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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는 사람들

날짜 : 2011.08.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협력하는 사람들
성경본문 : 마태복음 3장 13-17절

지난 달 상록기도회 헌신예배를 드렸습니다. 강사 목사님이신 김정수 목사님께서 병중에 계신 어느 목사님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장면이 지난 한달 동안 저의 머리를 계속 맴돌았습니다. 침대에 누우신채로 노인 목사님이 김 목사님에게 손을 코에 대 보라고 하시니, 김 목사님은 의아해 하면서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코에 갖다 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손가락이 코에 닿는 것을 보시자 노 목사님은, “기적이다. 기적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기적이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저의 뇌리에 오래 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의 젊은 시절의 어느 순간이 생각이 났습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아마도 1학년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군사 독재로 툭하면 데모하고 휴교하곤 할 때였습니다. 저도 종종 데모대열에 가담을 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경찰과 투석전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어느 나무 뒤에 숨어서 간간히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돌을 던지고 나무 뒤에 숨어서 진행되는 상황을 잠시 지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을 뒤로 움직였습니다. 순간 바로 저의 얼굴 앞으로 큰 돌이 날아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옆을 보았더니 그 쪽에서 어느 경찰이 저를 향해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돌이 상당히 큰 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사 다행이 돌에 맞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때 그 돌에 맞았더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오랫동안 그 장면을 잊고 정신없이 지냈는데 지난번 상록기도회 헌신 예배 후에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돌에 맞았더라면 살아도 신체 장애인이 되었을 것임에는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상상하기가 싫습니다. 한편 저는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순간 몸을 뒤로 젖히게 하셨는가…?
지난번 상록기도회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기적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걷는 것이 기적이고 손을 움직이는 것이 기적이고 운전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저의 삶은 온통 기적입니다. 이 기적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 날 그 때 저의 몸을 잠시 뒤로 back up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 기적의 삶을 거져 받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저만 기적의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사실 거의 모든 분들이 이런 순간들을 평생에 한번쯤은 겪었을 줄 압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경험을 군대에서 한번 더 겪었었습니다. 오늘은 시간 상 말씀을 못드립니다만….
곧 우리 모두는 거저 받은 기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놀라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을 닮는 하루 하루의 삶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적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소 실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사실 기적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물론 우리들과는 차원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기적의 사람 예수님께서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후 세례를 받는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갈릴리에서 오셨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가실 계획이셨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지 못했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라는 청년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려 오셨습니다. 이에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맞이합니까? 14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당연히 요한은 세례를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도리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천주교 교황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면 난리가 납니다. 천주교 교인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교황에게서 축복을 받으려고 손과 머리를 들여 내밉니다. 교황이 어느 나라를 방문해서 그 곳 신부에게 축복을 받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황이 어느 신부에게 축복해 달라고 머리를 들어 밀면 신부는 놀라 도망 갈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1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교황이 신부에게 머리 숙여 축복을 받고자 하면서 이는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말하면 신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부는 뭐가 뭔지 이해가 안 가도 교황을 축복할 것입니다. 요한도 매한 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협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고 하십니다. 세례를 주는 것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어리둥절 합니다. 아마 속으로는 물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니 제가 세례를 베푸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합니까?”
그러나 요한은 때로는 묻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그동안 아주 많이 경험해 보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허락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 자체에서 주님의 끝없는 겸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황의 수 많은 사진들은 언제나 교황이 축복하는 사진만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황이 축복을 받는 사진이 찍혔다면 그 사진을 보는 자들은 모두 교황의 겸손을 감동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주님의 겸손의 시작이었다면 지금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겸손의 절정에 이른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제가 교황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지만, 교황이 신부에게 축복을 받아도 그것은 한 죄인이 또 다른 죄인 조금, 아주 조금, 코딱지보다도 조금 나은 죄인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 자체도 겸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교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놀라운 겸손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아주 멋지게 장식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혼자서 수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수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기적은 혼자 일으키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하실수 없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는 혼자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혼자서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겸손은 혼자서 나타내실 수 없으셨습니다. 누군가와 협력을 하셔야 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례 요한의 협력이 필요하셨습니다. 이에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결코 기적의 주인공으로 오시지 않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주인공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겸손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은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협력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의 삶이란 어떻겠습니까? 겸손의 삶 누군가와 협력이 필요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늘 저희에게 기적의 삶을 허락하시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덤으로 사는 기적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덤으로 사는 기적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두 분은 서로서로 협력하신 분입니다. 서로서로 겸손과 협력의 아름다운 모습을 완성시키신 분들이십니다. 겸손과 협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닐까요? 우리의 남은 거져 받은 기적의 삶, 겸손과 협력의 삶을 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당신이 실패해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철학이 팽배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알피 콘(Alfie Kohn)씨가 ‘경쟁에 반대한다’라는 책을 펴 내서 경쟁이 파다한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보리스는 12/16를 약분하는 문제에 어려움을 느끼며 겨우 6/8까지 만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손을 흔들면서 보리스가 틀린 문제를 맞히려고 안달이다. 보리스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돌아보며 “자 그럼 누가 보리스에게 답을 알려줄까?” 라고 묻는다. 많은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은 페기를 호명한다. 페기는 4로 분자와 분모를 나누면 된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보리스의 실패로 인해 페기는 성공하게 된다. 보리스의 낙담이 페기의 행복이 되고, 그의 비참함이 페기의 기쁨이 된다. 이것이 우리 초등학교 교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반면 인디언 부족들에게 페기의 행동은 믿을 수 없이 잔인하게 보일것이다.”
저도 이러한 경쟁문화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보스톤에 사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경쟁문화에서 어떻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고 또 어떻게 보면 그 성공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실패한 분들일줄 압니다. 주님은 인류 문화가 이렇게 경쟁문화로 흘러 갈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서 세례를 받으실 수 있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역은 경쟁이 미덕이 된 세대에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과 협력의 사역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경쟁사회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겸손과 협력의 사람들이 되어 갈까요?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알피 콘은 다음의 짧은 대화를 소개합니다.
“네 명이 짝을 이루어 공부하면 무엇이 좋을까?”
“네 개의 뇌를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이 짧은 대화를 통해서 협력이 경쟁보다 더 큰일을 해 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네 명이 짝을 이루면 네 뇌만 가지게 될까요? 더 큰 기적의 뇌를 소유하게 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한국 방송을 통해 큰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한국 교수님이 삶에서 성공을 하려면 두터운 인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무척 평범한 말을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들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 때나 마음 놓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 22명을 갖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22X22X22곧 10,648명의 응원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그 22명의 친구와 그들의 친구의 친구까지 여러분의 응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들의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응원자가 된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주 가슴에 콱들어와 박히는 말이었습니다.
만일 10명의 친구가 있다면 친구의 친구 또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하면 10X10X10하면 천명의 응원자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방송으로 지나가는 것이기에 마음에는 와 닿는데 어떤 근거로 저 교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나 좀 궁금해졌습니다. 교수님이니 괜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실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의 이 아쉬움을 하나님께서 보셨는지 얼마 후에 크리스챤 신문에서 어느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바드 대학교 교수와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두 분이 지난 10년간 인간관계의 비밀을 추적했습니다. 마침내 ‘3단계 인간관계의 법칙’을 완성시켰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3단계 인간관계의 법칙이란 3단계 거리 안에 있는 사람들 즉 1단계는 친구이고 2단계는 친구의 친구이고 3단계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인데 이 3단계에서 우리는 직접적 영향을 받으며 우리 또한 3 단계 거리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4단계의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삼단계 중에서 우리가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은 일단계 밖에 없습니다. 일단계를 잘 유지하면 그 다음 2, 3단계는 저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곧 10명의 친구를 가지신 분들은 1,000명의 응원단을 가지는 것이고 22명의 친구를 가지신 분들은 10,648명의 응원단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가 알려주는 것은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경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홀로 싸우다가 지쳐서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협력이라는 것입니다. 네 명이 협력할 때 네 개의 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 십개의 뇌의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교수는 요즘 교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말을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몇 단계인가를 발표했는데, 아무 쓸모 없는 4단계라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실지 모르지만 전혀 응원군을 조성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예배 보는 모습은 하나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의 모습을 겸손히 요한에게 세례받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요한과 협력자가 되는 겸손한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죄인과 협력을 하는 겸손한 모습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혼자서 무슨 일도 하실 수 있으신 분이 협력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협력의 사람이 되라고 삶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우여러분, 진정한 기적은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기적입니다. 겸손한 협력자가 되십니다. 조금 전에 10명과 22명의 친구를 가질 경우의 응원군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느 사회학자의 주장은 한 사람이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이웃의 수가 가족까지 포함해서 35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직장도 다녀야 하고 공부도해야 하고 TV도 보아야 합니다. 잠도 자야 합니다. 남은 시간을 가지고 가족과 친지와 지내야 합니다. 그러니 최대한의 숫자가 35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나누어 보았습니다. 가족 10명 교회 안 친구 10명, 교회밖 친구 10명, 기타 5명 그랬더니 35명이 됩니다. 만일 35명의 1단계 사람들을 갖게 되면 42,875명의 응원군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나를 축복하소서’하며 겸손히 머리를 들어 내밀 수 있는 사람 35명이 있다면, 42,875명의 응원군이 언제나 우리들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적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1850년대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이 있습니다. 매주 10,000명이나 되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신 분입니다. 만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들이 그 유명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스펄젼을 스펄젼으로 만들게 했던 한 가정의 하녀 덕분이었습니다. 스펄전은 고뇌에 빠졌을 때 메리 킹이라는 하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훗날 스펄전은 “요리사가 나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었다” 고백까지 합니다. 이 요리사는 스펄전과 영적 교제를 계속하였고 그의 신앙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스펄젼의 신학을 ‘요리사의 칼빈주의’라는 말까지 생겨 났습니다.
하녀에게 머리를 숙인 스펄전을 통해 하나님은 이 시대가 필요한 설교를 쏟아 부운 것입니다. 스펄전은 겸손의 사람 협력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녀에게 머리를 숙이는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경쟁시대에 사시면서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그럴수록 35명의 사람들을 찾아 가십시다. 가족과 교회와 교회밖에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십시다. 그들에게 머리를 내어 미십시다. 어느덧 42,875명의 응원군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으십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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