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3.06.3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들보를 빼어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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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들은 양파와 풍뎅이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면 또 나오고 또 벗기면 또 나오고 하지 않습니까? 양파의 모습이 이들이 생각하는 세계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일 바깥에 하늘이 있고 그 안에 땅이 있고 그 안에 지하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 모습이 바로 양파의 모습이었습니다. 양파는 규칙적으로 한 면 한 면이 겹쳐서 이루어진 신비한 영적 존재로 느낀 것입니다.
한편 이집트인들은 풍뎅이도 신적인 존재로 섬겼는데 풍뎅이는 똥을 둥그렇게 만들어서 굴린다고 합니다. 똥을 굴리는 것을 마치 태양을 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풍뎅이가 똥을 구르기에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잘 보았건 잘 못 보았건 자연을 관찰하는 눈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자연 관찰을 통해서 신적인 세계를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연을 보는 눈은 뛰어 났지만 하나님을 보는 눈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겨우 양파나 풍뎅이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한편 이런 생각을 했던 이집트인들은 4천 년 전에 사람들입니다. 만일 지금도 이런 상상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오늘도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은 콜롬비아에서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는데 이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서 참 하나님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래야겠죠.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엉뚱한 신관을 가진 분들에게 우리는 동정심마저 갖고 있습니다. 반면 무신론자들에게는 어떤 마음을 갖고 대합니까? 사실 무신론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현대인들은 어떨까요? 이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지난주에는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주간이었습니다. 대법원에서 DOMA(Defense of Marriage Act)라고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회에서 제정했던 법을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법은 결혼은 남녀가 쌍을 이루는 사회제도임을 재확인한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성애 커플에게는 서로가 재산권들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이제 동성애자들을 위해서 그 법이 위헌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앞으로 동성애자들도 합법적으로 결혼을 하면 재산권 등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인권적 차원에서 재산권 등의 혜택을 주는 것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결혼은 두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사회제도라는 법이 상정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두 사랑하는 사람이란 남녀관계뿐 아니라 남남, 여녀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이제는 반수 이상이 동성애를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급속도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단지 양파와 풍뎅이로 신적 존재를 표현하는 우를 범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아예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사람들이 자꾸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올 해 저희 교회 표어를 ‘빛으로 소금으로’라고 정했습니다.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정말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신년예배 설교에서 말씀드리기를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소금의 역할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유는 소금은 세상을 보존합니다. 세상이 보존되어야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은 소금이 필요합니다. 소금으로 세상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이 때 어떤 사람이 진정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 될까요? 이 때 주님은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교우 여러분, 흥분을 가라앉힙시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차분히 들어 봅시다. 저는 이러한 때 주님께서는 도리어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오래 전에 어느 교우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는데 아주 지혜로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을 비판 안 해요. 그래야지 남도 나를 비판하지 않을거 잖아요.”
그분이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 분은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것이 남들의 gossip의 대상이 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지혜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큰 죄는 동성애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죄면 죄지 제일 큰 죄 더 작은 죄가 있겠습니까?
계속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래도, 우리가 비판한대로 비판을 받을 것을 아는데도, 계속해서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생각이 들죠? 그래도 저 사람의 죄는 나의 죄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동성애는 정말로 심각한 죄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은 진짜로 심각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나의 죄가 더 작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심각한 죄의 소유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로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티 정도의 죄입니다. 반면 자신이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는 바로 들보와 같은 죄입니다.
요즘 저는 열심히 선글라스를 쓰고 다닙니다. 운전할 때나 산책할 때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을 때나….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작년에 눈 검사를 했는데 백내장이 조금 시작되었다고 선글라스를 쓰라고 의사의 권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씁니다. 지난번 한국에 가 있을 때도 시간만 나면 쓰곤 했습니다. 백내장이 더 진행되게 하지 않게 하려고….
그런데 백내장과 들보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백내장이 안 생기게 하려고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데 만일 들보가 눈에 들어 와 있다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큰 들보에 선글라스가 달랑 달려 있는 모습 정말로 생각만 해도 최고의 코미디입니다. 제가 백내장을 멈추게 하려고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비판하고 다닌다면 바로 저의 모습이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웃기는 일이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눈에 들보가 있고 들보에 선글라스가 달랑 매달려 있는 채로 이웃의 눈에 티를 빼겠다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모습입니까? 우리가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할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코미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웃기는 모습의 주인공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들보를 가진 자들이 이웃의 티를 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소금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들보를 빼면 됩니다.
예수 전도단의 창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한 번은 몬태나의 어느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한밤중에 완전히 잠이 깨었습니다. 전자시계를 보니 새벽 2시22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네 안에 쓴 뿌리를 너는 숨기고 있다. 너는 용서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가 용서하지 않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생각나지 않아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누구를 용서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틀러를 용서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주님, 히틀러는 죽었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네 마음속에서는 죽지 않았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그래요, 주님. 제가 히틀러를 용서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또 다른 용서해야 할 공인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들보를 빼었을 때 더욱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참 이웃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우리 마음 속 깊이 히틀러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들보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들보를 빼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쓴 뿌리가 항상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이웃의 티를 보는 순간 우리의 눈에 남아 있는 쓴 뿌리는 자라납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자라나듯이 우리가 이웃의 티를 볼 때마다 쓴 뿌리는 자라납니다. 폭발적으로 자라납니다. 순간적으로 들보가 됩니다. 더 이상 티를 뺄 수 있는 시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웃의 죄가 눈에 들어 올 때 우리는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안에 뽑아야할 쓴 뿌리가 있구나.”
그 쓴 뿌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목사님에게는 죽은 히틀러를 미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뿌리는 쉽게 들보를 만들어 내곤 한 것입니다. 들보를 뽑았을 때 그는 사랑해야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는 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그 죄에 희생되는 사람까지 미워할 때,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미워할 때 어느덧 선글라스가 들보에 걸쳐져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 들보를 어떻게 뺄 수 있을까요? 아니 들보의 근원인 쓴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요?
눈물입니다. 사랑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린 적이 오래 되셨습니까? 쓴 뿌리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티를 볼 때 들보가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을 위한 눈물을 흘리십시다. 눈물만이 들보를 빼낼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때만이 이웃을 바로 보는 눈을 소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왜 기독교 국가이었던 미국이 오늘 이처럼 되었습니까? 우리의 눈물이 말라서 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월급쟁이들을 salary man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Salary는 라틴어로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왜 월급쟁이들을 salary man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월급이 너무 짜서? 모라시대에는 월급을 소금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소금이 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사실 우리들에게 salary man salary woman이 되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salary man and woman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땀도 소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눈물도 소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땀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바로 주님을 위한 salary man and woman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땀만 흘리지 마십시다. 눈물도 흘리십시다. 그 때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와 더불어 쓴 뿌리가 빠져 나갈 것 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