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3.02.2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너희는 안심하라
성경본문 : 사도행전 2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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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을이 되자 인디언 추장에게 부족들이 몰려와 올 겨울은 얼마나 춥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추장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자기 텐트에 들어가 기상대에 전화를 걸어 문의 했습니다. 기상대에서는 겨울이니 물론 춥겠지만 얼마나 추울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추장은 밖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좀 추울 듯 하니 겨울을 잘 준비해라.”
부족들은 돌아가 땔감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만큼의 땔감이 모이자 부족들이 추장에게 달려가 다시 물었습니다. ‘올 겨울에는 얼마나 춥겠느냐?’ ‘얼마만큼의 땔감을 모아야 하느냐?’ 질문이 이어지자 추장이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시 기상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올 겨울에는 얼마나 춥겠느냐고 묻자, 기상대의 대답이 지난번과는 달라졌습니다. 추워도 엄청나게 춥겠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추장이 왜냐고 묻자, 기상대 왈. 요즘 인근의 인디안 부족들이 땔감을 모으느라고 난리인 것을 보니 올 겨울은 사상 초유의 한파가 밀려올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몇 주 전 큰 눈이 내렸었죠. 그 때 있었던 저의 이야기를 해드리면, 저는 눈폭풍 Nemo가 몰려오는 주간 월요일부터 말씀과 함께 집필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틴 텍사스에 가 있었습니다. 금요일에 돌아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 윤 목사님으로부터 날씨에 관한 메시지를 받고 그날 밤 12시까지 기다려 보았습니다.
밤 12시경 기상대에 알아보았습니다. 저의 기상대는 Weather.com. 제가 문의한 기상대는 조속히 오스틴을 탈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기상대에 순종하고 곧바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습니다. 목요일 새벽같이 떠나서 목요일 오후에 보스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저의 기상대 Weather.com덕분에 무사히 위기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Weather.com이 없었더라면 저는 오스틴 어느 호텔방에 며칠 더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Weather.com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Weather.com은 바로 과학의 힘의 열매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과학은 우리들에게 위기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하여 과학의 힘을 그 어느 때 보다 더 의존합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 저는 바로 과학의 힘의 대변자인 셈입니다. Weather.com덕분에 위기 상황을 빠져 나왔으니 말입니다. 말씀드리고 나니 좀 이상하네요. 목사가 강단에 서서 과학의 힘을 증언하고 있는 듯 하니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위기 상황을 넘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힘을 다해 과학의 힘을 증언해야 합니다. 목사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 위기 상황을 넘기는 것 그 이상이라면 우리는 과학의 힘을 넘는 그 무엇의 증언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무엇을 증언하고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의 증언자가 되어야 하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옵니다. 이때는 항해하기가 좋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기록이 되어 있는데, 금식하는 절기는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를 뜻합니다. 이 절기가 지났다는 것은 10월이 지난 셈입니다. 사실 지중해는 9월부터 항해가 어려워지고 11월 중순부터는 항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곧 항해가 어려워진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겨울에는 보스턴에 눈이 많이 오기에 겨울에는 보스턴으로 비행기를 타는 여행은 위험부담이 있는 것과 똑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사도바울이 앞을 내다보는 능력 때문이기 보다는 여기서는 상식적인 견해로 말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 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는데 많은 불편이 있으니 그 곳을 떠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물론 항해가 어려울 것도 상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항해를 시작했는데 뜻밖에 순풍이 불어옵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은 것을 잘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14절입니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아니나 다를까 광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풍랑에 끌려 배는 헤매기 시작합니다. 이튿날 짐을 바다에 버립니다. 그것도 부족하니 배의 기구를 버립니다. 20절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저희가 이번에 이틀 동안 Nemo 폭풍에 갇혀 있었던 것도 힘들었는데 이들은 수일간 그것도 배에서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드디어 모두 포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 굶주리고 허기진 채 소망을 잃고 있었을 때입니다. 21절입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상식을 따르는 것이다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예를 들기를 배에다가 적정량 보다 더 많은 짐을 싣는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정말로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상식과 과학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상식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상식을 거부하는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늦었습니다. 일은 벌어졌습니다. 백부장은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면서 자신의 미련함을 통탄해 했을 것입니다. 선주와 선장도 매한 가지입니다.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자기들도 죽고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욕심이 상식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번 기회만 무사히 지나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미련한 짓은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은 보장이 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할까요?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지푸라기도 잡을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부장과 모든 사람에게 사도바울은 더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인지 계속 말씀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사도바울은 두 가지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는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였는데 필히 상소가 이루어져서 가이사 앞에 설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항해하는 모든 자를 다 자신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곧 모두가 살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약속을 받은 사도바울이 끝으로 외칩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리고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한듯 한 가지 예언을 합니다. 26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오늘 본문 다음 구절들은 바로 사도바울의 예언을 증명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44절 말씀만 봉독해 드리면,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섬에 도착한 모든 사람들은 두 가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과학의 증언을 무시했을 때의 결과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과학의 증언자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아울러 사도바울은 과학의 세계를 무시했던 백부장에게 과학의 세계 위에 있는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언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과학과 상식의 세계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으로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세계를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곧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살아도 인생의 폭풍을 맞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도 풍랑이 오지만 우리의 잘못 없이도 풍랑이 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풍랑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더 놀라운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Leonard Cohen이라는 분이 성자(Saint)에 대해서 아주 멋진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성자는 혼동된 세상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삶을 사는 자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생의 풍랑 위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개 우리는 ‘성자’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모습의 사람으로 연상이 되지 않습니까? 항상 좋은 말만 하고 화도 안내고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등등….특히 풍랑이 오면 풍랑을 잠잠케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바로 성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셨죠? 배에서 주무시고 계실 때 풍랑이 불었습니다. 제자들이 겁이 나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홀로 바다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풍랑이 일어서 제자들이 힘들게 배를 저어가고 있었을 때입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신 후 배에 오르니 풍랑이 멈추었습니다. 곧 예수님은 풍랑을 멈추게도 하시고 풍랑 위를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걷기도 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두 가지 모습의 소유자이십니다. 첫 번째로는 잠꾸러기의 모습입니다. 제자들과 배를 타시고 혼자서 주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풍랑 위를 걸어가십니다. 곧 장난꾸러기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물구덩이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비싼 신발이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일부러 물구덩이에서 물을 튀긴 후 지나갑니다. 엄마는 속상해 하죠. 예수님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바로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풍랑 위를 밸런스를 잡고 걷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실로 예수님을 닮은 성자가 된 것입니다.
영화 Titanic을 많은 분들이 보셨을 줄 압니다. Titanic이 침몰한 이유도 과학과 상식을 어겼기 때문이죠. Titanic은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구명보트도 규정에 맞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Titanic은 침몰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목사님이 나옵니다. 기도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결국 배와 함께 가라앉습니다.
곧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기도해 주는 모습 너무도 고귀합니다. 정말로 성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우리를 향하여 보여주고 있는 성자의 모습은 다른 모습입니다. 풍랑 위에서 모든 사람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사순절을 정하고 이 기간 참회와 절제/금식과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죄의 폭풍 가운데서도 주무시고 계셨던 주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죄의 폭풍 위에서 춤추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잠꾸러기 주님, 장난꾸러기 주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자들은 인생의 파도 가운데서도 춤을 추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웃의 죄 때문에, 때로는 조상의 죄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곧 죄로 인한 풍랑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사순절 기간 우리는 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죄를 주님께 내려놓을 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희는 안심하라.”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풍랑을 잔잔케 하는 자로 삼으십니다. 풍랑을 발판 삼아 세상을 뛰어 넘는 자들로 삼으십니다. 우리를 장난꾸러기로 삼으십니다.
사순절 기간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리고 부활절을 맞이함과 더불어 잠꾸러기, 장난꾸러기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의 찬송가 가사의 저자 Toplady가 잠시 후 함께 부를 ‘고요한 바다로’를 지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Toplady가 이러한 찬송을 부를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풍랑 가운데서 십자가의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안심하라.”
그래서 인생을 고요한 바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종 풍랑이 몰아 칠 때면 이 풍랑을 더 빨리 가기 위한 최선의 선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노래한 것입니다.
“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그는 장난꾸러기가 된 것입니다. 그는 성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풍랑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너희는 안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