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4.04.13
예배명 : 종려주일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브라가 골짜기
성경본문 : 대하 20:20-26,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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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나라 때, 싸움닭을 잘 훈련시키기로 유명한 기성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훈련시킨 닭은 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주나라 선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선왕은 많은 재물과 예의를 갖추어 그를 초빙한 뒤, 그에게 주나라 왕실을 위해 전문적으로 싸움닭을 훈련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성자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오로지 싸움닭의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열흘이 지난 뒤 선왕은 기성자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훈련은 좀 되었는가?” 기성자는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들이 아직 허장성세가 심한 걸로 보아 아직 싸움을 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난 뒤, 닭싸움을 시키고 싶어서 좀이 쑤시기 시작한 선왕이 다시 기성자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제는 훈련이 좀 되었는가?”
“안 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근처에 다른 닭의 기척만 느껴도 곧 싸우려 듭니다.” 선왕은 이번에도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 이쯤이면 싸움닭의 훈련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여긴 선왕이 다시 기성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기성자는 여전히 선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안 됩니다. 아직도 다른 닭을 보면 노려보면서 여전히 지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심기가 불편했지만, 이번에도 선왕은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열흘이 지났습니다. 선왕은 큰 기대 없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기성자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제는 좀 되었는가?”
“이제는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싸움을 걸어와도 전혀 동요하는 기미조차 없으니,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덕이 충만하여 다른 닭들은 감히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며, 그를 보기만 해도 고개를 떨구고 도망칩니다.”
훗날 선왕은 기성자가 기른 닭으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곧 싸울줄 몰라 보이는 닭이 진정한 챔피온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기성자는 자기가 훈련시킨 닭이 싸우러 나갈 때 어떤 응원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이길테니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면 삼삼칠 박수라도 한번쯤은 쳐 주었을까요?
오늘 종려 고난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종려 고난 주일은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심과 아울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을 기억하며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는 모습은 한 마디로 싸울줄 모르는 사람이 싸우러 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승리자들이 타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승리자들은 말을 탑니다. 전혀 예수님의 모습에는 싸우려는 모습을 볼수 없습니다. 도리어 지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제자들과 무리들은 찬송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제자들과 무리들은 기성자의 지혜를 갖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싸울줄 몰라 보이는 나귀를 타고 주님이 입성하시기에 이는 승리의 징조라고 생각하면서 찬송하였을까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때만 하더라도 제자들이 기성자의 지혜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후에는 갖게 되죠. 그 이유를 잠시 설명해 드리면, 두번째 본문 말씀 곧 누가복음 19: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짧은 표현이지만 많은 것을 끄집어 낼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갈수도 있지만 중요한 모습을 포착할수 있습니다. 한편 마가복음 기자는 이 장면을 소개하면서 앞장서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놀라고 두려워 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두 팔을 걷고 나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을 느낀 것입니다. 곧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대장이 되셔서 큰 싸움을 일으키시고 끝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시키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앞장서실 필요가 없으셨으니 말입니다. 제자들은 큰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앞장 서서 가시던 예수님께서 엉뚱한 명령을 하십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이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말을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지 웬 나귀 새끼…? 그것도 아무도 타지 않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로마군대와 싸우려면 말을 타고 지휘를 하셔야죠? 그런데 웬 나귀새끼, 그것도 아무도 타지 않은….
예수님은 전혀 싸울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하여튼 이제 예수님은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타십니다. 아마도 나귀는 비틀거리며 무척 괴로워 했을줄압니다. 비틀거리지만 나귀는 나귀입니다. 순순히 무거운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갑니다. 순간 나귀는 깜짝 놀랍니다.
세상을 떠나가라 사람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나귀에게는 평생 최악의 날입니다. 무거운 사람을 태운 것도 힘이든데 사람들의 함성에 귀가 터질 것 같습니다.
나귀의 고통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고 계신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찬송을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나귀는 괴롭게 이 찬송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처럼 이 찬송이 괴로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찬송이 예수님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아니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안고 이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나귀를 타고 오시지만 나귀를 타고 승승장구하셔서 모든 로마군대를 무찌르고 메시야 왕국을 세울 것을 기대하면서 흥분 가운데서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어야 했습니까?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한편이 되셨어야죠. 최소한 이 건으로는…. 주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40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더욱 황당해 했겠지만, 신난 사람들은 제자들과 무리들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기들 생각대로 뭔가 일을 벌이실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아마 더 신이 나서 더 크게 외쳤을 것입니다.
“호산나!!!!!”
그러나 예수님은 몇 일안에 제자들과 무리들을 실망시킵니다. 잘 아시는대로 제사장들에게 힘없이 체포되십니다. 십자가 형을 받으십니다.
“호산나” 찬송 소리만 외롭게 메아리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동상이몽 가운데 찬송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찬송을 받으셨을까요? 그들의 생각대로 하실 생각은 전혀 없으셨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오늘 첫번째 본문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이스라엘 왕들의 삶을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첫번째 본문 말씀에는 다윗 왕국의 여섯번째 왕 여호사밧왕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시간상 본문 말씀을 짧게 잡았습니다만, 이 본문 말씀의 배경과 함께 여호사밧 왕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잘 섬긴 왕들 중에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불완전하니 몇 가지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여호사밧은 남왕국 왕인데 북왕국 왕인 아합의 요청에 응해서 이웃나라 길르앗 라못과의 전쟁에 가담합니다. 그 전쟁에서 낭패를 당하고 겨우 목숨만 살아서 남왕국으로 돌아 옵니다.
그런데 이 약해진 때를 이웃나라가 가만히 놓아 둘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에 있는 역대하 20:1-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여호사밧을 치고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어쩔수 없이 여호사밧왕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공포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이 한 레위 사람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내 여호사밧은 몸을 굽혀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 말씀 첫 절인 20절 말씀을 보면, 여호사밧이 전쟁터에 나가는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는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이 찬송을 부르니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22절을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복병은 천사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계속 23절을 보면,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찬송이 시작되자 천사가 복병이 되어 나타났었는데, 이제는 적군들이 서로 쳐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끼리 쳐죽인다면 승리는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곳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브라가’는 ‘송축’ 이란 뜻입니다. 곧 송축의 골짜기 찬송의 골짜기라고 부른 것입니다.
브라가 골짜기는 전혀 싸움에 준비가 안 된 나라가 대승을 거둔 유명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냥 입성하실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주님은 홀로 브라가 골짜기의 이야기를 당신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완성 시키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 장소의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전혀 싸움에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대승을 거두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온 인류를 브라가 골짜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왜 돌들이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예루살렘은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들에게 이제 최고로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있는 곳이 바로 브라가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전혀 싸울줄 모르는 군대가 대승을 거두는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돌들이 소리 지르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는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 싸울줄 모르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이 만일 말을 타고 오신다면 잘 뛰는 사람만 주님을 따를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귀 타시고 천천히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뒤를 천천히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오심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브라가 골짜기로 초대하시고 계십니다. 영원한 승리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승리가 자꾸 멀어져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힘을 잃어 가고 계십니까? 그 때가 바로 승리가 제일 가까이 와 있는 때입니다. 새로운 힘이 가장 가까이 와 있는 때입니다. 우리는 바로 브라가 골짜기에 다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히 나귀타고 오심을 통하여 당신의 브라가 골짜기를 완성시키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각자가 완성해야할 브라가 골짜기를 주셨으며 그것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나귀타고 오십니다.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찬송하는 자들에게 우리들의 삶은 브라가 골짜기가 되어갑니다.
저희 교회 코트야드에 예쁜 돌들이 있습니다. 현재 그 돌들은 좁은 곳에 있습니다. 이 돌들이 “좁다” 외치고 있을까요?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
평소에는 “르호봇” – 넓다. 우리 코트야드는 돌들의 찬송으로 인하여 브라가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종려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돌들과 함께 찬송하십시다.
“호산나.” “르호봇”
말씀을 거둡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요한이라는 우편집배원이 살고 있었습니다.매일 50마일의 거리를 오가면서 우편물을 배달하였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모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마을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수십 년간 이 길을 오갔는데, 나는 앞으로도 이 먼지가 나는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야만 하는가?”
정말 지루한 인생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깊은 시름 속에서 걷던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말합니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다음 날부터 요한은 들꽃 씨앗을 주머니 속에 가득 넣어 가지고 다니며 짬짬이 틈을 내어 그 꽃씨들을 길가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이듬해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봄이 되자 봄꽃들이, 여름에는 여름 꽃들이, 가을이면 가을꽃들이 철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요한은 그의 삶의 순간 순간을 어떻게 보면 브라가 골짜기로 완성시킨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꽃씨를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길을 브라가 골짜기로 완성시키십시다. 우리의 좁은 골짜기로 주님께서 나귀타고 오시고 계십니다. 찬송으로 주님을 맞이하십시다. 우리들이 찬송을 안 부를 때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부활의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찬송은 부활의 꽃을 활짝 피오눈 축복의 씨앗이 될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