 안 갑니다. 그 고통 가운데 처해 있는 아들의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은 상상키 어렵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 저희 어머니도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집을 뛰쳐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졸라대며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셨을줄 압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미 아들이 하늘나라에 갔으니 슬픈 장례예배에는 참석하실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오후 3시 곧 6시간 후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운명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6시간을 십자가 아래서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다음의 이야기가 그래도 마리아의 모습을 비슷하게 느끼게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제 나라 환공이 한 번은 황하 상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는데, 인근 주민들이 아주 귀엽게 생긴 잔나비 곧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다가 바쳤습니다. 그 원숭이 새끼를 배에 태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새끼 잃은 어미 원숭이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산을 넘고 벼랑을 가로질러서 강변을 타고 뒤따라 왔습니다.

환공이 그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새끼를 돌려주려고 강둑에 배를 대게 했더니, 그러자마자 어미 원숭이가 느닷없이 배에 뛰어들어 새끼를 부동켜안은 채 너무 기진한 나머지 그대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여러 토막으로 끊어져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도 끝까지 희망을 갖고 이처럼 따라 온 것이 아닐까요? 그러는 사이에 마리아의 창자도 다 끊어져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살펴보면, 마리아는 어느 날 아들이 종교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나쁜 짓은 평생 안 했으니 잘 해결되고 나올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한쪽으로는 불안했겠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드렸을줄 압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 나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사형 곧 십자가형이 선고되었고 이제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다른 세 여인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려갑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요한만 여인들 곁에 있습니다. 요한과 세 여인은 마리아를 위로하였을 것입니다. 괜찮을거라고…. 골고다에 가기 전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거라고….

마리아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 예수를 바라 봅니다. 그런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끝내 아들은 십자가에 아침 9시경 달립니다. 아직 생명은 있으니 계속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어느 때까지…? 주님께서 마지막 목숨이 달려 있을 때까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 있는데 익히 듣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음성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고통은 잠시 누구러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말 한 마디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마리아는 또 다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면 어머니의 창자는 더 찢어질 것을 예수님도 잘 아셨을텐데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십자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을까요? 어머니의 고통을 인정합니다. 어머니는 죄수의 어머니가 되어서 십자가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많은 주위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면서 손가락질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저 여자가 저 죄수의 어머니래….”

마리아는 죄수의 어머니, 곧 어머니로서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이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마리아의 가슴을 더 찢어집니다. 한편 이 고통을 주님께서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받으시는 마리아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온 세계를 위한 놀라운 구속 역사의 밑거름이 되기에 이런 고백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어머니의 고통이 한 아들을 위한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귀한 선물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 다음 주님의 말씀이 이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깁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셨을까요? 마리아를 모실 자녀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 3절 말씀을 보면 주님의 형제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의 형제가 네 명이 있었고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총 책임자가 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지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성 야고보가 어머니를 못 모시겠습니까?

곧 마리아를 모실 형제 자매가 넉넉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누구에게 맡긴다구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깁니다.

 

마리아의 예수님을 잃으면서 당한 고난은 단순히 마리아의 친 자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마리아의 창자가 끊어지는 고난은 바로 온 인류를 위한 고난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래서 도리어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새로운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하였습니다. 반면 아들의 고난을 바라 보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어머니의 고통은 죄사함 받은 사람들의 이 땅의 삶을 기름지게 하는 그래서 꼭 필요한 선물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은 마리아를 요한의 어머니로 삼게 하심을 통해서 이 세상의 어머니들의 고통은 단지 자기 자녀를 넘어 온 세계를 기름지게 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스톤에 예쁜 꽃들이 만발한데 꽃들이 만발하게 필수 있다는 것은 흙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영어로 Mother Earth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흙은 어떻게 보면 모성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흙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바위들이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깨어지고 찢어지기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흙으로 인해서 세상은 기름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구요.

어머니들의 애절한 고통은 바로 세상을 위한 흙을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래서 온 세상은 늘 기름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전에 어느 교우님께서 안 보이시기에 알아 봤더니 자녀분이 좀 힘들어 하셔서 자녀분 곁에 가서 함께 기도하며 힘을 주시기 위해 가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힘들어 하시는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 가신 것입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자녀분을 위한 귀한 축복의 흙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당신의 자녀뿐 아니라 이웃의 자녀들을 위한 흙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신 것입니다. 당신을 보면서 창자가 끊어진 고통은 바로 온 인류를 위한 선물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도 어머니들의 고통은 단지 키운 자녀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온 세계를 위한 선물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고백하신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러므로 모든 어머니는 위대한 분들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창자로 만들어진 흙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로 인해서 인류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백은 희망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읽은 ‘신사임당’을 소개하는 책의 저자가 당신 나름대로 오늘 신사임당이 살아서 효에 대한 교육을 한다면 다음 세 가지를 가르칠 것이라고 자신있게 소개합니다.

 

첫째, 부모님의 건강을 자주 체크하라.

제가 필라 연합교회를 부목사로 섬길 때 어느 교우분이 조기 대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일찍 받아 완쾌된 분이 계십니다. 어떻게 조기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자녀들이 건강진단을 받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둘째, 지금 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라.

저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저희 아버님께 저희 누님은 워싱톤 디시에 살았는데

매주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버님은 늘 주일 저녁이 되면 누님의 전화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반면 저는, 저 대신 집사람이 자주 편지를 재밌게 써서 보내곤 했습니다.

 

셋째, 부모님께 상의하고 부모님에게 조언을 구하라.

디지탈 시대에 살면서 부모님께 조언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대신 기도 제목을 나누면 어떨까 합니다. 그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효도가 아닐까요?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한 공생애를 사셨기에 이 모든 것을 하실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치루시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셨습니다. 아울러 온 세상 어머니를 축복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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