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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로마서 12:1, 2 (09/29/2019)

 

얼마전에 친구로부터 재밌는 카톡을 받아 보았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서 있는 한 사람을 보며 말합니다.

“사람일까, 허수아비일까?”

한 참새가 말합니다.

“허수아비일꺼야.”

“어떻게 알아?”

“스마트 폰을 보고 있지 않잖아!”

 

참새의 지혜가 엿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참새는 자기들 나름대로 인간의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을 늘 보는 동물.’

 

지난주 어느 날 집 근처 작은 산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 40미터 앞에 사슴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걸음을 멈추고 사슴을 계속 바라 보았습니다. 사슴도 저를 노려 봅니다.

저는 마음에 작정했습니다. 사슴이 움직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 사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2, 3분이 지난 후에야 사슴은 포기한채 숲으로 빠져 들어 갔습니다. 2, 3분 짧은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제 손에는 스마트 폰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또 한 손에는 스마트 폰을…. 스마트 폰을 들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주 전에 시편 8편 말씀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시편 8편 말씀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시작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마음 속에 더 되새기 위해서 스마트 폰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사슴과 인내의 싸움에서 쉽게 이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이 사슴도 사람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산에도 스마트 폰을 들고 다니는 동물.’

 

스마트 폰을 들고 있는 한 우리는 어떤 동물과도 인내의 싸움에서는 이깁니다. 시간을 마음껏 보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보내는 싸움에서는 이기지만 한편 소중한 것을 잃어가곤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바울 서신의 큰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는 교리를 가르친다고 보면 좋습니다. 전반부는 이처럼 구원론 아니면 교회론등 교리를 가르치고는 후반부는 항상 실천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어떻게 행해야 하느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11장까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가르치고 있고,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인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로 시작하는데 곧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냥 명령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냥 명령할수도 있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두고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삶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냥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실수도 있는데 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고 있는 것을 강조할까요?

사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십자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산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뇌리에 박힌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자비는 뗄래야 뗄수 없습니다. 곧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를 생각하면서 로마 교인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해 산 제물이 되었듯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본당 앞에는 예쁜 꽃이 놓여 있는 성찬테이블이 있습니다. 사실 예배학자들은 성찬대 위에 꽃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많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찬 테이블은 주님의 몸이 누어 계신 곳입니다. 성찬 테이블 위에 누워계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개신교에서는 어느새 꽃받침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누우셨다가 3일후 부활하신 모습까지 생각하기 위해 꽃으로 장식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원래는 주님께서 누우신 모습을 기념하는 상입니다. 곧 주님께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일 예배 시 성찬대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해 산 제물이 되셔서 성찬대에 누워 계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울러 주님처럼 우리 각자도 지난 일주일 산 제물이 되었었는가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 참으로 영적 예배가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본당에 들어 오시면 기도하시기 전에 성찬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누워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도 누워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 때 삶의 영적 예배는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찬대를 보면서 영적 예배를 시작한 우리들의 일주일은 세상에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요? 2절 말씀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거룩한 산 제물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느냐’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까요?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변화를 받아….”

당연히 그럴수밖에….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변화는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뜻합니다. 주님을 닮아가면 갈수록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닮아갈 생각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것은 점쟁이에게 가서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변화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변화를 받으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첫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 폰을 손에 들고 있는데 그 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일까요?

스크린은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진은 크리스챤 투데이라는 기독교 잡지에 실린 사진입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도 information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 안에서 절규하고 있는 교인의 모습을 그린 사진입니다.

이 글을 쓴 저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Formation vs. Information’ (변화 : 정보)

한 마디로 아무리 정보를 많이 얻어도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보 과다 시대이고 정보를 머리에 채우면 변화가 된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하면 생각나는 회사는 google일줄 압니다. 정보가 google을 부자 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화를 시키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많은 경우 information축적으로 끝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콤퓨터가 발단된 때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정보는 많이 쌓이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니 도리어 비판력만이 날로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생긴 심각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디지탈 시대에 자라난 청년들 곧 millennial들의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얼마전 들은 것으로는 3%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 나오는 청년들은 정말로 귀한 분들입니다.

Alan Noble이라는 학자는 가장 큰 이유를 정보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보의 홍수가 formation(변화)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정보 시대의 현상에 대해 Poldrack이라는 스탠포드 신경과학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표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TV를 보면 1석2조인 것 같지만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정보가 축적되는 것 같은데, 실은 정보가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고 다른 창고, 예를 들어 기술이 축적되는 곳에 정보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정보를 꺼내려면 꺼낼수가 없습니다. 정보가 가야 할 곳에 찾아 봐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TV를 보지 않고 공부하면 정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에 담겨지기에 후에 쉽게 빼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는 결코 1석2조가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요즘도 유튜브로 설교를 듣는다고 하지만 한쪽으로는 TV를 보고 듣습니다. 아니면 다른 집안 일을 하면서 듣습니다. 설교는 당연히 information으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제 자리에 담겨지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요즘 이런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얻은 information이 formation을 이룰수 있을까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요즘 이멜 홍수 가운데 살고 있는데 이멜의 특징은 모든 이멜이 상대적으로 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편지 시대에는 편지만 받으면 아주 소중하게 읽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소중한 이멜도 수많은 이멜 중에 하나가 되어서 모두 무게가 없어졌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서 인정치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절대적 권위를 인정치 않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잃어갑니다. 물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한낱 유튜브에 나오는 정보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탈 IT화가 되어야 할까요? 스마트폰도 버리고 온갖 문명의 이기를 저버려야 할까요? 이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일까요?

 

언젠가 제가 토요 아침 기도회 때 반복의 중요성을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나누면서 교수이신 교우님이 최근에 교육학계에도 반복을 중요시 여긴다고 하면서 5R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번 설교 준비하면서 정보왕 구글박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5 R에 대해서…, 그런데 여러 분야마다 각기 5 R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어느 교육 싸이트에는 Reuse, Retain, Revise, Remix, Redistribute. 하여튼 ‘다시 다시 다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함을 볼수 있었습니다.

 

삶은 새로운 것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반복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C. S. Lewis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We need to be reminded more than instructed.”

 

자녀들에게 잔소리하면 다 야단을 맞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들은 다 아는 것 또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정보시대에 사는 우리 자녀들은 더 심합니다. 한 가지 정보를 더 얻어야 하는데 왜 또 다 아는 것을 말하냐는 것입니다. C. S. Lewis도 아마 자녀가 있다면 늘 싸웠고 야단도 많이 맞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있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절대적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신앙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야단 맞기 전 우리가 반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스마트 폰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스마트 폰을 갖고도 얼마든지 반복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 모두가 함께 반복해야 할 것이 있다고 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찬 테이블을 보면서 우리는 매 주일 반복적으로 생각해야 할줄 압니다.

먼저 이 성찬테이블에 지금 누가 누워 계시다구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누워 계십니다. 아울러 주님과 함께 누가 누워 있다구요…? 우리 각자가 누워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귀절은 다 다를수밖에 없습니다. 찬송이나 복음송가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똑 같이 반복 반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서 누워 계신 모습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함께 산 제물이 되어서 누워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는 눈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 흘리는 눈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망입니다. 3일 후에 다시 꽃처럼 부활하실 주님을 생각하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3일 후에 주님과 함께 다시 꽃처럼 우리가 일어나게 될 것을 생각하는 소망입니다.

눈물과 함께 누리는 소망 이것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누리는 최고의 삶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도 평생 눈물과 함께 3일 후의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선물을 가슴 속에 담은 자들의 손에 있는 스마트 폰은 복 받은 스마트 폰입니다. 우리들의 눈물과 소망이 스마트 폰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아닐까요?

눈물과 소망이 있는 한 스마트 폰은 아주 소중한 문명의 이기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과 함께 우리가 누워있는 성찬대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성찬대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brennan manning이라는 영성가가 있습니다. 30년전 어느 영성 수련관에서 신부님의 충고에 따라서 한 성경 귀절을 가지고 30일간 묵상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가서 7:10절 말씀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말씀을 성찬대에 누워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처험합니다. 이 묵상을 수련관에서 30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묵상이 30일로 마쳤을까요? 그 후 매일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30년간…. 하나님의 거친 사랑에 매료되어 매일 매일을 살게 됩니다.

 

말씀이 information으로 멈춘 것이 아닙니다. 그를 변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을 변하게 하고 계십니다.

 

함께 반복적으로 성찬대 앞에 겸손히 서십시다. 성찬대에 누우신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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