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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이기에…” 마가복음 4: 35-41 (09/08/2019)

 

인도의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 이야기입니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식민지 인도 출신인 학생 간디를 아니꼽게 여기던 피터스 교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식당에서 피터스 교수 옆자리에 점심을 먹으러 앉았습니다.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합니다.

“이보게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같이 식사하는 일은 없다네.” 간디가 재치 있게 응답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겠습니다.” 교수는 자기를 새라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간디는 교수님이 돼지라고 말을 바꾼 것입니다.

복수심에 약이 오른 교수는 다음 시험 때에 간디를 애먹이려고 했으나 간디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자 간디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길을 걷다 돈자루와 지혜가 든 자루를 발견했다네. 자네라면 어떤 자루를 택하겠나?” 간디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돈자루죠.” 교수가 혀를 차면서 “쯪쯪, 만일 나라면 돈이 아니라 지혜를 택했을 것이네.” 간디가 간단히 대꾸했습니다.

“뭐, 각자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거의 히스테리의 상태에 빠진 교수는 간디의 시험지에 ‘멍청이’라고 써서 돌려주었습니다. 간디가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 시험지에는 점수는 없고 교수님 서명만 있는데요.”

 

fiction인지 non-fiction인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꽃이 피고야마는 간디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간디의 지혜는 어떻게 이처럼 꽃 필수가 있었을까요? 간디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간디는 이처럼 공부할 때도 꽃 피었지만 인도를 위한 삶을 살면서 더 활짝 꽃피게 됩니다.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 앞에서 아니 제국주의라는 폭풍 속에서 꽃이 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학교를 다니던 사회생활을 하던 가사일을 돌보던 언제나 꽃이 피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우리들의 삶이 언제 어디서나 꽃이 필수 있을까요?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이유는 훈련을 시켜 주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훈련 과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 하루 하루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특수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오늘 말씀이 ‘그 날’로 시작을 하는데 바로 그 날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어떤 일을 하셨기에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실까요? 4: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주님은 바닷가에서 배에 타시고 무리는 육지에 앉게 한채 가르치셨습니다. 곧 하루 종일 가르치신 것입니다. 가르치신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 전 34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하루 종일 가르치신 후 육지로 가시면 또 무리들이 쫓아 올 것이 기정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사실 밤에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넌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요즘 처럼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갈릴리 바다의 특징 중 하나는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큰 광풍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후회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이미 폭풍이 몰아치는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이 배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어도 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원망하며 주님께서 깨실 것을 기다립니다. 물은 점점 차 오릅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젊잖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주님을 깨우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곧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미련한 선택을 하셨냐고 속으로는 울화통이 터집니다. 상황이 급한 것도 모르는채 주님은 태연하게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람을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님의 한 마디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집니다. 바람이 잔잔해 짐과 더불어 제자들의 울화통도 잠잠해집니다. 모두 한편으로는 놀랐을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잠시지만 몹시 원망했던 모습을 숨기려고 애쓰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많은 기적을 보아 왔습니다.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만지시니 고쳐졌습니다. 죽은 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기도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런 기적을 믿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능력의 주님이 연약한 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아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이런 능력자로서 기적을 베푸실 것은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을 철썩 같이 믿고 주님을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한 가지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없는 믿음이 이제 밝혀졌습니다. 그 없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바다를 건너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1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은 서로 고백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다 아는줄 알았습니다. 이제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본 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주님 그 이상의 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의 경험과 짧은 머리로 알수 없는 분이심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적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려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할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려고…? 물론 당신은 자연 세계도 주장하고 계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6장에 보면 처음으로 12제자를 둘씩 둘씩 세상 가운데로 보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4, 5장은 훈련과정이 소개되어졌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훈련을 마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곧 주님께서 폭풍 속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제자들에게 세상은 언제 폭풍이 올지 모르는 갈릴리 바다와 같은 곳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제자들은 둘씩 둘씩 주님께서 보내실 때 처음에는 황당했을줄 압니다.

“아니 아직 우리는 너무 연약한데 병도 고칠 능력도 없고…. 주님께서 병 고치시는 능력을 주신다고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러나 이 때 제자들은 생각이 났을줄 압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은 결코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시려고 바다를 건너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배 고물에서 쿨쿨 철없이 주무시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어린아이 보다 더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편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혜로운 제자들이라면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사람이 제일 방어력이 없을 때가 언제입니까? 잘 때 아닙니까? 주님은 폭풍이 올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실도 아셨지만 주무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는 행위가 아닐까요? 폭풍 앞에서 가장 약한 모습이 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Andy Crouch라는 BU신학대학을 졸업하신 분이 ‘Strong and Weak’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간결하지만 깊은 내용이 담겨진 책입니다.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원래 세상은 ‘strong or weak’이라는 원칙으로 운영됩니다. 곧 강자가 되지 못하면 약자가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것까진 좋은데 실제로는 강자가 약자를 늘 잡아 먹는 것이 세상 원칙입니다. 그래서 늘 세상은 강자를 좋아 하고 찾게 되고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strong or weak.’ 그러나 하나님의 세상은 strong and weak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꽃피는 자들은 강하면서도 약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곧 자연 세계를 볼까요? 얼마전 오랫만에 Millennium Park에 산책을 갔었습니다. Brookline에 살 때는 자주 갔었는데 요즘 저희 동네에는 근처에 가까운 산이 있어서 거의 Millennium Park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들꽃들이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곳에 있던 씨앗이 몰려와서 다른 들꽃으로 꽉 채워진 공원의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공원을 꽉채운 들꽃들을 보면서 강한 힘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꽃 하나 하나를 보면 weakness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손으로 꺾으면 언제나 꺾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강하지만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강하지만 약하기에 번성할수 있었습니다. 꽃의 강한 번식력만 소유하고 약한 모습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번성할수 있었을까요? 강한 번식력은 약함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공원을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strong and strong’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번성할수가 없습니다. Strong and weakness가 공존할 때 우리는 번성할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번성할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꽃 필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챤들은 strong and weak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strong한 면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identity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손에 든 말씀이 바로 우리들의 strength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인간으로 살 때 weakness를 늘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처하는 weakness안에서 우리들의 strength는 꽃이 핍니다. 사실 주님께서 배 위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주무시고 계셨지만 폭풍을 통해서 당신의 strength가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들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배 안에서 주무심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들어 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평생 삶의 연약함 가운데서 꽃을 피운 사람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며 기독교계에 큰 자취를 남긴 John Wesley가 있습니다. 목사님 가정에 태어났는데 7명의 딸과 3명의 아들이 있는 대가족이었습니다. 어느날 집에 불이 났습니다. 모두 불을 피해 집을 나왔는데 다섯 살난 John Wesley만 나오지 못했습니다. 2층 창문에 몸을 나타냈습니다.

아버지는 기도를 드렸는데 동네 사람들이 몸으로 사다리를 만들어서 John을 구출해 냈습니다. 어머니는 John을 품에 안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불 속에서 살아난 용감한 인물이 되게 하실 것을….

그 후 정말로 John은 불속에서 살아난 자 답게 세계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킵니다. 아마 9형제 자매가 있었지만 불 속에서 살아났기에 그 누구보다도 큰 인물이 되어 갔을줄 압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약함을 뼈져리게 어릴 때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이 인간의 연약함과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의 삶은 놀라운 꽃을 피게 된 것입니다.

 

오늘 진급주일로 지킵니다. 자녀들이 한 학년씩 올라가는 주일입니다. 다시금 수고하시는 여러분들께 이 시간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이번 한 해에도 많은 분들의 수고로 저희 자녀들이 아름답게 성장할줄 압니다. 믿고 바라기는 간디처럼 아니 웨스리처럼 앞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꽃피는 자녀들이 될 것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세상은 ‘strong and strong’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 피어야 할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오래 전 있다가 없어진 공룡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strong and weak’를 가르칩니다. 이 때 들의 꽃처럼 언제나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번성케 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음악인들이 많은데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줄 압니다.

“Practice makes it perfect.”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은 교수님들이 연습 많이 하게 할려고 만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완전해 질수가 없습니다. 물론 strong 해 질줄 압니다. 저는 음악과는 거리가 멀지만 훌륭한 음악인들은 strong and strong을 가르치기 보다는 strong and weak을 가르치시는 분들일줄 압니다.

저도 설교 준비할 때 저나름대로는 많이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도 perfect하다고 생각하고 강단에 서는적은 없습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올라서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연약합니다.”

저의 연약함의 고백에 따라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을까요?

 

제자들이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을 때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주님은 속으로 답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풍파 속에 연약한 자로 서 있는 자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도 놀라게 될 것이다.”

주님의 약함은 폭풍 속에서 꽃피게 된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준비하신 훈련과정 중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됨을 늘 기억하십시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음을 감사하십시다. 세상 폭풍 앞에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연약한 우리를 말씀의 권위에 맡기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꽃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타신 배에 함께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세상 폭풍 앞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가운데 살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날을수가 없으면 뛰고, 뛸수가 없으면 걷고, 걸을수가 없으면 기어 가십시요. 무엇을 하시던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요.”

If you can’t fly then run, if you can’t run then walk, if you can’t walk then crawl, but whatever you do you have to keep moving forward.”

강함과 약함이 잘 조화가 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산 그는 꽃을 피운 것입니다. 세상은 때로는 날지 못하게 합니다. 뛰지 못하게 합니다. 걷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는 자들은 항상 앞으로 전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꽃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는 말씀이 우리들의 강함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를 꽃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남은 한 해 ‘여호와 닛시’의 꽃을 피우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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