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4.05.1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젖 뗀 아이 같이
성경본문 : 시편 131편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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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시골 소년이 런던의 어느 큰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소년은 집이 몹시 가난해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어서 교회의 도서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그나마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가 보니 수많은 책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소년의 눈은 반짝였습니다. 흥분한 소년은 책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두껍게 먼지가 쌓인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볼품이 없는 그 책은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듯했습니다. 소년은 먼지라도 털 생각으로 책을 꺼냈다가 차츰 그 내용에 빨려들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동물학’, 저자는 이멜 드 페브리에였습니다. 소년은 서서 그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뒷장에 이런 메모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곧 런던법원으로 가서 1136호의 서류를 가지십시오.”
어리둥절한 소년은 곧장 법원으로 달려가 서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류엔 소년에게 4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소년은 눈을 비비며 다시금 꼼꼼히 서류를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유언장입니다. 당신은 나의 저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분입니다. 나는 평생을 바쳐 동물학을 연구하고 책을 썼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도서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랐습니다. 당신이 그 교회에서 내 유일한 저서를 읽어주셨으니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소년은 페브리에의 뜻을 기려 영국 전역에 도서관을 세웁니다. 그리고 좋은 책을 보급하는데 힘쓰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언뜻 읽으면 졸지에 행운을 잡은 소년이 부러워지는 마음이 모두 들 줄 압니다.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부러워한다고 같은 행운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이 이웃에게 이러한 행운을 주는 주인공이 되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지 않으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 말씀만 보면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당장에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그 보다 큰 일도 하리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교회 표어가 잘 못 된 것일까요? 교만에서 나온 표어일까요?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언제나 주어진 문맥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잘못된 가르침은 바로 문맥을 무시하고 한 귀절씩 해석하려고 할 때 생깁니다. 대표적으로 이단의 가르침은 대개가 문맥 중심이 아니라 글자나 한 문장에 근거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문맥을 살피기 위해 2, 3절을 마저 봉독해 드립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문맥 전체를 보니 감이 잡히는 것 같죠? 저 나름대로 한번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시인은 한 때 교만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크고 놀라운 일을 스스로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생각보다 잔혹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큰 실패를 맛봅니다. 삶의 무능을 느낍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이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교만과 함께 욕심을 버리니 어느덧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해집니다. 아니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 따뜻함은 어릴 때 엄마 품에서 누렸던 것과 유사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니 젖 뗀 아이들이 누리는 바로 그러한 평온함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평온한 마음으로 자기를 안고 있는 그 분을 생각합니다.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랍니다. 이 때 새로운 놀라운 일들이 매일 찾아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시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이 말씀과 저희 교회의 표어는 전혀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보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정말로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려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품 안에서 평온함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어린 아이 같이 될 수 있을까요?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아주 쉽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면 될 줄 압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1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결국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첫 걸음일줄 압니다. 교만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 집니다.
제가 의과대학 다닐 때 배운 것 중에 저의 삶에 크게 도움 되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학년 때 암에 대해서 배웠는데 교수님께서 정의를 내리시기를 ‘암은 자제능력을 잃은 세포들이다’ 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암은 계속 영양을 공급을 해 준다면 끝없이 자라서 남산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전에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자랄 수 없는 것뿐입니다.
암세포는 자신의 한계를 모릅니다. 정상 세포는 자라다가 정지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죽고 사람도 죽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반면 아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저는 저의 한계를 잘 압니다. 그런데 왜 저는 크고 놀라운 일을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가 바로 3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한계 가운데 절망하면 놀라운 일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놀라운 일을 체험합니다. 이들이 바로 젖 뗀 아이들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계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한계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함일 줄 압니다. 이것을 제일 잘하는 자들이 바로 젖 뗀 아이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놀라운 일을 체험합니다.
일본에 ‘아케보노’라는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과자 회사가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회사의 로고를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로고를 바꾸면 훨씬 사업이 잘 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회사원들에게 공모를 하게 했습니다. 여러 회사원들이 그려 왔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장의 친필 로고가 제일 좋겠다는 의견이 회사 안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서도를 즐겨오던 차라 사장인 우에쿠사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방에 앉아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고 ‘아케보노’를 한자로 일어로 영어로 그리고 여러 가지로 표기를 바꿔 가며 써 보았습니다. 먹의 농도를 바꿔 보고 글자의 간격을 바꿔 보고 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처음엔 넘치는 의욕으로 좋은 로고를 써 보겠다는 일념으로 정좌하고 명상을 해 가며 온 힘을 붓끝에 쏟았습니다. 회사의 얼굴인 로고가 자신의 글씨로 쓰여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퍼져 가는 것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자 붓을 잡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매일 아침 정좌하고 먹을 갈긴 했지만 결국 붓을 들 용기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먹을 갈고 붓을 놓고 종이를 펼쳐 둔 채 방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쁜 회사일로 로고 쓰는 일도 잠시 잊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종이 위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아케보노’라는 글씨가 먹으로 까맣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방문 앞에 서서, 그는 빨려 들 것 같은 그 글씨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뭉클뭉클 따듯한 무언가가 온몸으로 번져 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놀랐습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아케보노’라는 글씨는 바로 회사 창업 이래 전하려 애써 온 정신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스크린)
우에쿠사 씨는 그 순간 이것을 로고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글씨를 두터운 갈색 간지에 희망을 나타내는 녹색으로 인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고의 저자는 누구였을까요?
우에쿠사씨의 자녀 토모짱이었습니다. 토모짱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아빠가 쓴 글을 흉내 내어 무심코 쓴 글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하나뿐이었던 점포가 일본 전국에 101군데로 불어났습니다.
젖 뗀 아이가 놀라운 일을 해 낸 것입니다.
매주 노회에서 이메일로 뉴스레터가 옵니다. 지난주 뉴스레터의 첫 기사로는 ‘어떤 회중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어느 분의 글을 올렸습니다. 9가지 특성을 열거합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분별력 있는 회중, 조직력 있는 회중, 끈질긴 회중, 표현력이 있는 회중, 기획을 잘 하는 회중…’
모두 하나하나는 참 소중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젖 뗀 아이들의 마음을 소유한 회중’
교우 여러분, 교회가 놀라운 일을 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로 인해서 절망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올해 저희 교회가 중고등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현재 프랑스 백인들의 1.7%만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는 계속 줄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저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우려되시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만을 생각하면 정말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젖 뗀 아이가 되어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젖 뗀 아이가 되십시다. 우리들의 자녀들과 함께….
말씀을 거둡니다. 토모짱의 이야기는 더 놀랍게 전개됩니다. 어느 날 이탈리아 사람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기 회사의 로고를 만들어 달라는 청탁의 편지였습니다. 이 사장은 일본에 왔을 때 공항에서 아케보노 로고가 그려진 종이 가방을 본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끝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토모짱은 이탈리아 사장을 위해서 로고를 만듭니다. 이탈리아 사장도 그 로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탈리아 사장에게 우에쿠사씨는 자신의 딸이 다운 신드롬 아이인데 그 아이가 그린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장도 다운 신드롬 아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제게도 다운증 아들아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인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고 인간의 따뜻함을 곧바로 전해주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 라는 확신을 선물해 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고 나서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회사를 경영하자면 온갖 고난과 고통이 따릅니다. 용기를 잃을 때마다 저는 세상을 떠난 아들아이가 5년이라는 짧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 준,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메시지를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다운 신드롬의 두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세계를 창조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창조하시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온 세상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새로운 창조를 체험합니다. 이처럼 늘 세상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유지할수 있는 것은 모두 어린 아이들 처럼 자신의 한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의 한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젖 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계속 일으키십니다.
교우 여러분,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자녀들과 함께…. 자녀들처럼….
시인은 고백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