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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 시편 8:1-9 (09/15/2019)

 

어느 분이 타이어 전문점에 가서 앉아 기다리다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일하시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저, 실례합니다.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타이어 보면 어떤 생각 드시나요?”

“네?”

“그러니까, 타이어가 운전자랑 닮았다거나, 뭐 그런….”

“아, 그럼요. 전 타이어만 봐도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정말요?”

“네 타이어의 마모 상태에 따라 고객의 운전 습관이나 성향을 미루어 짐작하곤 해요.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rubber wheel이었다고 해요. 고무바퀴라는 뜻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타이어’라고 불러요. 왜일까요.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게 타이어라는 거죠.”

“아하, 재미있네요.”

“예, 그런데 운전하면서 자동차의 발에 해당하는 타이어를 참 피곤하게 만드는, 피곤한 운전자가 많아요. 운전에 ‘3급’이라는 게 있어요.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인데요. 이걸 밥 먹듯이 하는 운전자들은 성격이 삐딱하고 과격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이 끌고 온 차량을 살펴보면 아니아 다를까 타이어 상태가 엉망이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운전하시는 분은 한번쯤 생각해 보실줄 압니다. 내 차의 타이어는 어떨까…?

한편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이 세상에 언제나 자취를 남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타이어에 자취가 남듯이 우리들의 삶의 운전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어떤 자취가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취를 남기고 싶습니까? 아름다운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길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시편 기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1절 말씀을 통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고백하는 시편 기자가 3급 운전수가 될수 있을까요? 도리어 시편 기자는 얼마나 이 세상이 아름다운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놀라운 시적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인은 최고의 자취를 남겼으리라 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즐기는 자들은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시인과 같은 사람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절 말씀입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주의 대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혹은 젖먹이들이 등장합니다.

한 마디로 주의 대적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나쁜 자취를 남기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어린 아이 혹은 젖먹이들은 세상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젖먹이들 곧 세상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들로 세상을 파괴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은 어떤 자들이기에 이들을 통해 세상을 파괴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실까요?  3, 4절 말씀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기자는 자연 세계를 보면서 노래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반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겸손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목사님이 우주를 보면서 쓴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요즘 화성 탐사 등 바쁘게 NASA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는 우주는 감상하는 자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보면서 경외감에 차는 사람들이 바로 우주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지금 이 시인이 우주를 보면서 경외감에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놀라와서 경외감에 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창조를 누구를 위해서 하셨다고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시인 본인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처럼 작은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들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대적들은 어찌 보면 세상적으로 강하고 잘 되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잘난체 하면서 거칠게 운전합니다.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소유가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내 놓을 것이 없는 부족한 자기이지만 도리어 우주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립니다. 결국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런데 이처럼 이 세상을 나 자신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자들은 한 단계 더 놀라운 것을 깨닫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을 대표하는 한 분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시인은 자연 세계를 보면서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인은 자연 세계를 보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을까요?

 

사실 자연 세계가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자연 세계에는 놀라운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 아래 자연 세계는 돌아 가고 있습니다. 그 원칙이 무엇일까요?

바로 섬김의 원칙입니다.

 

태양은 지구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달도 지구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태양이 없다면…, 상상을 할수 없습니다. 달이 없으면, 얼마전 추석을 지냈는데 추석을 못 지키는 것뿐이 아닙니다. 바다에 밀물 썰물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바다가 제대로 역할을 할까요? 이외에도 동물 식물들 심지어 눈 비 모든 것이 서로 서로 섬기는 원칙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온 세계에 주님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고 고백하는데, 바로 그 이름은 섬김이라는 이름입니다.

 

시인이 자연세계가 아름답다고 노래하면서 감상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온 세계가 섬김의 원칙하에 아름답게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원칙으로 운영되고 있는 아름다운 세계는 바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면서 경외감에 젖어 있다가 문득 새로운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인들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것을 주실수 없습니다. 아니 온 세계에 당신의 이름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여 주실수 없습니다.

만일 보여주실수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갚아 주실 분이 있어야 합니다. 자연 세계가 섬김의 원칙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어떤 섬기는 자가 없이는 어떤 죄인도 자연 세계를 느낄수 없음을 깨달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곧 온 세계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만끽할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희생을 했기에 이 아름다움을 만끽할수 있었던 것을 소름끼치듯 깨달은 것입니다.

곧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야로 인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감상하고 있음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바로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심을 통해 위대한 섬김의 세계를 완성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이를 확증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섬김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는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실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신 것을 바라 봅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인은 십자가의 주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새로운 창의력을 가지고 다스리실 것을 봅니다. 아니 섬기고 계심을 봅니다. 곧 온 세상은 지금도 주님의 희생과 창의력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인은 주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눈에는 온 세상에는 주님의 희생과 창의력으로 가득차 있기에 한 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바로 어린 아이의 눈을 가졌기에 이 모든 것을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에 주님의 희생과 창의력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운전할까요?

희생과 창의력을 가지고 운전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시간에 희생적 사랑을 베풉니다. 소유보다는 놀라운 고백을 남깁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를 소유하였느냐가 하늘 나라에 남지 않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가가 남게 됩니다. 그래서 참 신자들은 좋은 날이든, 궂은 날이든 노래하는 자들입니다. 언제나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신임제직 임직예배로 드립니다. 조금 전 서약하신 내용 중 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서약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정성과 지성, 창의력과 사랑을 가지고 주의 백성을 섬기기로 서약합니까?”

‘창의력과 사랑을 가지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랑은 달리 보면 희생입니다. 곧 ‘창의력과 희생적 사랑을 가지고’라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를 충분히 해 낼수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님을 관 씌우신 것처럼 여러분을 관 씌우신 것입니다. 창의력과 사랑의 관을….

그러니 더욱 겸손하십시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창의력과 희생적 사랑의 삶을 사십시요. 창의력과 희생의 자취를 여러분이 계신 곳마다 남기십시오.

 

‘인생은 예술이다’라는 표현 익히 들으셨을줄 압니다. 인생은 우리들의 타이어가 만드는 예술 작품이 아닐까요?

우리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이 세상에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가면 우리의 타이어가 만든 작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의 노래는 완성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말씀을 거둡니다.

밀워키 어느 마을에 총기 사고가 많이 나는데 음악인들이 모여서 사고 난 곳마다 찾아 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the Black String Triage Ensemble 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하루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 연주를 합니다. 아니 11살의 어린 아이로부터 75세의 할아버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소유한 자들이 아닐까요? 이들의 모습에서 창의력과 희생적 사랑을 볼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 아이의 믿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시다. 이들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안에도 아름다운 세계가 숨어 있음을 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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