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4.02.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천년이 하루 같이
성경본문 : 베드로후서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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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할머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독일의 어느 여류 작가가 지은 동화입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매가 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바뻐서 사실 할머니의 큰 사랑 가운데 두 남매는 살아갑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남매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을 잃게 된 것입니다.
깊은 슬픔 가운데 있다가 남매는 기가막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 계신 할머니를 다시 이 땅으로 불러 오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남매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할머니가 하늘 나라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합니다. 자기들이 이 곳에서 못할 짓을 하면 할머니가 어쩔수 없이 세상에 내려 올 것이라는 기발한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갑니다. 할머니가 사준 물안경을 쓰고 등교를 합니다. 선생님은 놀라서 묻습니다. 웬 일이냐고…. 물놀이 할 때 쓰는 물안경을 쓰고 학교에 오니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엄마가 싸 준 점심도 먹지 않고 버립니다. 선생님은 엄마를 빨리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숙제도 다 해 놓고도 제출하지 않습니다. 한번도 숙제를 걸르지 않았던 아이들인데….
동화에는 하늘나라에서 안타깝게 내려다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할머니의 모습도 군데 군데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크리스마스 과자를 만드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크리스마스 과자를 만들다가 망가뜨립니다. 그것을 보고 할머니가 참다 못해 다시 내려 올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또 다른 것을 시도하고 또 시도합니다. 한번은 바닷가에 가서 할머니의 반지를 던집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오실줄 알고…. 결국 남매 중 오빠는 최악의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죽어서 할머니를 만나 다시 데려 올 생각까지 합니다. 오빠는 추운 발코니에서 할머니에게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다행히 여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부모님에게 말해 추위에 떨고 의식을 잃어가는 오빠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살려 냅니다.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신비스러운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오빠도 건강을 회복하고 온 가족이 크리스마스 츄리 앞에서 선물을 나눕니다. 작은 상자가 눈에 띄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놓지 않은 상자입니다. 상자를 여니 아이들이 바다에 버린 할머니의 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남매는 반지를 통해 늘 할머니가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작년도 한국에 가 있을 때 구입하여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읽었던 동화입니다. 늘 저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는 동화이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저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늘 고정 관념 안에서 살고 있는 어른들을 향하여 도전장을 던지는 동화인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더 이상 세상에 돌아 올수 없다는 고정 관념에 매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신이 번떡 들게 하는 동화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고정 관념에 갇혀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일깨워 주는 작가의 뜻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이 작가와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작가 멘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추측으로는 인간의 80퍼센트 이상이 독창적인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20%에 속하십니까? 80%에 속하십니까? 믿는 자들은 모두 20%에 속하실줄 압니다.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가슴에 새긴다면 독창적이 되지 않을수 없다고 봅니다. 베드로는 동화작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난데 없이 이런 멋진 표현을 하게 되었을까요? 9절 말씀을 보면 그 배경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는 목회에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베드로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그러니 환난을 잘 견디십시요.” 이렇게 가르치기를 십년 십오년 2십년이 지나도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성도들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 전에 4절 말씀을 보면,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주님이 다시 오시기는 커녕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올해일까 내년일까 아니면 다음 해일까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봐서 결코 주님은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를 들으면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동화와 같은 말을 하네. 어떻게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거야?”
요즘 동계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이상화 선수가 자랑스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이상화 선수가 연습을 하는 태능 선수촌에 다음과 같은 배너가 붙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 배너 앞에서 선수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쩔줄 몰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배너를 보면 코치는 화를 내며 붙인 사람을 쫓아 냈을 것입니다.
아주 비슷한 케이스라고 봅니다. 성도들은 지금 시간을 재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 앞에 배너를 높이 쳐 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아마 이 배너를 보고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시간은 측정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러면 왜 주셨을까요?
제가 필라델피아 연합교회를 섬길 때 한 지혜로운 여성 교우님의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분은 남편을 일찍 여의시고 혼자 가게를 하면서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가게 일을 보시랴 자녀 키우시랴 교회 일 하시랴 아주 바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휴식 시간에는 시간을 길게 늘입니다. 10분을 마치 1시간처럼 늘입니다.”
그는 시간의 신비를 아는 분이십니다. 시간을 재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간을 누리는 분이십니다. 시간을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수 있기 때문에…. 그 분은 시간을 동화처럼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아마 베드로에게 이 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루를 길게 늘여서 천년이 되게도 하십니다. 또한 천년을 줄여서 하루가 되게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때로는 하루를 길게 늘여서 천년이 되게 하기도 하고 천년을 줄여서 하루가 되게 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언제 우리는 시간을 줄이고 또 언제 늘이면 좋을까요? 베드로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성도들의 고난의 날이 극히 짧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고난의 시간이 짧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천녀이 하루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동안 성도들은 고난의 시간을 스스로 늘이면서 지내 왔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키 보다는 그 동안 고난 가운데 지낸 날들을 세 가면서 하루 하루를 왕창 길게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걱정은 바로 나쁜 시간을 늘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가 길고 일주일이 길고 일년이 너무 깁니다. 결국 베드로에게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과연 오십니까?”
이렇게 불평하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의 시간을 스스로 늘였습니다. 하루가 천년처럼 느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베드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곧 천년을 하루처럼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모두 하늘 나라에 갔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이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자기들의 고난의 시간이 한 순간과 같았음을 비로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의 시간을 마음 속으로 늘리면서 살았던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늘 고난이 찾아 옵니다. 고난을 받는 두 자세가 있다고 봅니다. 고난을 스스로 길게 느낄수가 있습니다. 짧게 느낄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고난의 시간을 줄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마음으로 마음껏 줄일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천년이 하루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지나는 한 순간에 불과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는 분들은 인생 동안 고난은 고난의 시간은 하루 정도 밖에 되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반면 의로운 이야기는 하루가 천 년의 이야기로 길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11-13절 까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고난은 순간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행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은 하루에도 천년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간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로니타 존슨이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에게 상담실로 오라는 쪽지를 받았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상담실에 가서 앉았습니다.
“넌 손톱을 곧잘 물어뜯더구나.”
사실 자기는 신경과민이었고 그래서 손톱을 물어 뜯곤 했다고 합니다.
“너는 아름답고 특별한 아이야. 손도 정말 예쁘지.”
선생님은 자그마한 기구가 들어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말합니다.
“너는 그 손으로 많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게 될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 손톱 뿌리 부분을 정리하고는 들쭉날쭉한 손톱 끝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매끈하게 해주는 향긋한 로션을 양손에 발라주었습니다.
그는 부푼 가슴으로 정말 중요한 존재가 된 듯 머리를 높이 들고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으며 그곳을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늘 야단을 듣고도 고칠 수 없었던 버릇이었는데, 그날 이후 다시는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음악가가 되었고 악기를 연주하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다니는 교회에 한 여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따금씩 자기를 비하해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루는 자신은 마약중독자로 몸을 팔았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만 두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거리로 되돌아가게 된다고 말하면서 울었습니다. 그 여자를 껴안으면서 말합니다.
“당신의 삶은 중요해요.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을 지녔어요.”
4년 후 그 여자는 드디어 모든 문제에서 해방됩니다. 그는 유혹의 때마다 “당신의 삶은 중요해요” 생각하며 이겨 나갑니다. 그런데 그 말은 상담 선생님이 로니타 존슨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의 하루의 아름다운 행위가 놀라운 이야기로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꽃 피우고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천 년간….
요즘 20년 만의 강추위로 사업하시는 분들이 많이 고생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그렇게 만드는 장본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집 사람이 저의 바지를 세탁소에서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 수요 여성 성경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려서 칫수를 재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수요 여성 성경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날이 몹시 추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은 추우니 따뜻한 날에 가자고 하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저의 이 모습이 생각이 나면서 강추위로 사업하시는 분들을 더 어렵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나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난 수요일 아침에 기도하면서 이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날도 아침 일기예보를 보니 영하의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를 마친 후 집 사람에게 오늘은 세탁소에 들리자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세탁소에 가긴 갈 것이지만 아무도 손님들이 오지 않을 때 맡기는 것이 주인을 더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탁소에 가 보니 역시 손님은 없었습니다. 주인은 신문을 보고 있다가 저희를 맞이한 것입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찾아간 저의 작은 정성이 주인에게 따뜻한 동화의 시작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귀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하루는 길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하루는 이처럼 천년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천년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하루를 길게 늘이십시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닙니다. 하루는 우리가 얼마든지 길게 늘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올해도 벌써 한 달하고 반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2014년도도 우리가 길게 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니 이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2014년도를 천년으로 늘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시간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던 성 어거스틴은 시간의 신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아주 시간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시간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가 시간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전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 공감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시간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잴수 있습니다. 카운트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신비는 분석할수가 없습니다. 오직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환난 가운데서는 마음껏 시간을 줄이십니다. 천년이 하루가 되게 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그 하루를 늘이십시다. 의의 삶을 사는 도구로 삼으십시다. 우리 모두 시간의 신비를 사용하여 멋진 동화 작가가 되어 보십니다.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