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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여, 안심하라.

날짜 : 2012.11.1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그네여, 안심하라.
성경본문 : 사도행전 18:1-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1111.wmv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전등회사의 엔지니어였습니다. 자동차 회사의 엔지니어가 아니라 전등회사의 엔지니어였습니다. 하루에 10시간이나 일하면서 한 달에 고작 11달러밖에 벌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현재와 비교한다면 $200 이 조금 넘습니다. 그 당시와 지금이 약 20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도 고작 $200 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헨리는 퇴근 후에 뒤뜰의 낡은 창고에서 마차를 좀 더 빨리 달리게 할 수 있는 엔진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웃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헨리의 노력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오직 부인만이 조용히 남편을 도왔습니다.
저녁이 되면 부인은 전등불빛을 이리저리 옮겨주며 남편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 여름이면 부채를 부쳐 벌레를 쫓아주기도 했습니다. 헨리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실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에 헨리는 부인을 자신의 ‘신도’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낡은 작업실에서 꼬박 3년을 보낸 1893년 어느 날 헨리의 보물이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이웃들은 멍청한 헨리와 부인이 ‘말이 끌지 않는 마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지자 그야말로 기겁을 했습니다. 이 마차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50년 후, ‘자동차의 왕’이 된 헨리 포드는 인터뷰 중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글쎄요. 뭘 하든 상관없어요. 부인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요.”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오신 분들과 걸어오신 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오셨을 줄 압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삶의 온갖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 장본인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커플이었습니다. 헨리 포드 부부였습니다.

오늘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부부청년부 회원뿐 아니라 모든 교우님 가정이 이처럼 훌륭한 삶의 열매를 맺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멋진 자취를 이 땅에 남기는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부인이고 아굴라는 남편입니다. 제가 부인 이름 곧 브리스길라의 이름을 먼저 말씀드렸는데 그 이유는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이 장면은 바울의 세계 제 2차 선교 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제 2차 선교 여행은 실라와 함께 떠납니다. 한편 디모데가 나중에 이 여행에 동참합니다. 곧 제2차 선교여행은 두 사람이 떠났지만 곧 세 사람이 됩니다. 세 사람이 함께 선교를 하니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울과 그 둘은 베뢰아에서 헤어집니다. 사도바울이 먼저 아덴으로 떠납니다. 아덴에서 혼자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오른팔 왼팔 없이 혼자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쳐 있었겠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굴라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혼자 고린도에 왔는데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인데 로마에서 살다가 유대인들 추방 명령이 있어서 피해서 고린도로 온 사람입니다. 아굴라가 바울을 맞이합니다. 둘 사이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아굴라의 첫 번째 공통점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당연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3절에 나오는데,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이 당시는 요즘처럼 wire로 돈을 부쳐줄 수도 없는 때이니 선교사들은 자기의 생활비는 때로는 자기가 만들곤 했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아굴라의 사업체를 돕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굴라와는 아주 쉽게 친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나그네로 왔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가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실라와 디모데를 다른 도시에 남겨두고 혼자 고린도에 도착했는데 자기를 맞이할 가정을 만났으니 말입니다. 너무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자들끼리 마음이 맞는 다해도 일이 됩니까? 부인의 생각과도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부인의 이름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두 사람 중 부인의 이름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그렇고 두 부부 이름을 쓸 때 항상 부인의 이름을 먼저 썼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6:3에 부인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나오는 18: 26에서 부인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인의 이름을 먼저 썼을까요? 그 때부터 여성의 인권을 위한 선구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굴라는 로마시민의 노예였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브리스길라는 부유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눈이 마주쳤는지 몰라도 결국에는 아주 잘 맺어진 부부가 되어 갑니다. 아굴라는 노예 신분으로 일을 많이 했기에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부자였기 때문에 돈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사업을 크게 할수 있었는데 곧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했습니다. 사업도 한 군데가 아니라 여기 저기 벌려 놓았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쫓겨나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남편의 기술과 부인의 자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부인의 사회적 위치가 높았기에 부인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곤 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계층의 차이 또 다른 하나는 성의 차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입니다. 그 이외의 차이들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결혼도 계층이 비슷해야 한다고…. 물론 맞는 말이죠. 그러나 계층이 비슷할수록 안정은 되지만 사회 공헌도는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 많이 다른 것을 극복한 만큼 놀라운 일을 해내는 가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커플은 이러한 차이를 멋지게 승화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나그네인 사도바울도 기쁘게 맞이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들로 인해서 사도바울은 실라와 디모데 없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대개 저희 교우님들 보면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부부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죠?……? 쓸데없는 걱정일줄 압니다.
가정 상담가 딘 마틴(Dean Martin)이 아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합니까?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난 아내들은 이 질문에 98%가 그렇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제 2년이 지났습니다. 거의 절반인 56%의 아내들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아내들은…? 부청식구들 중에 10년이 되신 분들 계시겠죠? 몇 %? 6%만 자신의 남편이 좋은 남자라고 했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 1, 2부가 있는데, 청년1부 회원들의 소원은 2부를 거치지 않고 부청으로 직접 가는 거라고 하던데 이제 좀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네요.
이제 세월이 흘러 20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몇 %나 남편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할까요? 10년 전에는 6%였는데…, 95%로 껑충 뛰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10년 만에 6%가 됩니까? 서로 계층이 비슷한 사람들이 만났지만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힘들게 힘들게 다른 것으로 인한 아픔을 견디어 냅니다. 둘도 없는 짝이 되어 갑니다. 결국 부부가 상대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 뉴저지 어느 교회에 수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교회에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는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민 신학에 대해서 좀 지도편달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제 설교집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부인도 목사님인데 한국에서 교육목사님으로 수고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오셨고 학교 다니실 때 마음이 맞았는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공부를 이유로 얼마 동안 떨어져서 지낸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 후 제가 한국 장로회신학대학원에 가서 이민신학 세미나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식사자리에서 그 때 만난 목사님의 안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쯤 되면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나와서 어느 신학교에든 가르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자리한 모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안타까워하시면서 학위도 마치지 못했고 더 안타까운 것은 서로 갈라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적 색깔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비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가운데서 많은 차이를 느꼈는가 봅니다. 결국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6%의 고비를 넘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이 재미있는 책을 지었습니다. 제목은 ‘여자는 서운하고 남자는 억울하다.’ 여자는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서운해 하고 남자는 억울해 한다는 것입니다. 서운함과 억울함이 잘 못 엇갈려질 때 점점 어렵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남자는 직접화법을 여자들은 간접화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직설적인 반면에 여자들은 둥글둥글한 표현을 한다는 것입니다.
커플이 힘들게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잠깐 쉬고 싶지 않아?” 남자가 대답합니다. “아니.” 그리고 묵묵히 걷습니다. 이 때 여자는 화가 납니다. 자기가 쉬고 싶어 말한 것인데 남자는 자기를 생각해서 물은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이런 사소한 일들로 인해서 서운해 하고 억울해 합니다. 10년 만에 6%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편 질문해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남녀를 다르게 만드셨는가를…. 사실 잘 알지 않습니까? 어느 분의 주장처럼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 온 것을…. 하나님께서 실수로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놀라운 섭리가 있다고 봅니다.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 온 존재인 냥 다르게 만드신 깊은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조금 말을 바꾸면 남자는 화성에서 온 나그네로, 여성은 금성에서 온 나그네로 만드신 것 같습니다. 곧 우리가 상대방을 신비한 별에서 온 나그네로 생각할 때 우리들의 삶은 훨씬 달라질 줄로 압니다.
헨리 포드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주위 사람들은 헨리 포드를 멍청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달랐습니다. 부인은 헨리를 신비한 별에서 온 나그네로 여겼습니다. 한 달에 $200남짓의 돈을 벌어 오면서도 two job 뛸 생각은 안하고 창고에서 이상한 일에만 열중할 때 도리어 벌레도 내 쫓아 주면서 그를 신비하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자동차의 왕으로 남편을 만들었고 자신은 그의 부인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인은 서운해 하기 일쑤고 남편은 억울해 하기 일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계층이 다르니 서운함과 억울해 함은 언제나 이들에게는 시한폭탄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겠죠.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에 있는 신비한 별을 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를 신비한 별에서 온 나그네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겼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던 중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령하니 그들은 나그네가 되어서 로마를 떠납니다. 나그네의 아픔을 체험합니다. 감사한 것은 그들은 기술과 돈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아마 나그네의 고통을 아는 이들은 앞으로 나그네를 위하여 살겠다는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 때 나그네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나그네 바울을 가정에 맞이합니다. 이 때 이 부부가 바울이 이처럼 위대한 인물인 것을 알았을까요? 전혀…! 반면 그들은 바울을 별나라에서 온 신비한 나그네로 맞이합니다.
결국 이들은 세계 선교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가정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부부 간에 서로를 신비한 나그네로 맞이한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을 신비한 나그네로 맞이한 것입니다. 나그네를 통하여 아니 나그네를 영접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서운함과 남편의 억울함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신비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

부부청년 교우 여러분, 부부 서로 서로를 신비한 별에서 온 나그네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끝내지 마시고 처음 보는 이웃을 소중한 나그네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여러분의 가정에 바울과 같은 분을 초대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 전 한국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신 김용기 장로님의 이야기를 접해 보았습니다. 그 분의 기도실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기도실에서 조국을 위해 기도했고 기도할 때, “조국이여 안심하라. 내가 기도한다.” 는 생각으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언젠가 다시 김 장로님의 결단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부부 청년회 헌신예배를 맞이하여 부청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결단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그네여, 안심하라.”
배우자를 위해서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여, 안심하라.”
이곳에 찾아오시는 이웃들을 생각하시며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여, 안심하라.”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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