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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

날짜 : 2013.08.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스도의 편지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3:1-11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825.wmv

제가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설교 준비 전에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쓰게 된 경위는 제가 문학적이고 글을 쓰기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세기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있는데 칼 바르트는 원고를 쓰기 전에 늘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으니 어떻게 할까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20년이 되어 오지만 설교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두려움도 있고요. ‘이번에는 잘 될까’ 초조한 마음도 생깁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자제하기 위해서 저는 편지를 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결국 편지를 받으시는 분보다는 저를 위한 거죠.
그래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답장을 안 받아도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답장을 안 합니다. 가끔씩 답장을 받습니다. 답장을 안 받아도 쓰고 또 씁니다. 물론 1년에 한두 번쯤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상치도 않은 답장을 받았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서두만 읽어 드립니다.

“그리움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두 번씩이나 반가운 편지를 받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기 짝이 없고, 미안해서 답장을 쓰네.
옛날 옛날, 우영엄마에게 써 본 이후, 정말 오랜만에 편지지를 대하다 보니, 정말 새삼스럽고 감회가 새롭네.
정말 고마우이,
이렇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 무슨 말을 쓸까하고 편지지를 쳐다보고 있는 새벽의 내 모습이,
현실 이전의 옛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제가 쓴 편지를 두 번씩이나 받은 후 안 되겠구나 하고 답장을 쓴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새벽 막상 답장을 쓰려고 편지지를 꺼내드니 총각 때 지금 부인이 된 아가씨에게 편지를 쓰던 생각이 몰려 왔나 봅니다. 20대 열렬히 연애하던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많은 감회에 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고마왔다고 저에게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제 편지 덕분에 원래도 잉꼬부부였지만 더 잉꼬부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답장을 받고 저는 편지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껴 보았습니다. 저는 인사 겸 가벼운 마음으로 쓰지만 받는 분들에게는 자기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넘어서 편지가 가지고 있는 신기한 위력을 느껴 보았습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이 담기지 않은 편지가 이런 힘을 발휘했는데 편지의 내용까지 엄청나다면 정말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편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 가지 종류의 편지가 나옵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저희 교회도 교역자 분들을 모실 때 항상 누군가의 추천서를 참고 합니다. 이 당시에도 추천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느 분을 어느 지역으로 파송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와 당신 사이에 이런 추천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 교우와 사도바울의 일행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는 표현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읽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고린도 교우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 이들은 마음이 뿌듯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이 뿌듯한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연쩍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처럼 두세 번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도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그룹과 인정하지 않는 두 그룹이 늘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도를 통해 보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죠. 고린도 전서 13장, 곧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여튼 겸연쩍어 하던 뿌듯해 하던 사도바울은 세 번째 종류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며 보았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도바울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편지 곧 ‘우리의 편지’라는 말도 그렇게나 좋았는데 아니 미안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늘 내분이 심하고 싸움이 심한 자기들의 교회를 향해서 최고의 찬사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구약을 좀 아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이라고 하면 당연히 구약을 아시는 분이면 모세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편지를 모세의 돌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돌판 곧 십계명을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근거 없이 뒤집어엎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7, 8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의 십계명은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들은 영의 직분을 소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묵직한 십계명의 돌판은 정죄의 도구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편지는 도리어 살리는 도구가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빛은 사라지는 빛이지만 고린도 교우들은 영원에 이르는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Justin Wren이라는 한 때 두 차례 프로 레슬링 챔피언이었던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제는 콩고의 Pygmy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당하였는데 선생님과 의사에게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슬링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모든 frustration을 풀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레슬링에 빠지게 됩니다. 생각 보다 잘하게 되자 부모님이 후원을 해 줘서 레슬링을 자기의 career로 삼게 됩니다.

레슬링으로 성공도 하지만 레슬링을 하다가 부상을 입습니다. 그런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결국 선수와 코치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하도 마약에 빠져서 가장 친한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합니다. 자기가 best man인데도….
이처럼 가장 어려울 때 친한 친구에게서 이메일이 옵니다. 60번 계속 보냈지만 Justin은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죄의 편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60번의 이메일을 한번쯤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메일의 제목은 ‘Game Plan for Victory’였습니다. 레슬링 매치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기록된 것인지 하고 열어보니 친구가 수양회로 초대를 한다는 이메일이었습니다. 한편 더 반가운 소식은 본인이 다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막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었는데 친구의 요청으로 수양회에 참가합니다. 결국 그의 삶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긴 말씀 다 못 드립니다. 다시 레슬링으로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자기를 위한 선수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레슬러가 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잠시 레슬링을 접고 아프리카로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그미족들이 노예로 사는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약에 찌든 레슬러를 선교사가 되게 했던 사건은 바로 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정죄의 편지가 아니라 곧 십계명의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가 한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제 콩고에서 노예 생활로 죽어 가던 수많은 피그미 족들을 구원하게 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 있습니다. Justin이 왜 60개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천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져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가뜩이나 괴로운데 크리스천에게서 또 다른 돌을 맞기가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러면 왜 Justin 은 기독교인들은 정죄의 돌을 손에 쥔 자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보일 수 있나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Justin의 친구처럼.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가 되는 방법’을 5절 말씀을 통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곧 하나님으로 초점을 돌릴 때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돌리며 살 때 우리의 전 삶은 아름다운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슬라이드)
(괄목상대 刮目相對)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괄은 비빌 괄인데,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한다는 뜻입니다. 삼국시대 초엽 오나라 왕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손권이 여몽을 불러 말합니다.
“자네가 좀 더 훌륭한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힘썼습니다.
몇 년 후 재상 노숙이 여몽을 찾아왔습니다. 여몽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노숙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졌음에 매우 놀랐습니다. 노숙이 여몽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겠나?”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비들이 아닙니까? 사흘만 하나님 앞에서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영광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삼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조반니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그를 찾아 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본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먼저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그곳의 조각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바라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합니다.
“저는 제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안에 있는 영광스런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밝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을 밝게 만들어 갑니다. 이 땅 위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고백을 함께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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