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8.1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두 자유인
성경본문 : 민수기 14장 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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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우 가족이 부자들이 사는 교외 고급 주택지로 이제 막 이사하였습니다. 여우 가족은 이 부자 동네 가운데서도 최상류층으로 구성 되어 있는 컨트리클럽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여우 가족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선심 공세를 폅니다.
아빠 여우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사람들을 만나고 맥주도 사고 골프 비법도 가르쳐 줍니다. 엄마 여우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담백한 디저트, 아이들 쿠키, 기막히게 맛있는 케이크 굽는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들 여우는 자기 학교 남학생들과 이웃 아가씨들 사이의 미팅을 주선하고 딸 여우는 무보수로 동네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난 후 상류층 컨트리클럽 회원들이 모여 여우 가족의 회원 가입 여부를 심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당연히 허락이 되었겠죠? 심사 결과는 가입 불가였습니다.
여우 가족이 끝난 후 토끼 가족의 회원 가입 여부를 심사하였습니다. 심사 결과는 가입 허락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다음과 같은 평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아빠 토끼가 우리 집 장미가 잘 핀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장미를 잘 기르는 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세히 가르쳐 주었지요. 좀 소심하긴 해도 점잖은 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며칠 전, 엄마 토끼가 수프를 맛있게 끓이는 비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해서 내가 잘 가르쳐 주었지요. 뭘 모른다고 할까, 순진하다 할까, 아무튼 참 정이 가는 가족들이었어요.”
“우리 딸아이가 그러는데 아들 토끼가 우리 동네에 좋은 친구들이 있으면 좀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더군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토끼 가족에게 우리 클럽 가입을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 싶어요.”
여우 가족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보여서 클럽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도리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토끼가족은 배우고 부탁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들이 클럽에 가입이 되었습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예배로 드립니다. 광복절 기념 예배 설교를 현대판 이솝이야기로 시작해서 좀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 자유인은 여우처럼 능력이 많아서 남에게 이것 저것 베푸는 자라고 생각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오던 우리에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참 자유한 자의 삶은 어떤 삶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물론 한민족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과 아주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막 해방된 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해방을 맞이한 한 민족이 가야할 길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약 1-2년 지냅니다. 광야의 생활을 그 정도 맛보면 되었는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각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12명을 뽑아서 정탐을 시켰습니다. 정탐꾼 12명 중 10명이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에 있는 13:32, 3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민족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그리고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는데 앞 장 선 모세와 아론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5절 말씀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절망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 나라가 일제 36년에서 해방 된 후 정치적으로 몹시도 어려웠었습니다. 이 때 다시 일본의 속국이 되겠다고 하였다면 말이나 됩니까? 저희 나라는 일본의 압제 아래 있었지만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오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일화가 있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이 ‘키탄잘리’ 시집으로 인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입니다. 즉시 그 책은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캘커타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타골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명예박사 학위를 나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고 노벨상에게 주려고 하고 있소. 바로 그것이 노예근성이요.” 그리고는 박사학위를 사절했습니다.
여기에 타골의 통찰력이 나타납니다. 노예근성은 자기보다 크고 강한 것을 우상화하는 근성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통치에 젖다 보니 해방은 되었어도 이 노예근성은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고 비통해 한 것입니다. 타골은 자기 민족 안에 있는 여우의 모습을 통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줄 압니다. 이들은 아직도 노예근성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이것이 남의 이야기일까요? 우리도 아직까지 노예근성에 매여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노예근성은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기에 아주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가 봅니다. 듣다 듣다 못해 두 정탐꾼이 나섭니다. 옷을 찢으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말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반응하죠? 10절 말씀입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이로 인해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40년 후에 들어 갑니다만, 그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열 사람과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열 사람은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고 두 사람은 낙관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DNA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나요? 여우와 토끼는 DNA때문이겠죠.
열 사람은 눈앞에 닥친 문제 앞에 절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산더미 같은 문제를 넘어 멋진 미래를 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노예근성이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은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 산더미 같은 문제를 넘어 멋진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은 구체적으로 꼬집어서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2년 전에 있었던 홍해의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열 사람은 홍해의 사건은 너무도 오래전의 사건으로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이제는 보이는 산더미 같은 문제 앞에 좌절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과거 일을 기억하느냐 못하느냐가 이들을 믿음의 사람이 되느냐 절망의 사람이 되느냐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 못합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빌 모이어(Bill Moyer)라는 저널리스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24시간 전에 일은 너무도 잘 아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6,000년 전 이야기나 아니 지난 60년 전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한다.”
과거를 잊어가고 있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한탄하는 말입니다. 24시간에만 매여 사니 요즘 미국이 이처럼 어려워지지 않았나 생각케 됩니다. 미국인도 자유로운 땅에서 사는 것 같지만 이젠 노예근성을 소유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역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국인들은 증권시장의 역사는 잘 아지만 인류역사는 잊은지 오래 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열 사람보다 더 좋은 DNA를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홍해의 놀라운 사건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홍해의 사건을 넘어 처음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요셉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이삭과 아브라함의 이야기, 아니 민족의 이야기를 넘어 인류역사의 이야기를 묵상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열 사람은 홍해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라 단정지으며, 미래가 중요하다며 미래만 생각합니다. 미래만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과거를 잃어버린 미래만을 생각하다 보니 미래의 모든 것은 문제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다녀오고서 그 땅은 온통 문제뿐이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종종 미래가 문제로 가득 채워져 있다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과거를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2년 전, 10년 전, 50년 전, 600년 전, 6000년 전 일을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미래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력을 주신 것은 과거를 회상케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8/15 광복절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8/15는 갑자기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도저히 한민족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만큼 한민족의 미래도 더욱 밝게 다가옴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 자들은 미래를 어둡게 보는 자들이 되고야 맙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쫓아옵니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 미래에 매여 있기 때문에 결국 남의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곧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민족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자기 민족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성경이 틀린 이야기를 기록했습니까?”
틀린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 이야기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있습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느냐, 자유인의 눈으로 보느냐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예의 눈으로 보는 것은 이 역사적 사실을 따로 떼어 놓고 보는 것입니다. 곧 24시간의 폭만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24시간의 눈으로 보면 여호수아는 자기 민족만 아는 노예근성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은 이기주의자입니다.
반면 6000년 인류 역사의 눈을 가지고 이 사건을 살피면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이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6000년 인류역사의 폭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 자유인의 역사관입니다. 여호수아는 6000년 인류 역사 가운데 지금 그 시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하는 것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 자기 민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 민족만을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일제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직 노예근성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깊게 회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해방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은 우리 민족만을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위한 계획입니다. 이웃 민족을 위한 계획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인을 먹이로 삼는 다는 것의 깊은 진의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도 살리고 이웃민족도 살리겠다는 깊은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자들은 자기민족뿐이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만 살겠다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역사적 통찰력이 있던 여호수아는 자기 민족도 살고 이웃민족도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시면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 이름입니다. 헬라 이름은 바로 예수입니다. 여호수아의 모든 행위가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곧 가나안에 있던 이웃 민족들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존재한 것입니다. 역사적 눈을 가질 때 모든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곧 역사적 안목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해방의 경험을 한 사람은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담대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은 바로 자유인들입니다.
곧 두 사람은 늘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홍해의 사건을 통해 늘 삶에서 감사하는 습관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감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눈에 비친 가나안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차지함을 통해서 온 인류에 축복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차지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40년 늦게…. 비관적으로 보고한 열 명으로 인해서 40년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그들이 본 믿음의 세계는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척 억울했을 것입니다. 10명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40년 미루어졌으니 말입니다. 40년이 지난 후 바야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이 때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 갈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믿음의 보고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뒤늦게나마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24시간의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문제로만 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들의 세계가 지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만을 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들의 세계가 막히지는 않습니다. 늦게나마 꼭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러니 문제만을 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늘 싸우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할 때 미래를 밝게 보게 됩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예배로 드립니다. 6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오늘 회상할 때 그 사건은 살아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 사건은 60년 전뿐 아니라 600년 전 6000년 전을 거슬러 보게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미래를 보는 눈을 변화시킵니다. 그 때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모든 인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가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어디나 아름답고 이 세상 어느 인종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두 자유인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 고백을 하며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이웃에게 배우는 자가 됩니다.
교우 여러분, 자유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이웃민족에게서 배우십시다. 이것이 노예근성에 젖어 들고 있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준 사명이 아닐까요? 이 사명을 주시려고 66년 전 해방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닐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일제 시대 자유인으로서 독립을 위하여 미국에서 투쟁했던 안창호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흥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흥사단보 10호에 ‘낙심과 절망은 곧 정신적 자살’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한 대목을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처한 경우를 당하여 우리가 가장 경계하면서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다른 것도 많이 있겠지만, 사실 낙심과 절망만큼 우리가 삼가해야 할 것이 없다고 사료되는 바이다. 낙심과 절망은 사람의 정신 활동을 억제시키고 가능한 일도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버리며 자진하여 죽기를 선택하도록까지 만들어 버리니 생각하면 이게 이미 죽은 정신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략) 그런데 우리 동지들의 상태를 보면 낙심과 절망에 빠져 거기서 이기고 뛰쳐나오는 사람보다도, 도리어 주어 앉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그대들이 낙심과 절망에 빠져 영영 죽고 만다면 빼앗긴 우리 조국은 누가 되찾겠는가.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우리는 경계하고 경계해야 하며 최선의 노력을 하아여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 동지들부터 용약(무언가를 향하여 마음이 힘차게 뜀)해야 하다. 그것이 곧 우리 겨레에겐 힘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동지들이 먼저 엎드려지면, 이를 지켜보는 겨레의 눈이 어떠하겠는가. 용약하라. 용약하라. 그대들이여 용약하라.”
안창호 선생은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아울러 한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참 자유인으로 살다가 해방되기 전 7년 전에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최고의 나라에 자유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안창호 선생님이 그리던 광복의 사건은 어느덧 아름다운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 아름다운 역사를 회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용약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안창호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떤 의미로 용약하라고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실까요?
우선 밝은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라고 권면하실줄 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제 강국이 되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이웃민족을 존경하며 끝없이 이웃 민족에게 배우고 섬기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여우가 되지 말고 토끼가 되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그는 한 민족의 해방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유와 화평의 나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는 온 인류가 자유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세상을 향하여 용약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는 자들이 참 자유인입니다. 함께 자유인이 되십시다. 자유인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