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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을 받은 자” 요한복음 9:1-10 (05/26/2019)

 

젊은 예비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새 수도원으로 들어 갔을 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선배 수도사들의 경전 필사를 보조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수도사들은 수 세기에 걸쳐 성경을 베껴서 써 오곤 했습니다. 한 세대가 원본 경전을 필사하면 그 다음 세대가 그 필사본을 베껴 적고, 또 그 다음 세대의 수도사들이 앞 세대의 필사본을 다시 베껴 적는 방식이었습니다. 원본과 각 세대의 필사본들을 보존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이 필사한 경전은 권위를 가지고 다른 수도원으로 전해져 신앙 생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경전 필사는 한 글자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필사자들을 도우며 두세 달을 보낸 젊은 수도사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단어 하나라도 잘못 베껴 적는다면 나중 세대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틀린 내용을 계속해서 필사할 것이 아닌가?

신성한 원본을 매번 꺼내 볼 수도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필사본의 진위를 누구도 대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은 채 후대로 전해진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수도사는 수도원장을 찾아가 자신의 의문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이 말했습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경전 필사를 해 온 전문가들이다. 우리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엄격한 독신 생활과 금욕을 실천하며 이 일을 해 온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리 없다. 하지만 그대의 의문도 완전히 틀린 생각이 아니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지금쯤 원본과 필사본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수도원장은 원본이 소장된 지하 보관소로 향했습니다. 수백년 동안 한 번도 출입하지 않은 문이었습니다.

오후가 되어도 수도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젊은 수도사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밀폐되어 있던 곳이라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서둘러 지하 계단을 내려가 원본 보관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희미한 조명 속에 수도원장이 벽에 머리를 찧으며 울고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늙은 수도사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원본에는 ‘Celebrate’ ‘즐겁게 살라’는 것이었어. ‘Celebate’ ‘독신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었어.”

 

‘R’ 하나의 차이로 Celebrate이 Celebate가 된 것입니다. 필사자가 ‘R’을 빼먹어서 결국 평생 즐겁게 살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 온 것을 깨닫고 수도원장은 흐느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power of R’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fiction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에 확 들어 오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일줄 압니다. 아니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 못 받아들이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삶을 ‘Celebrate’ 곧 축복으로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R’을 빼고 ‘Celebate’ 곧 스스로 얽어매고 있습니까? 곧 완전히 정 반대의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비슷해 보이지만 글자 ‘R’ 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을 아시는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R’을 빼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본문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R’을 빼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한 분을 빼어 놓고…. 주님은 글자 하나의 힘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묻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지금 ‘R’을 빼고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죄의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주님은 자기들과 전혀 다르게 보십니다. 주님은 celebrate 곧 ‘R’을 넣은 관점으로 보십니다. 곧 정반대로 보십니다. 주님은 맹인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쁘게 신나게 일하실 것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글자 하나 ‘R’의 차이입니다.

  그 답변을 듣고 어리벙벙해진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주님은 power of R을 소유하신 이유를 설명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세상의 빛이기에 이 파워를 소유하시고 계심을 은연중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계속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에게 더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이들 뇌리에 깊게 새겨지는 한 장면을 직접 연출 내지 연기하십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주님은 정말로 대 연출가이자 연기자이십니다. 주님은 보통은 말씀으로만 해도 다 고치시는데 몸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것도 부족한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주님은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맹인을 실로암 못에 보내십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여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그 해답은 바로 ‘실로암 못’이라는 이름에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자 요한은 실로암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러면 그냥 고치시지 왜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라는 못으로 보내실까요? 보냄을 받으신 이가 새로운 보냄을 받은 자를 만들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이는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사실 주님께서 맹인을 실로암으로 보내시고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걱정은 들지 않으셨을까요? 실로암으로 가라고 했는데 가지 않으면 어떡하나…? 그러면 눈에 진흙을 바른채로 다닐텐데…. 아니 실로암까지 가기 전에 아무데서나 가서 씻으면 어떡하나 걱정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주님의 마음을 다음 시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물론 한국의 다방 요즘은 카페라고 하지만 거기서 사람의 마음이 그려진 것 같습니다만. 하여튼 기다리는 자의 마음이 그려진 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이 시를 보자 마자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실로암으로 보내신 후 이런 마음을 가지시고 실로암에 먼저 와 계시지 않으실까요? 기다리시다가 주님은 맹인이 실로암에 도착했을 때 감격하여 “이 때다” 하고 그의 눈을 밝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로암이 어디일까요? 실로암은 물이 있는 곳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바로 주님께서 물과 피를 흘리신 갈보리 십자가가 아닐까요? 주님은 실로암 곧 십자가로 맹인을 보내셨습니다. 맹인이 실로암 못으로 가는 동안 먼저 실로암으로 가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 곳에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의 물은 바로 주님의 물과 피였던 것입니다. 그 물에 눈을 씻을 때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맹인을 실로암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한편 눈이 밝아진 순간 맹인은 주님이 실로암에 보내신 참 이유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말씀으로 충분히 고치실수 있으신 분이심을 그도 금방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눈이 밝아진 곳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그는 이제 두번째 인생을 시작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실로암에서부터…. 그의 두번째 고향은 실로암이 된 것입니다.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 그는 어느새 자신도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니 본인의 이름은 ‘실로암’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이름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보냄을 받은 자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맹인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실로암’, ‘보냄을 받은 자’. 왜? 실로암에 찾아 갔기 때문에, 십자가에 찾아 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맹인은 두 번의 보냄을 받는 경험을 합니다. 첫번째는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제 자신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됩니다. ‘보냄을 받은 자.’ 이 이름을 갖고 두 번째 보냄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냥 세상으로 보내실까요? 당연히 power of R을 선물로 주십니다. 큰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단지 글자 하나를 더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글자 하나가 세상을 바꿉니다. 이 글자가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니며 R을 곳곳에 뿌리는 삶을 삽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Celebration의 관점으로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실로암 이름은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두 번 보냄을 받습니다. 첫번째는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들의 실로암도 십자가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실로암에서 맹인을 기다리셨고 또 이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아니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이 실로암에 먼저 와 계셨습니다. 곧 주님이 우리들의 실로암입니다. 우리는 실로암 못에서 주님의 보혈로 진흙을 씻을 때 우리들의 눈은 뜨이게 됩니다.

결국 실로암은 우리들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두 번째 이름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첫번째 이름은 ‘죄인’, 두번째 이름은 ‘실로암’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실로암을 두번째 고향으로 삼은 자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어디로 보냄을 받게 될까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눈을 뜬 이 맹인은 실로암 다음으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오늘 본문 말씀 다음을 보면 맹인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로암의 이름을 소유한 맹인은 바리새인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주님을 하나님께서부터 오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곧 진정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 갑니다. 곧 세상을 거꾸러 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R을 넣는 자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삶을 celebate가 아니라 celebrate의 눈으로 보지 않았을까요?

세상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하면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거꾸러 보는 자가 바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자가 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 누가 개혁할수 있을까요? 세상에 R이 빠진 곳에 R을 넣는 자들이 아닐까요? R하나를 넣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보시고 세상을 새롭게 바꾸십니다.

 

저희 교회 건물이 커서 주말에는 이 근처 신학교 학생이 와서 청소를 도와 주곤 합니다. 곧 주말에 알바이트를 한다고나 할까요?

최근에 읽은 어느 책의 저자가 신학교 다닐 때 교회 청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혼자 하지 않고 친구와 둘이서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vacuum과 타일이 있는 floor를 왁스를 칠하며 광을 내게 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 친구는 business card를 갖고 다녔는데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합니다.

‘Pastor Joe- Minister to the Floors.’ 한국 말로는 ‘바닥 전문 사역자.’

친구는 주어진 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로 생각하고 아주 심각하게 정성스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광채가 나지 않았을까요? 바닥을 닦는 일이 그에게는 celebration이었습니다. 고역이 아니고….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실까요? 기회는 챤스다 하고 세상을 뒤집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실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는 아주 큰 교회의 staff으로서 바닥 청소 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Power of R은 우리들의 작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작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죄인으로 생각하며 살아 가지만 보냄을 받은 자들은 서로를 보냄을 받은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닥을 닦던 어떤 일을 하건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한편 모든 사람이 보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할 때 최고의 섬김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실로암의 축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실로암의 축제는 세상을 거꾸로 보는 자들의 축제인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세상은 아름다와 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새로와 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시 든든한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버린 맹인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니 보내신 것입니다. Power of R을 손에 쥐어진 채로….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손에 power of R이 주어져 있습니다. 필요한 곳으로 찾아 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저는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Murder, She Wrote’라는 TV show가 있습니다. 탐정극인데 범인의 행적을 본 후 늘 탐정은 이렇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It’s him again.”

같은 사람의 범행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가지고 어느 분이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항상 같은 표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It’s him again.”

하나님의 춤을 추신 흔적을 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냄을 받은 자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늘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춤춘 흔적이 매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It’s him again.”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있던 곳을 보면서 “It’s him again” 아니면 “It’s her again” 하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Floor가 광택이 나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It’s him again” 했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의 삶에서 하나님은 춤을 추시기 때문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있던 자리에는 특별한 축복의 흔적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왔다 간 자리를 보고 다음에 오시는 분이 “It’s him again”, “It’s her again” 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떠난 자리에는 항상 이런 말이 울려지게 하십시다.

“It’s him again,” “It’s her again.”

“오, 그 실로암 장로님이 왔다 가셨군.”

“오, 그 실로암 권사님이…, 그 실로암 집사님이…, 그 실로암 교우님이 왔다 가셨군.”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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