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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으로

날짜 : 2012.07.2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13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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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장영희 교수님이 계십니다. 사실 제가 두 세번 그 분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그 분은 어릴 때 소아마비로 신체 장애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모든 역경을 이기고 우뚝 서서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본인의 모교인 서강대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모든 학교가 저의 신체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을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공부할 때 가장 행복한데, 내 겨드랑이 밑에도 날개가 있어서 날고 싶은데, 세상은 날개를 펼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좀 살려 달라고 매달려도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천덕꾸러기이고, 삶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내 사랑은 짝사랑일 뿐이구나. 하지만 난 열심히 삶을 짝사랑하자.’”
장영희 교수님은 삶은 자기를 내팽개치곤 하였지만 그 삶을 짝사랑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끝내 최고의 삶을 누리신 분이 되었습니다.
사실 짝사랑은 사랑을 실패한 사람들이 하는 실패자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 교수님은 짝사랑의 개념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짝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사랑은 짝사랑임을, 아니면 짝사랑에서 시작됨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멋진 표현을 합니다.
“밑지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게 비록 짝사랑일지라도…. 그러니 당신의 청춘을 바쳐 인간을, 문학을, 신을 사랑하십시오! 짝사랑이야말로 내 앞의 벽을 허물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소중한 경험입니다.”

짝 사랑을 많이 하신 분들, 지금도 짝사랑 가운데 계신 분들 힘을 내시고 더 큰 세상으로 멋지게 돌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장영희 교수님만 세상을 짝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또 다른 멋진 짝사랑의 주인공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되었는지 장 영희 교수님의 통찰력을 빌리면, 그도 짝사랑의 대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허나 오늘 본문 말씀은 얼뜻 읽으면 짝사랑의 고백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사도바울이 꽤나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뭔가 따질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저 생각을 하셔야 할 것은 고린도후서가 13장인데 본문은 13장입니다. 곧 편지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뭔가 크게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두세 증인을 대동해서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 다음 2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꽤나 흥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뭔가 고린도 교인들이 크게 잘 못했나 봅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짱을 놓습니다.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한 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몇 군데 사도바울이 받은 상처를 알려주는 귀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10: 10절 말씀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그는 학자는 되어도, 사도는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반응합니다. 11: 5절 말씀입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좋게 보면 자존감이지만 또 이를 다르게 보면 교만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과대…. 하여튼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표현을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 안하는 교인들에게 분노하고 있고 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번에 가면 두세 증인을 두고 뒤에서 나쁜 말한 사람들을 잡아내서 혼내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자기를 무시하는 고린도 교우들을 사도바울은 어떻게 대합니까? 계속해서 3절 후반절과 4절 말씀입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한 마디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나 우리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비방하는 고린도 교우들이지만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 안에 사탄이 역사한다고 말하고 싶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니까요. 대신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이와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이는 같은 주님이시고 이 주님이 무척 강하게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마치 사탄이 역사해서 저런다고 하며 스스로 위로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전혀 그런 내색을 안 합니다. 5절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큰 확신을 밝히는데,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말하기를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당신들 안에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짝사랑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자기의 짝사랑의 대상에게 마음의 소원을 7절에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최고의 짝사랑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당신들은 언제나 선을 행하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짝사랑의 고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8, 9절 말씀에서 짝사랑의 하이라이트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자기는 약해질지라도 고린도 교우들은 강해질 것을 바라고 있고 끝내 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짝사랑의 진수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흐름은, 처음에는 당장 쫓아가서 자기를 모함한 모든 사람들을 끌어내어 주님의 이름으로 혼내줄 것 같았지만, 사실 고린도 교우들의 최고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들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또한 자기와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님이 자기를 비방하는 자와 또 자기 안에 계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들을 짝사랑하고야만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감사하는 회중 II’라는 제목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배를 끝나고 나가는데 어느 교우님이 앞으로 다섯번 비슷한 설교를 해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가셨습니다. 지난 주 교회 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말의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라는 야고보서의 본문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독과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반면 감사의 말은 이 독을 도리어 치료제로 바꿀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우님은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많은 말의 상처를 받은 것을 뜻하는 듯 들렸습니다. 이런 설교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보에 그 다음 주 설교 본문과 제목이 나갑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오늘 이 본문은 그 교우님의 말씀을 듣고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이미 전 금요일에 정해서 주보에 실린 것입니다. 지난 주는 야고보를 통해서 그가 보는 교회와 말의 상처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직접 체험한 말의 상처와 그것에 대해 대처한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큰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미국 텔레비젼을 보면 서로의 약점을 헐뜻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잠시 후 같은 현상이 한국에서도 벌어질줄 압니다.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말의 화살이 쏘아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크리스챤은 더욱 정신을 차리고 정치인들이 쏘는 화살에 동참해서는 안 될줄 압니다. 도리어 찬송과 감사의 말로 그들이 쏘는 말의 독을 치료제로 변질시켜야 할줄 압니다. 앞으로 정치인들이 쏟아 놓을 그 독들을 치료제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찬송과 감사의 말을 훈련해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의 이웃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사도바울은 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이 그 큰 상처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주님이 거하듯이 그들 안에도 같은 주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이웃 안에 있는 깊숙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겉 모습이 아니라 속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 안에 거하신 분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속 모습을 보기에 짝사랑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웃 안에 있는 아름다운 속 모습을 보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짝사랑의 주인공이 되고야 맙니다.

정글북의 저자 루디아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네가 세상을 보고 미소 지으면 세상은 너를 보고 함박웃음 짓고, 네가 세상을 보고 찡그리면 세상은 너에게 화를 낼 것이다.”
곧 키플링은 어떠한 세상이라도 짝사랑하라는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때 언젠가 세상도 함박웃음을 선사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았나 봅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짝사랑의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아마 이런 질문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네가 짝사랑한 사람들은 몇명이었느냐?”
영어로 친구들을 ‘circle of friends’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짝사랑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우리들에게 바로 이 circle of friends가 소중합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circle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짝사랑하는 친구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바로 이 그룹의 친구들이 얼마나 있었냐고 묻지 않으실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보는 사람마다 날 좋아해서 짝사랑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눈만 뜨면 우리가 짝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모임에 들어가 10명의 사람을 만난다면 그 중 6명은 무조건 우리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60%사람들이 첫 인상으로 우리를 안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도 한 역할을 감당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60%의 경우 이웃을 첫 인상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죠? 짝사랑하는 겁니다. 이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어 갑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이런 경우를 많이 당했던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를 공격하는 모든 말에 답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내가 읽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공격받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만일 그 결과가 좋다면 나를 비난하는 말은 무익해질 것이다. 반대로 결과가 나쁘면 수많은 천사가 나의 정당함을 증언해 준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링컨도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확신을 갖고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 간 사람입니다. 그는 이웃을 짝사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흑인노예해방을 이룬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닐까요?
사도바울도 당신의 신념대로 산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짝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당신을 짝사랑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짝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이요,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에게 대한 우리의 복수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 짝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라야만 할 수 있습니다. 곧 짝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짝사랑의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짝사랑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그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크고 놀라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짝사랑하셨습니다. 짝사랑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이 축복을 함께 누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우화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새가 하나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동물들은 다 특별한 무기가 있습니다. 뱀은 독을 갖고 있고,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곰곰이 생각하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에게 날개를 주셨고 새는 매일 그 날개를 등에 메고 힘겹게 걸어 다녔습니다. ‘내게 좋은 걸 주신다더니 짐만 주셨구나.’ 실망한 새는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날개를 달고 다니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차라리 도로 떼어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야, 네가 소중하고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구나. 날개를 퍼덕여서 하늘로 날아 올라라. 높은 곳에서 만나는 자유와 희망을 가져라.”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날개는 사랑이 아닐까요? 더 정확히 말해서 짝사랑이 아닐까요? 짝사랑은 처음에는 짐으로 느껴지지만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날게하는 힘이 아닐까요?
세상을 짝 사랑하십시다. 이웃을 짝 사랑하십시다. 교회를 짝사랑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짝사랑할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짝사랑은 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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