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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날짜 : 2011.10.2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3-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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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차 세계대전 중 어느 독일군 병사가 포위망 속에서 목사인 고향의 아버지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한 장의 글입니다.
“아버지는 목사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진실해진다고 평소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탄피와 부서진 벽돌 그리고 죽은 전우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 한복판에 갇혀 있습니다. 공포와 굶주림의 창자를 옭죄고 폭격기가 쉴 새 없이 포탄을 퍼붓는 스탈린그라드의 무너진 담벽 아래서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여기 스탈린그라드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서재, 교회의 종탑, 촛불 밝히고 찬송 부르는 예배당 말고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스탈린그라드에는 분명 하나님이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없어서 절규하고 있는 한 청년의 고백입니다. 이 청년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합니다. 전쟁 포화 가운데 살지는 않지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해 아우성치는 영혼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Swinton)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라슈 공동체에 방문하였습니다. 라슈 공동체는 정신/신체 장애인들이 사는 공동체입니다. 스윈톤 교수님이 한 장애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장애인은 심장 검사를 위해 파리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왔었습니다.
“오늘 뭐했어?”
“파리에 갔다 왔어요.”
“거기서 뭐했어?”
“의사를 만났어요.”
“의사가 뭐 했어?”
“의사가 내 심장 안을 들여다 보았어요.”
“의사가 무엇을 보았나?”
“의사는 예수님을 보았어요.”
“예수님은 뭐하고 계셨지?”
“예수님은 쉬고 계셨어요.”

한 청년은 전쟁 포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한 청년은 예수님이 자기의 심장에서 쉬고 계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청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자기의 심장에서 쉬고 계시다고 느끼는 청년입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는 장애인 청년처럼 고백하길 원할 줄 압니다. 단지 장애인이 되지 않은채 말입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할 때 늘 주님께서 우리들 심장에서 쉬고 계심을 느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러한 삶은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8절이 눈에 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자신의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처럼 되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증인이 되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주 자주 자기의 심장에 예수님이 쉬시고 계신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은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어떻게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 자가 되는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지 이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첫 번째가 더 궁금하지만 두 번째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오늘 본문 내용과 같은 편지를 쓰는 마음의 소유자들일줄 압니다. 먼저 3-6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쁨으로 기도하고 있고 또한 빌립보 교인들의 미래를 위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 분의 두 가지 특징을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이웃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첫 번째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의무로 중보의 기도를 드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기쁨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확신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일을 위한 확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확신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영락교회청년회에 속해서 섬기다가 미국으로 떠나오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교우님이 저에게 와서 말씀하여 주었습니다.
“형제님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확신에 차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귀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웃을 위한 확신이 소중함을 저는 이 분을 통해서 많이 체험해 보았습니다. 이웃을 향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곧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 사람은 이웃을 위해 기쁨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웃의 미래를 위한 놀라운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면 좀 암담한 느낌도 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많은 경우 내 자신을 위해서도 기쁨의 기도가 나오지 않고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큰 확신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다. 다음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코리 텐 붐을 잘 아실줄 압니다.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붙잡혀서 오랜 시간 유대인 감옥에 갇혀서 지낸 분입니다. 나중에 석방된 후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감옥에 다니면서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뉴질랜드 감옥에 가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어느 감옥수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에 나오는 세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울이고 또 한 사람이 모세이고 또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들을 영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인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이나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고, 모세는 애굽인을 죽였고, 다윗은 장군 우리아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 세 사람 모두 살인자였지만 후에는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사도바울이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9-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살인자의 심장에 예수님이 쉬고 계시니 이웃을 위해서 이처럼 놀라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곧 우리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인자가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살인자가 자기 힘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살인자는 먼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받은 사랑이 살인자를 이웃을 위해 끝없이 기도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저희 집 앞 집에 까만 고양이가 살고 있습니다. 원래는 회색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까만 고양이가 살고 있는데, 사실 이 고양이는 집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까만 고양이는 alley cat(도둑 고양이),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며칠째 길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앞집 주인이 이 고양이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집 밖 차고 앞에 놓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차고 앞을 자기 집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은 추어지지 않아서 다행인데 추워지면 집 주인이 어떻게 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이젠 까만 개가 그 집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 주인이 잔듸를 깎고 있는데 계속 옆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분명히 강아지입니다. 고양이는 시끄러운 소리는 질색을 하고 도망갑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바로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가 강아지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 시 후 집 주인이 뒷마당을 가니깐 고양이는 뒷마당으로 뛰어 갑니다. 얼핏 봐서는 강아지 달음질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양이였습니다.
이 고양이는 버려진 고양이었는데 자기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사람을 만나니 완전히 변했습니다. 강아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집 주인만 보면 너무 좋아합니다. 물론 멍멍 대지는 않지만 다른 면은 강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양이가 강아지가 된다는 것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구요. 사랑이 고양이를 강아지로 바꾸어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양이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살인자가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살인자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편지를 누가 쓸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편지를 받아 본 사람들이 이러한 멋진 편지를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종종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되었지만 아나니아가 직접 찾아가서 기도할 때 눈이 멀었던 바울이 눈이 띄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심장에서 편히 쉬게 된 것입니다. 살인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각자의 경험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처럼 다메섹의 경험은 아니지만…. 아울러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입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는 자들은 이 주님의 음성을 늘 듣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사랑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성도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사랑의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어제 한국 가요의 밤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어린이 예배실을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웠습니다. 다른 교회 아니면 성당을 다니시는 분들이 많이 오셨고, 아직 주님을 안 믿는 분들도 물론 꽤 오셨습니다. 저는 제일 뒷 자리에 앉아서 종종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직 주님의 사랑을 모르시는 분들이 그 사랑을 접하게 하소서.”
어제 수고하여 주신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제 한국 가요의 밤은 우리가 이곳 한인들을 향한 사랑의 편지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소유한 교우 여러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큰 확신을 안고 드리십니다. 이들 모두 언젠가 사랑의 편지를 쓰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다. 그 때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자들이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언젠가 강아지와 고양이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Dog & Cat Theology를 지은 저자들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아지는 주인을 주인으로 모시지만 고양이는 주인을 일꾼으로 생각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주제로 Dog & Cat Theology 라는 책을 펴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오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책에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루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갔는데, 강아지가 아픈지 쭈구리고 앉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빨리 나서 집에 갈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갑자기 기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새롭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 강아지가 아픕니다. 당신이 멋지게 창조하신 이 작은 몸, 당신의 영광이 넘치도록 가득한 이 작은 몸이 더 이상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소서.”
순간 강아지는 볼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강아지는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주인은 강아지를 위해 최고의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주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의 강아지를 위해서 최고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하여는 그렇지 못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웃을 위해 서로를 위해 이 강아지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도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아닐까요?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심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기쁨의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웃의 미래를 향한 놀라운 확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하십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기쁨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이웃의 미래에 대해서 큰 확신을 안고 말입니다. 많은 이웃은 아닐지라도, 한 사람부터 시작 하십시다. 한 이웃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기도드리십시다. 그분에 미래에 대한 큰 확신의 선물도 함께 드리십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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