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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날짜 : 2013.03.2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성경본문 : 사도행전 7:54-8:1a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324.wmv

영국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 만나기를 늘 꺼려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이런 성격이 주정뱅이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태어난 인생,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소년은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네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날씨가 참 좋네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점점 이 소년을 좋아하게 되었고 소년의 성격도 점점 밝고 명랑해졌습니다. 그가 바로 영국의 달변가이자 극작가,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버나드 쇼입니다.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없던 소년을 세계적인 문학가가 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인사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날씨가 참 좋네요.”
청년 교우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 그렇게 먼데 있지 않습니다. 이 인사말을 잘 하시면 됩니다. 아니 노벨문학상까지 바라지 않으셔도 우리 모두 문학적으로 생활하시기 원하시겠죠? 방법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네요.”

오늘 종려 고난주일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올해도 저희 교회는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서 온 교우님들이 함께 사순절의 여정을 같이 갔습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젊은 교우님들이 많이 참여해 주셔서 아주 좋은 묵상집이 된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어느 교우님께서 젊은 교우님들의 글을 읽으니 더 신선한 감동을 느낀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3세대가 함께 묵상집을 만들어 가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묵상집이 나오도록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글 솜씨가 없다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버나드 쇼의 이야기를 들으신 이상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멋진 문학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묵상집을 만드는 이유는 문학인이 되기 위함은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음성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제가 두 가지 주님의 음성을 함께 듣기 위한 설교를 드렸었습니다. 하나는 “너희는 안심하라.”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마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풍랑 가운데서도 잠꾸러기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울러 장난꾸러기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주전에는 사도행전에 세 번씩이나 기록된 주님의 음성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오늘도 주님을 박해하는 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실감나게 듣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세 번째 주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의 주인공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큰 능력을 행하며 전도를 하다가 그만 붙잡혔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지키는 유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설교를 하던 중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본대로 고백합니다. 56절 말씀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설교도 듣기 싫어했던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폭발합니다. 57, 58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익숙한 이름이 나오죠. 사울이라 하는 청년이 나옵니다. 물론 이 사울이 나중에 바울이 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 중에 우뚝 서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울의 발 앞에 증인들은 하나 둘 자기들의 옷을 벗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발 앞에 옷을 벗어 놓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순간 ‘퍽, 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이 소리 나는 곳으로 얼굴을 돌리니 스데반이 돌에 맞으며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피범벅이 되는 가운데 한 소리가 가냘프게 들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 옵소서.”

그러나 스데반이 보인다고 하는 예수는 사울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스데반이 무릎을 꿇습니다. 두 번째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소리는 제법 크게 들려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는 고개를 떨굽니다. 8:1절 말씀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전혀 사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건은 이미 벌어진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처음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울은 스데반을 통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번 사순절 기간 소개해 드린 주님의 음성 모두 사도 바울이 들은 음성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두려워말라. 안심하라.” 그런데 이 두 음성은 사도바울이 직접 들은 음성입니다. 반면 오늘 말씀 드리는 세 번째 음성은 사도 바울이 간접적으로 들은 주님의 음성입니다. 스데반을 통하여 듣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음성이 제일 처음 들은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후 두 번째 세 번째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사도바울이 되게 한 가장 중요한 음성은 바로 이 음성이지 아니었을까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물론 처음에는 이 음성을 듣고도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음성으로 생긴 마음의 균열 사이로 주님께서 나중에 점차 나타나신 것이 아닐까요?

사실 이 당시 사도 바울이 믿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이었습니다. 절대로 용서가 아닙니다. 지은 죄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사도 바울 아니 사울에게는 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잘 못된 것을 전파하니 모두 처형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한 사람도 용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돌 같이 굳어진 사울의 귀에 스데반의 고백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그러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스데반의 고백은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켜보던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의 급소에 큰 충격을 맞은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급소를 쳤을 때 골리앗은 허물어져 내린 것처럼 골리앗 보다 더 완강해 보였던 사울도 시간이 갈수록 점차 허물어져 간 것입니다. 허물어져가는 틈 사이로 주님은 곧이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의 고백은 제 2, 제3의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스데반의 고백은 그처럼 powerful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한국을 방문했던 코일 수녀 신학자가 인생을 북으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했습니다.

“북이 차 있으면 두드려도 별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이 빈 북은 소리를 멀리까지 울려 퍼지게 합니다. 우리의 북도 속이 비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스데반은 속이 빈 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스데반이라는 빈 북을 통해 커지고 또 커져서 사울의 가슴을 찢어 놓았습니다. 찢겨진 가슴 사이로 주님은 후에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사순절마다 아니 고난주간 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곤 합니다. 주님의 가상칠언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우리 안에서 늘 주님의 음성이 멈춰 버리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북은 비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우리 안에서 죽어 버립니다. 더 이상 세상을 향하여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느 때 보다도 꽉 차 있는 것을 좋아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력서도 무엇인가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스펙이 좋아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들 하죠. 스펙이 꽉 차있어야 한다는 뜻일 줄 압니다.

빈 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서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물로 채워야 속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채워있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지 않습니까?

저의 삶에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설교 준비입니다. 주일날 한편의 설교를 위하여 일주일 내내 신경을 쓰면서 지냅니다. 대개 목요일에 설교 초안을 마련합니다. 금요일에 시간이 되면 수정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보완한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면 목요일 보다 설교분량이 많아집니다. 설교가 꽉 찬 기분이 들게 합니다. 어떤 면으로는 만족해합니다. 빈 것 보다는 꽉 차있는 것이 뭔가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으니까요.
토요일 아침에 수정을 합니다. 대개 12시쯤까지는 동시통역사에게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부터는 설교본문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약 20년 설교 준비를 해 오다 보니 생긴 습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복되는 것, 안 해도 되는 것들을 찾는 시간을 갖습니다. 비우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웬만치 비운 후 통역사에게 보냅니다. 시간은 토요일 12시.
본문을 보냈다고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허락 되면 다시 읽어 봅니다. 설교하듯이 혼자 소리 내어 읽어 봅니다. 주일 아침 까지 읽어 봅니다. 부족한 부분은 여기 저기 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많이 손을 대는 것은 자르는 것입니다.

내용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자릅니다. 왜냐고요? 20년 설교를 하다 보니 깨닫는 것은 저는 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 멀리 퍼져 나갑니다.
때로는 통역사들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밤새 준비해왔는데 제가 한 페이지쯤 잘라 버리니 말입니다.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자르지…? 처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 참 생각하고 읽어 봐야 잘라야 할 것들이 보입니다. 때로는 주일 아침에야 보입니다. 아마 어떤 것은 미쳐 자르지 않고 주일 설교시 사용되기도 하겠죠. 그처럼 자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라야지만 북소리는 더 멀리 퍼져나갑니다. 곧 자신을 비운 만큼 powerful한 설교가 됩니다.

스데반도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꽉 찬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 말씀으로 유대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유대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에 맞으며 위대한 설교를 합니다. 자신을 비운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이라는 북을 통하여 나오는 소리는 드디어 사울의 급소를 격파하고 만 것입니다. 사울을 돌아오게 하는 고백은 이 고백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의 참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운 가운데 이 고백을 온 인류를 위하여 남기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손수 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고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도 많은 스펙을 쌓으면 그만큼 많은 공헌을 할 것이다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지식을 쌓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때 자신을 비우는 일은 시작이 됩니다. 이웃을 향하여 그 고백을 할 때 우리의 비움을 완성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이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그 때 그들의 자녀들까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저희는 B40, Brookline주민들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이들에게도 우리는 북소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북소리는 그들로 하여금 제2 제3의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지 않을까요?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의 북소리를 발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TV방송에 나오신 분이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많은 학대를 받아 온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도 병이 들어 양로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늘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양로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양로원에서도 아버지는 늘 주위 분들에게 많은 골칫거리였다고 합니다. 늘 다투고, 훔치고….
어느 날 따님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그토록 괴롭혔어도 아버지의 좋은 면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하게 집안일을 잘한다던지, 잔디를 잘 깎는다든지…. 이런 모습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점차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드디어 양로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찾아가서 말했다고 합니다.
“You are Good Daddy.”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화도 안 내고 양로원 분들에게도 친절한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멋진 북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인생의 북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You are Good Daddy.”
그 뜻은 바로 “이 죄를 그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고난주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북소리를 들으십시다.
아직 주님의 이 음성을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스데반처럼 북소리가 되십시다.
“You are good.”
온 세상 그 누구도 품는 북소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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