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2.09.16
예배명 : 제직임직식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신앙의 삼중주
성경본문 : 데살로니가 전서 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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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침묵의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5년에 한 번씩만 말을 하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수도원입니다. 5년이 지난 후 수도원장이 어느 수도사에게 묻습니다.
“올 해는 무슨 말을 하려하오?”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국이 좀 더 따뜻하게 덥혀져서 나오면 좋겠습니다.” 수도원장은 고맙다고 대답합니다. 다시 5년이 흘렀습니다.
“올 해는 무슨 말을 하려하오?”
“의자의 쿠션이 자꾸 헐어갑니다. 새 쿠션으로 바꿔주시면 좋겠습니다.”
수도원장은 고맙다고 또 대답합니다. 다시 5년이 흘렀습니다.
“올 해는 무슨 말을 하려하오?”
“더 이상 수도사들이 하지 말고 청소부를 고용해서 청소를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수도원장은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왜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15년 동안 당신은 불평하고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있습니다.”
15년을 수도원에서 보냈다면 거의 성인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5년 만에 한 번씩 주어지는 기회를 세 번씩이나 불평으로 일관했던 수도사의 웃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줄 압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아픈 면을 찌르는 이야기인줄 압니다. 우리는 사실 수도원에 안 들어갔다 뿐이지 이 땅위에 삶 자체가 바로 수도원의 삶입니다. 15년간 신앙생활 후 이런 핀잔을 들었고 생각해 봅시다.
“15년 동안 당신은 불평하고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직 안수 및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사람의 손으로 인해 선출되었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을 빌어서 여러분을 선출하셨고 또 임직시켜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임직시키시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여러분의 입에서 그동안 불평의 소리를 듣지 못하셨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임직 후에는 불평의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만일 늘 불평을 달고 다니셨어도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는 앞으로 불평의 사람에서 새로운 삶의 사람으로 변할 것을 아셨기 때문일 줄 압니다.
그러면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크리스천들에게 특히 오늘 임직 받으시는 제직 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간단히 줄이면, 사도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아울러 형제들끼리 화목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순종, 형제들끼리는 화목. 곧 순종과 화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잘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습관이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위의 권위를 인정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이 말씀은 더 이상 낡은 그래서 안 지켜도 되는 말씀일까요? 만일 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를 더 이상 공경 안 해도 된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잘 아시는 성 프란시스가 건강의 문제로 지도자의 자리를 내 놓아야 했습니다. 자기의 제자가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느 날 지시 사항이 내려 왔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항이 내려 왔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다른 제자들이 분노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불순종할 것을 프란시스에게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토록 위대한 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명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단지 남은 것은 그가 자기의 제자에게도 순종했다는 그 사실만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노회 어느 장로님한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노회 COM(목회위원회)소속 장로라고 하면서 3년에 한번 교회를 방문하게 되어 있는데 조만간 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본 교회에 시무한 후 벌써 18년이 되었으니 그동안 여러 차례 COM위원들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귀찮습니다. 하루 시간을 내야하고, 그렇다고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속으로 ‘왜 벌써 하나? 5년 만에 해도 되는데’ 생각하면서 좀 꾀를 내고 싶었습니다. ‘미룰 방도는 없는가?’
그런데 저의 속마음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알지 않느냐? 상부기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결국 11월 당회 때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어긋나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나 위의 권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안 맞아도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울러 이 순종의 힘으로 성도님들과는 화목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사도바울은 두 번째 아주 어려운 과제를 줍니다.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오래 참고 항상 선을 행하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이면에 대해서는 제가 다시 말씀 안 드려도 너무도 잘 아실 줄 압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들은 모두 장미가 아닙니까? 예쁜 꽃도 피지만 가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꽃이라도 항상 펴 있으면 괜찮죠. 꽃은 떨어져도 가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관계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결국 신앙생활이란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형제들에게는 화목을 넘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결국 자칫하다가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평, 불평, 또 불평. 지도자를 보면서 불평, 성도를 보면서 불평.
이처럼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불평, 불평, 또 불평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이 모든 것을 사도바울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교우 여러분,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가 왜 불평을 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서 불평합니다. 제가 노회 이야기를 했으니 그 것에 대해 언급하면 제가 불평하는 이유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삼년에 한번 COM 대표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래서 만일 제가 하나님께 “삼년에 한번 대표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질문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 이런 질문 하나님께 드리기는 뭐하고 사도바울에게 드린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네 질문 내용도 이해 못한다. 나는 장로교도 모르고, COM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마.” 사실 사도바울 때는 장로교가 없었으니 알리가 없겠죠. 사도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새로 임직 받으시는 제직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시죠? 아주 간단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에게 불평거리는 계속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불평거리는 늘 사라집니다. 한편 끝까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기뻐했던 그 순간, 기도했던 그 내용, 감사한 제목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젠가 우리들에게 다시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삶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2년 전에 장모님이 한국에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 살게 되셨습니다. 집 앞에 잔디밭이 있는데 장모님이 많은 시간을 잔디밭에서 보내셨습니다. 앞뜰에 큰 나무가 두 그루 있었습니다. 장모님은 그 나무를 제거하길 원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더 많은 잔디를 돌보시길 원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잔디 깎는 것은 아들 준석이가 하고 있고 잔디 관리를 장모님이 하시고 계시니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나무를 자르고 잔디밭을 넓혔습니다.
올 해초 장모님이 못 오시게 되었습니다. 계속 잔디를 깎는 일은 준석이가 맡고 있지만 저에게 남은 몫이 떨어졌습니다. 잔디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소위 말해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잡초제거제를 뿌리는 것도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저희 교회에 ‘정평환’이 있지 않습니까? 정의 평화 환경 위원회. 잡초제거제는 환경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집사람과 결정을 내렸습니다. 잡초제거제는 안 뿌린다! 그렇게 되면 잡초제거제가 할 일을 누군가가 해야 합니다. 사람이 해야 합니다. 집사람과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집사람도 장모님 간호하러 많은 시간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불평 불평 불평…?
어느 날입니다. 제가 잡초제거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한 마디를 던집니다.
“You never win.”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열심히 하면 잡초를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자 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자기 친구들을 제거했다고 화가 나는지 더 마구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잡초 뽑으러 나갈 때마다 늘 들리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You never win.”
그러나 아직도 저를 포기하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바울 덕분입니다. 저는 속으로 크게 외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한갓 잡초들에게 질 때도 기뻐하라는 것 아닙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일을 하고 나도 아무 흔적이 없는 것 같아도 기뻐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요즘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임합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제 마음껏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게 됩니다. 이 땅을 제가 관리하고 있다니 얼마나 기쁩니까? 아울러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이 잡초가 풍성하게 자라듯이 우리 가정도 풍성하게 하소서. 우리 교회도 풍성하게 하소서.” 아주 기도가 구체적입니다. “하나님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 보시죠. 이처럼 저희 교회도 저희 집도 풍성하게 해주세요.” 끝으로 감사가 나옵니다. “겨울이 오면 나를 그토록 괴롭히는 이 잡초들이 다 죽으리라.” 겨울이 오기 전에는 잡초들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I win.”
교우 여러분, 전 세계는 지금 불평 합창단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가사는, “불평, 불평, 또 불평.” 이럴수록 신앙의 삼중주를 연주할 분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신앙의 삼중주의 가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연주를 모범적으로 잘 하실 분들을 오늘 안수 임직시키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Chesterton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천사가 날수 있는 이유는 천사는 자기를 아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를 중하게 무겁게 여기면 날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볍게 여기기에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위트가 넘치는 말입니다. 자기를 가볍게 여기는 삶은 신앙의 삼중주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