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4.2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큰 기쁨의 달음질
성경본문 : 마태복음 28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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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흑백차별이 한창일 때 버밍햄 알라바마(Birmingham Alabama)의 어느 교회당이 폭파를 당했습니다. 백인인종차별주의자가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14살 난 애디(Addie)라는 흑인소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은 그 후 소녀의 무덤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꽃을 놓고 오곤 하였습니다. 3년 후 가족들은 소녀를 무슨 이유에선지 다른 묘지(cemetery)로 옮기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일꾼들이 무덤을 파헤쳤는데, 깜짝 놀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온 가족은 깜짝 놀랍니다. 묘지의 사무직원들이 나와서 모든 가능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3년 후에 두 번째 고통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빈 무덤은 이들에게 3년 전의 악몽을 다시 되살아나게 한 것입니다. 이들은 빈 무덤의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빈 무덤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잠시 묻어두었던 빈 무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빈 무덤을 보는 자들의 축복된 삶이 무엇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 3일이 되었습니다. 곧 안식 후 첫날입니다.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였습니다. 지키는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8절 말씀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은 한편으로는 무서움이 있었지만 큰 기쁨을 안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요즘 현대 여인들은 운동을 많이 합니다. 남자들이 하는 운동 중 안 하는 것은 아마 football(미식축구)밖에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여인들은 운동을 안했습니다. 달릴줄 몰랐습니다. 여인들이 달리다니요…. 그런데 이 여인들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달리는 것이 보기에 안 되었는지 아니면 위험해 보였는지 누군가가 가로 막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여인들은 그네들을 가로막은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인줄 금방 알았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잠시 달리던 것을 멈추었던 이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실 두 여인은 새벽에 무덤으로 향할 때는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찾아왔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두려움은 더 해갔고 썩고 있는 주님의 몸을 대할 생각에 슬픔은 더 해 갔을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주님 몸에 바를 기름을 준비하고 온 것입니다. 그 기름은 슬픔의 기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신발은 슬픔과 절망의 신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빈 무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빈 무덤에 묻어두고 그들은 새 신발을 신습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신발을 신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이제는 슬픔과 절망의 신발의 무덤이 된 것입니다. 가급적 슬픔과 절망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그들은 뛰었습니다. 더 이상 슬픔과 절망의 삶에 젖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비로서 기쁨과 자신감의 삶을 새로이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기쁨과 자신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 이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만 이 삶을 누리지 말고 어서 속히 제자들에게도 알려라 그들도 새 신발을 신게 하여라. 새 신발을 신은 채 갈릴리에서 만나자”
부활하신 주님은 새 신발을 신은 사람들만을 만나시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제 2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원하시는 모양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애디의 가족은 애디의 빈 무덤 앞에서 온갖 당혹함과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이를 죽인 것도 부족해서 아이의 모든 것을 훔쳐가는 세상을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주님의 빈 무덤 앞에 서기로 결단하였다면 이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애디로 인해 얻은 절망과 슬픔의 신발을 주님의 빈 무덤에 던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신발을 신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 애디의 가족들이 신고 있는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실줄 압니다. 물론 정도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최근에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다니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 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러한 우리가 바로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재미로 얘기를 해 오지 않았습니까? 30세는 30마일로 40세는 40마일로 50세는 50마일로 인생의 자동차가 달린다고 말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유머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시간이 더 빨리 가느냐 하면 놀랍게도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의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 합니다. 다우베 드라이스마(Douwe Draaisma)라는 네델란드 심리학 교수가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을 빨리 흐르는가’라는 베스트셀러를 펴냈습니다. 먼저 그는 ‘모래시계’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모래시계는 세월이 갈수록 빨라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래가 줄줄줄 흘러내리면서 서로의 마찰로 인해서 모래가 작아진다고 합니다. 또 모래시계의 구멍이 모래와의 마찰로 인해서 자꾸 넓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래시계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꾸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레시계는 이처럼 물리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빨라지는데 우리 인생은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나요?
어렸을 때는 경험이 덜 쌓여있기 때문에 감정이나 사건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경험들 중 일부가 자동적인 일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루 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알맹이 없이 기억 속으로 섞여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한 해의 기억이 점점 공허해져서 붕괴해버리고 맙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저의 아들 준석이와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아주 어릴 때 준석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요즘처럼 봄에 꽃들이 활짝 피었을 때입니다. 준석이에게 꽃을 보여주었습니다. 신기한 듯 환히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없는 웃음이었습니다.
하루는 바닷가에 갔습니다. 물론 처음 준석이가 바다를 보는 날입니다. 바다를 보면서 신기한 듯 환히 웃는 모습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요즘 준석이는 바닷가에 가자도 같이 가지 않습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산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이 천천히 갑니다. 반면 오래 살수록 적체된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하는 횟수가 적어집니다. 그 결과 시간에 대한 흐름이 더 빨라진다고 느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모두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그러면 여기서 적체된 경험과 슬픔과 절망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나 설명이 필요할줄 압니다.
고이케 류노스케라는 일본인 작가가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방금 소개해 드린 드라이스마의 생각보다 한 걸음 더 나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과거로부터 오는 엄청난 축적된 생각이 사람으로 하여금 둔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둔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자극은 나이들수록 갖기 어렵습니다. 결국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가도록 우리 마음은 프로그램화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어느 친구가 랍스터(lobster)를 사줬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 먹었는데 세상에 이런 맛의 음식이 있나 하면서 먹었습니다. 그 후 아주 귀한 손님들에게는 꼭 저도 랍스터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전에 그 랍스터의 맛은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축적된 경험으로 인해 더 이상 그 랍스터의 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요즘 요리사들은 왜 이리 음식을 못하나? 새로운 자극을 얻지 못하니 남은 길은 부정적인 생각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것이 다 똑같습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자극은 잘 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정적으로 생각함을 통해서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가던 두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프로그램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여러차례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도 보면 주님께서 이미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실 것을 누차 말씀 하셨습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음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부정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신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위해서 삶을 180도 바꾸게 하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망과 슬픔의 신발을 신고 무덤에 갔었는데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빈 무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 신발을 신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삶의 곳곳에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이들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새 신발을 신은 두 여인과 더불어 예수님도 뛰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제자들과 더불어 뛰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새 신발을 신고 갈릴리에 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새로운 달리기를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달리기를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이제 기쁨과 자신감으로 프로그램이 된 신발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머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떤 사건을 보면 늘 부정적으로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하고는 주님은 달리기를 같이 하실 수 없습니다. 도리어 어떤 사건을 당해도 어떤 말을 들어도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어두운 이야기 안에도 밝은 면을 찾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런 사람들과 주님은 달리기를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도 빈 무덤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이 부활하심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드린대로 부정적으로 프로그램화가 되어있습니다. 열심히 달려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부정적인 생각에 젖여 있곤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이웃을 향한 부정적인 생각, 예를 들어 애꿎은 cook을 향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듯 말입니다. 우리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이곳으로 던지도록 주님의 빈 무덤은 지금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빈 무덤 속에 우리들의 슬픔과 절망의 신발을 던지십시다. 아울러 자꾸 쌓여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기쁨과 자신감의 신발을 신으십시다.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시다. 어떠한 일도 기쁨과 자신감의 눈으로 생각하십시다. 모든 이웃을 기쁨과 자신감의 눈으로 대하십시다. 주님은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들과 달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오 콜린스(O’Collins)라는 신부이자 교수님이 부활에 대한 클래스를 가르쳤는데 어느 학기를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부활의 신비를 상징하는 한 가지 선물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 두 학생의 선물을 소개하였습니다.
두 학생은 아무런 선물도 손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한 학생은 강단에 올라가서 신발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신발입니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합니다.”
한 학생은 강단에 올라가서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들려줄 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수님은 이 두 가지 선물이 진정 부활의 선물이라고 소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빈 무덤을 통해서 받은 선물이 바로 이 두 선물이었다고 봅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신발을 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는 기쁨의 노래가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도 이 두 가지 선물을 부활의 주님께 바치십시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과 함께 가십시다. 부활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부활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해인 수녀가 부활의 주님께 드리는 노래 ‘이제 당신 오시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세상은 무겁고 죽음은 어둡고 슬픔은 깊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 눈물 흘리던 시간 위엔
고통의 상처가 덧나 어쩔줄 을 몰랐습니다.
이제 당신이 오시어 우리를 부르십니까.
두렵고 황홀한 번개처럼 오시어
우주를 흔들어 깨우십니까.
차가운 돌무덤에 갇혔던 당신이 따듯하게 살아오시어
세상은 잃었던 웃음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기뻐서 하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들이
부활의 흰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날마다 조금씩 아파하는 인내의 순간들이
부활의 흰 새로 날아오르게 하소서.
예수께서 직접 봄이 되고 빛이 되어 승리하신 이 아침
아아, 이젠 다시 살아야겠다고
풀물이 든 새 옷을 차려입는 처음의 희망이여, 떨림이여……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