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10.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주 안에서 빛이라
성경본문 : 에베소서 5장 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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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나라 왕이 책을 읽고 있는데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노인이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읽으시는 책이 어떤 책이신지요?”
“성인의 말씀이라네.”
“성인이 뱉어 놓은 찌꺼기를 읽고 계시는군요.”
“네 이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어째서 이 책이 성인이 뱉어놓은 찌꺼기란 말이냐?”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수레바퀴깎는 일밖에 없으니 이 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레바퀴 깎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바퀴의 굴대구멍을 깎는 일입니다. 그게 왜 어려운고 하니, 너무 넓게 깎아 놓으면 굴대를 끼우기는 끼워도 헐렁해서 바퀴가 심하게 요동하고, 너무 좁게 깎아놓으면 굴대가 빡빡해서 못쓰기 때문이지요. 저는 마음먹은 일을 손으로 잘할 수 있어서 크지도 작지도 않게 굴대 구멍을 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는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흔 살이 넘도록 이렇게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기술을 아들에게 전하지 못하듯이, 그 책을 쓰신 성인도 전하고 싶어 하던 것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책에 씌어 있는 것도 성인의 찌꺼기가 아닌지요?”
얼핏 들으면 성인들이 남긴 이야기는 전혀 쓸모없는 쓰레기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그러한 의미보다는 더 깊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굴대구멍을 만들면서 매번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읽고 저도 많은 동감을 가졌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는데 처음 16년 전에 본 교회에 와서 설교할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16년 전에는 손으로 써서 그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섰습니다. 요즘 가끔 그 때 원고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어떤 곳은 빨간색으로 지우기도 하고 또 지운 것을 다시 안 지웠다고 표시하기도 하고, 1페이지 중간을 짤라서 3페이지에 풀로 붙여 넣기도 하고 난리 법석을 피운 자국이 역력합니다. 요즘은 컴퓨터로 하니 말끔하게 프린트를 해서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다른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썼던 것을 필요 없다고 해서 지워 버리면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다시 써야합니다. 전에는 빨간색으로 지웠던 것을 다시 사용한다고 표시하면 되는데 이제는 한번 지우면 되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꾀가 생겨서 지운 것을 주일설교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어딘가 저장해 둡니다.
지금처럼 요령이 없어서 저장하지 않을 때입니다. 썼던 것을 다시 써야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다시 쓴다고 다시 쓰지만 불과 5분전에 썼던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 아닙니다. 뭔가 다릅니다. 결코 5분전에 쓴 그 맛을 다시 낼 수 없는 안타까운 시간들을 컴퓨터를 쓰기 시작한 후 종종 가져 보았습니다.
곧 그 순간에 주어진 삶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노인도 이것을 체험하였나 봅니다. 이 노인은 성인의 글을 무시하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신비를 알려주려 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은 이처럼 신비스럽습니다. 어떤 글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한번 지나기면 도저히 반복될 수 없는 이 신비스러운 삶을 우리는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표현은 아주 간단합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빛이 되었으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조금 각색하면, 전에는 늘 이랫다 저랫다 변덕을 부리는 어두움으로 이 소중한 시간을 채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새까만 어두움 그제는 시꺼먼 어두움 그 전날은 우중중한 어두움, 이처럼 매일 줄기차게 변하는 어두움을 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처럼 매일 새로운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빛도 늘 똑 같은 색깔의 빛일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어제 비친 그 아름다운 빛은 또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오늘만 비출수 있는 신비스런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 비출 빛은 또 다른 빛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코스(Marcos)라는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4학년 논문을 쓰기 위하여 어떻게 사람의 몸이 바뀌는가를 주제로 공부했습니다. 자신의 팔 다리로부터 해서 머리칼까지 전신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공부했습니다. 일년 내내 이 공부를 했습니다.
결론은 인간은 늘 움직이는 여행자와 같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특히 인간의 세포는 대개 6개월 만에 한번쯤 바뀌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신경세포같이 평생 가는 세포도 있고 적혈구처럼 서너 달만 사는 세포도 있지만 평균 잡아서 1년에 두 번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곧 인간의 몸은 하루도 같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인간의 존재는 늘 변하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의 구조가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이 발하는 빛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몸이 일 년에 두 번 바뀐다면 우리가 비추는 빛도 1년에 최소한 두 가지의 큰 특성을 가진 빛을 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1년에 두 가지 멋진 이러한 빛을 발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대로 빛의 색깔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빨간색 내일은 파란색 우리 마음대로 정하면 될까요? 9절 말씀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보이는 빛에 삼원색이 있는 것 잘 아실줄 압니다. 세가지 색깔만 있으면 어떤 색도 만들어 내는 삼원색이 바로, 빨강 파랑 초록이 아닙니까? 이 세 가지 빛의 색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주홍이 되고 어떤 때는 노랑이 되고 어떤 때는 자주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삶의 빛에도 삼원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이 세가지가 잘 조화가 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멋진 빛의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빛은 늘 달라집니다. 새로운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매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때 새로운 빛의 열매를 늘 맺게 됩니다.
그러면 한 가지씩 짧게 살펴 볼까요? 먼저 착함의 빛입니다. 클레오파스(Cleophas)라는 수녀가 있었습니다. 이 수녀는 50년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수녀는 열정적인 선생일뿐 아니라 무척 학생들을 친절히 가르친 선생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은퇴 후 수녀는 클리브랜드의 가난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빵을 구워서 나누어 주는 사역을 합니다. 더 이상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자 양로원으로 들어갑니다. 양로원 원장이 어느날 복도에서 걸어가는 약한 수녀를 만났습니다. 얼굴에는 환한 빛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원장이 수녀에게 말합니다.
“수녀님, 당신의 미소는 빛이 나도록 아름답습니다.”
수녀가 대답합니다.
“나의 미소가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의 전부입니다.”
몇 년 후 원장님이 어느 모임에서 이 수녀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6명의 여인들이 원장님을 찾아 와서 수녀를 안다고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다 수녀의 제자였던 것입니다. 모두가 다 수녀가 소유한 착함의 빛을 맛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시간 이민사회에서 착함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것을 잠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hospitality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들은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의로움의 빛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매향리라는 마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매화 향기가 가득해 매향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서해안 경기도의 한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이 무려 50년간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사용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힘이 없는 이 마을 주민들은 50년간 폭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 올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로 인해서 2005년도에 드디어 폭격장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을 위해 싸우던 한 청년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한참 매향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리던 2000년 저는 대학생이었고 분노했고 매향리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며칠 전 문뜩 다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새 저는 군대도 갔다 오고 졸업도 했는데 매향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연약한 마을 주민들을 위해서 사회정의를 부르짖은 어느 청년의 모습을 읽어 볼수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후 어떤 빛을 발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멋진 빛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경우 억울한 일을 본인이 당하면 정의를 외치곤 합니다. 그런데 남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우리는 외면하기가 일쑤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를 위해 정의를 외칠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서 정의를 외칠 때 빛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오늘 2부 예배 후 환경 세미나가 있는데 환경문제도 바로 사회정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어떤 분이 환경문제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손들에게 이 땅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들의 자손들에게서 이 땅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이 땅의 참 주인은 우리들의 자녀와 자녀들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그들에게서 빌려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을 어떻게 사용해야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자녀와 자녀들의 자녀들이 현재 힘이 없다고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 땅을 잘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일줄 압니다.
세 번째로 진실함의 빛입니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선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국은 서울 시장을 놓고 여야가 격돌하고 있고 미국은 공화당이 대통령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선거전이 불꽃을 튀고 있습니다. 저는 선거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후보자들 토론회는 잘 보지 않습니다. 이유는 늘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공방전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과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 저렇게 다 큰 사람들이 유치하게 싸우느냐 알아보았더니, 실제로 남의 욕을 많이 한 사람이 선거에서는 이긴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선거는 이기기 위한 것이고 이기기 위해서는 남의 욕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남의 험담을 많이 한 사람들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4년간 아니면 8년간 정권을 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 험담은 평생 그들을 따라 다니리라 생각됩니다. 평생이 아니라 저 세상까지 따라갈 것이라는 생각도 감히 해 봅니다. 반면 선거에는 질지라도 남의 험담을 안 하고 선거전을 마친 사람은 빛의 사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평생 빛을 발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남의 험담을 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늘 말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할 때 우리는 빛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면 진실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크리스챤들이 말해야할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진실함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 머리속에 담겨져 있다고 해도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빛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이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때 우리는 진실함의 빛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으나 못 얻으나 언제나 주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진실함의 빛을 비추게 됩니다.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안믿는 사람들을 찾아 주님의 이야기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세 가지의 빛을 소유하십시다. 착함의 빛, 의로움의 빛, 진실함의 빛을 소유하십시다. 그런데 이 빛을 비추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세 가지 빛을 소유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 주님을 본받는 삶이 바로 세 가지 빛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착함의 십자가, 주님의 의로움의 십자가, 주님의 진실함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이웃에게 착한 일 하는 것, 한 두번은 쉬어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입니다. 남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앞장서서 싸우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전도하는 것, 쉬어 보이죠.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일 다릅니다. 매일 조금씩 다른 십자가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한편 오늘 나의 십자가를 포기하면 우리는 영영 그 십자가는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세 가지 빛이 조화를 이루어서 매일 최고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필요한 바로 그 빛을 발하도록 하나님께서 늘 도와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학은 날아가는 새를 그리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신학서적은 모두 신학자들의 찌꺼기다’라는 뜻일줄 압니다. 날아가는 새를 어떻게 그립니까? 제가 이 말을 한번 인용하니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요즘은 비디오가 나왔으니 가능합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비디오는 한 쪽면만 찍히지 않습니까?
날아가는 새를 순간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아가는 새의 모습은 그 순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한 가지로 우리들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은 그 순간으로만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이 그 때 비춘 빛을 포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본받으십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착함의 십자가, 의로움의 십자가, 진실함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우리는 빛의 삼원색을 소유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빛이 모여 매일 최고의 빛을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