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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1-39 (06/16/2019)

 

인도계 2세인 한 작가가 다음과 같은 아프리카 속담으로 수필을 시작합니다.

“Until the lions have their own historians, the history of the hunt will always glorify the hunter.”

“사자들이 자기들 안에서 역사가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사냥의 역사는 언제나 사냥꾼들 중심으로 쓰여질수 밖에 없다.”

작가는 대학교 3학년에 가서야 그동안 자기가 배워 온 역사 이야기들은 모두 한쪽만의 이야기였음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곧 사냥꾼들의 입장에서 사냥 이야기를 쓴 것이 바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1846-1848년까지 있었던 Mexican American War을 배우면서, 이 세상 역사에 대한 눈을 뜹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서 미국은 Texas를 공식적으로 합병하고 California를 비롯한 New Mexico, Utah, Nevada, Arizona등 멕시코 땅의 1/3을 빼앗습니다.

곧 그 당시 Polk대통령과 국회가 손을 잡고 멕시코를 일방적으로 쳐들어 갔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는 불과 150년 전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저희 교우님들 중에 미국에 오신지 50년이 되신 분들도 계신줄 아는데, 그 분들이 미국에 오셨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그 분들이 오기 전100년전에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 덕분에 멕시코는 나쁜 나라 미국은 좋은 나라로 역사책에는 기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사 클래스를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멧세지를 받은 것입니다.

“Winners write history.”

 

아마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계속됩니다. 선거에서 이긴 사람들이 역사를 써 갑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그런데 150년이 지난 지금 한번 생각해 볼만 합니다. 멕시코 침략을 이끌었던 Polk대통령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Polk 대통령이 진정한 승리자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올해 저희 교회의 표어가 ‘여호와 닛시’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 깃발’인데 의역하면 ‘여호와 승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6월 세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1년의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반년 간 여호와 닛시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셨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남은 반년 간 여호와 닛시를 더욱 많이 누리시게 되길 바랍니다.

이 시간 기억을 더듬어서 여호와 닛시라는 말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 다시 한번 연초에 나눴던 내용을 잠시 나눠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을 하던 중 놀라운 기적을 여러 번 체험합니다.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한편 물이 없을 때는 반석을 치니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기적을 매일 체험하는 이스라엘에 큰 시험이 닥쳐 왔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이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려고 쳐 들어 옵니다. 아말렉은 정착민들로서 여러 무기를 잘 갖춘 군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유목민이니 제대로 싸울줄 아는 군인들이 거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군대를 만들어 싸우게 합니다. 갑자기 만들어진 군대이니 실력은 보나마나입니다.

대신 모세는 싸우는 동안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집니다.

이에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간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놓고 두 사람이 이 쪽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립니다. 해가 지도록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으니 여호수아가 승리합니다. 승리한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정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신약의 ‘여호와 닛시’가 아닌가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고백 안에 모세의 외침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전쟁터에 내 보내고 산에 올라가면서 했던 생각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첫 귀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시고 계심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스라엘을 대적할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 간 것입니다. 곧 모세도 바울도 똑 같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위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습니다.

 

이처럼 본질적으로는 같은 확신을 갖고 있지만 그 확신이 생긴 경위는 좀 다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뵈온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꽃은 보이는데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있는 기이한 장면을 보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본 것입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광야의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의 그 떨기나무가 모세 자신이요, 이스라엘 민족임을 느낍니다. 떨기나무와 다름 없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반석에서 물을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역사를 피부로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신다는 확신이 더 해집니다.

한편 밤마다 불기둥이 이스라엘 민족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낮에는 구름기둥이…. 불기둥 구름기둥을 보면서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을 이길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모세가 경험한 기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런 확신을 갖게 된 이유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서 이런 승리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세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떨기나무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확신을 얻었다면 바울은 십자가에 죽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체험하고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아니 당신의 아들을 떨기나무처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내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필요한 것을 주셨고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전략일줄 압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략이 좋아도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군수물자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생필품입니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군인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전쟁에서 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생필품도 아낌없이 보급해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주셨는데 하물며 생필품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기나 생필품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신학적인 용어로는 ‘칭의’ 곧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자존감’이라고도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의로움과 자존감은 다른 뜻이지만…, ‘의롭다’함을 받는 순간 ‘자존감’이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으로 인한 ‘자존감’이 승리의 삶을 사는데는 생필품보다 더 소중할줄 압니다.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마음 속 깊이 죄의식이 남아 있다면 부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늘 무엇엔가 쫓기며 살수 밖에….

 

대학 친구의 수필집을 종종 읽고 있는데, ‘훌륭한 연구자의 조건’이라는 수필에서 200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세 학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특히 일본인 오사무 박사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오사무 박사는 어릴 때 원자탄으로 직접 피해는 모면했지만 방사능 낙진이 섞인 비에 흠뻑 젖어서 돌아 옵니다. 할머니가 목욕시키고 오염을 철저하게 제거하여 살아 납니다. 후에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는 부인과 자녀들까지 아버지의 연구를 뒷받침해 줍니다. 저자는 결론을 내리기를 가족들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릴 때 받은 어려움을 이기고 오사무 박사로 하여금 노벨상을 받게 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른 두 학자도 가족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해 자긍심이 생겼기에 그런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삶에서 성공하려면 이런 자긍심이 필요합니다. 반면 영적인 삶에서 승리하려면 의롭다 함을 입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인지라 한편으로는 늘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의 특징은 주님은 늘 우리들의 죄를 가려 주심을 믿습니다. 물론 회개를 할 때는 씻어 주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당신의 공력을 인정 받고 영광만을 누리고 계실까요? 사도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한 때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은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택한자들 곧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계십니다.

곧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으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보좌 우편에서 자기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구약에 정통한 학자로서 한 때는 모세가 세운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무척 그리워 했을줄 압니다. 어디에 어떻게 세웠겠나 무척 궁금하고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후로는 그 미련이 완전히 씻겨 내려 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보좌가 바로 여호와 닛시 제단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에 여호와 닛시를 제단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신께서 의롭게 하신 택하신 자들이 이 땅에서 각자의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게 하심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 기도하심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앞에 여호와 닛시 제단을 세웠기에 바울은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이 어디를 가던 바로 그곳이 여호와 닛시의 제단임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좌 앞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여호와 닛시의 제단이 있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는 주님의 은총을 덧입고 우리가 세운 여호와 닛시의 제단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우는 삶의 현장을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35-37절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은 하늘 보좌에 세우신 주님의 제단을 바라 보면서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손수 자기의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 삶의 현장에는 바로 환난과 곤고 박해 기근 적신과 위험과 칼이 늘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늘 여호와 닛시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는 넉넉히 이겼던 것입니다.

 

독을 많이 갖고 있는 동물을 생각하면 살모사 등이 생각나실줄 압니다. 살모사뿐 아니라 그와 정 반대로 개구리들 중에 독을 많이 갖고 있는 개구리가 있습니다. Poison dart frog이라고 불리웁니다.

성장한 싸이즈가 1.5cm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게는 1온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개구리가 10사람을 죽일수 있는 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양도 아주 예쁩니다. 어쩌면 독사보다 더 무서운 동물일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1.5cm…. 너무 작아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10명을 죽일수 있는 독을 품고 있습니다.

처음 이 개구리를 봤을 때는 재미로 갖고 놀았을줄 압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런데 노는 아이들마다 죽어 갑니다. 이제 이 개구리들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개구리를 잡는대로 죽였을까요?

이 개구리의 이름을 Poison Dart Frog(독 화살 개구리)라고 지은 이유가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개구리가 독이 많으니 개구리를 잡아서 독을 채취해서 화살 끝에 발라 사냥하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곧 이 개구리에게 물리면 위험하지만 원주민들은 이 개구리 없이는 사냥을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개구리의 싸이즈가 1.5cm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쓸모 없어 보입니다. 잡아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개구리 한 마리로 많은 동물들을 사냥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주민들을 위하여 이 위험한 개구리를 만들어 놓으신게 아닐까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는 이런 개구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여호와 닛시를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넉넉히 이긴다는게 뭡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들이 우리를 위하여 이웃들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이런 모든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의 고백입니다. 38, 39절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바울은 그동안 수많은 독 화살 개구리를 잡아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에 만난 어떤 개구리보다 더 독할지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확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여호와 닛시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깃발을 세울 때 어떤 세상의 독도 우리를 위한 약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드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Carol Merritt이라는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에 갔는데 앞이 캄캄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교인들은 줄고 있는 미국 교회 현상을 피부로 느끼면서 힘들어 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7세였습니다.

마침 작은 교회를 위한 세미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강사님의 첫 마디가 그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You are enough.”

먼저는 27세 목회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을 향한 말로 들었습니다. 아울러 자기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나이 많은 교우들을 향한 말로 들렸습니다. 또한 시들어져 가는 메인 라인 교회 곧 PCUSA나 UMC, Anglican 교단을 향한 말로 들렸습니다.

그 후 3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멋진 교회로 발전케 됩니다. 사실 대형 교회에 다니면서 세대간의 교류를 그리워 하는 교우들이 하나 둘 돌아 오면서 참 교회 다운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교회나 3세대 교회가 되어 갈까요?

 

“You are enough”의 멧세지가 들려지는 교회이기에 3세대 교회가 되어가지 않았을까요? 3세대 교회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중요합니다.

“You are the winner.”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세대간에 함께 외칩니다.

“You are enough to win.”

우리는 함께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the winner.”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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