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3.2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우리가 아니면
성경본문 : 히브리서 11장 32-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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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지는 언젠가 세계를 움직인 역사적인 인물을 소개할 때 첫 번째 자리에 징기스칸을 꼽았다고 합니다. 징기스칸의 특징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첫 번째가 그의 위대한 비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의 비전이 컸던 것은 아닙니다. 열일곱살의 어린 소년 소원은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그의 부족들이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잘 뭉치더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늘 웅대한 야망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되어갔습니다.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을 받았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었습니다. 2년 후 아내를 되찾았지만 그의 아내는 적국의 장군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징기스칸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 아이를 어떻게 했을까요? 이 사실을 모든 부족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자신의 자식임을 선포합니다. 이 아이가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징기스칸의 위업을 이어 받게 됩니다.
징기스칸이 왜 징기스칸이 되었는지 이유를 알만합니다. 이 세상에 위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처럼 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유는 아마도 두 번째 특징을 갖고 있지 못해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 이 글을 읽었었는데 이 이야기 옆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어 놓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감.’
징기스칸이 남의 나라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은 것은 바로 그가 삶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기에 저는 ‘자신감’이라고 써 놓았던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징기스칸의 삶은 자신감이 넘치는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자신감이 넘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한국 TV를 보는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쎄씨봉프로를 본 후 ‘놀러와’ 프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최근에 본것은 패숀스타일리스트들을 초대한 프로였습니다. 배우나 탈렌트들에게 의상 입는 것을 컨설팅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 베스트 드레서(best dresser)가 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워스트 드레서(worst dresser)가 됩니다.”
아무리 스타일리스트들이 옷을 잘 골라 주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매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게 옷도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모두 베스트 드레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히브리서 기자도 대단한 자신감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소위 말해서 그 유명한 ‘믿음의 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부르는데, 1절 말씀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시작해서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기라성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31절까지 이렇게 소개를 계속한 후 오늘 본문 말씀 첫 절인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마지막으로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리고 이 믿음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33절 이하 말씀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하며.”
아마 다윗의 이야기가 제일 많이 기록이 된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35절 말씀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정말로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입니까? 계속해서 36절 이하 말씀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주석가들은 이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예레미야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으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져서 읽고 있었을 것입니다. “와, 정말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네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쫓아가지.” 자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입이 떡 벌어져 있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펀치라인을 날립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독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했을 것입니다.
“아니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니 무슨 말인가?” 4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독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뭔가 잘 못 읽었나 자꾸 반복해 읽어 봅니다. 그래도 변함 없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들이 아니면 그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높아 보였는데, 실상은 믿음의 선배들이 자기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가슴은 뛰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 이들의 믿음의 삶이 자기들을 통해서 온전함을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제 이들은 갑자기 자신감의 사람들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 믿음의 선배들도 자기들을 부러워하니 말입니다. 독자들의 가슴에 자신감이 이렇게 차 들어가는 반면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당당한 자신감 가운데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히브리서기자의 자신감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무엇이 그를 그토록 자신감의 사람이 되게 하였을까요? 39, 40절 말씀에 그를 자신감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39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계속해서 4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자기들을 통해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바로 다음인 12:2절에 이를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는 은총이 모든 축복의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선배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시대의 사람들이 대신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최고의 약속을 누린 것입니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축복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약속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를 비롯 히브리서를 읽는 자들을 통해 이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을 통해 자신의 삶에 큰 변화를 받은 체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삶의 놀라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이 놀라운 변화를 누릴 수가 없어서 그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살자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사순절 주제에 맞추어서 세 번째 설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읽은 책이 있는데 그 중 전에도 소개했던 노위치의 쥴리안(Julian of Norwich)의 이야기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오늘 한번 더 그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노위치의 쥴리안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후 이러한 고백을 하였다고 말렸었습니다.
“나는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쥴리안은 우리들처럼 히브리서를 읽고 주석한 후에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본 후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쥴리안은 깊은 명상 중에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감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감의 사람이 된 Julian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늘 나오는 말입니다. 그가 자기의 방에서 수도를 하면서 지낼 때 사람들이 찾아 오곤 합니다. 찾아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하던 말이 있습니다.
“All will be well.”(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All will be well.”
히브리서 기자도 쥴리안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줄 압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후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아울러 모든 것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 삶이 만세전부터 약속하신 바로 그 삶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힙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이 축복을 기다리다가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돌에 맞기도 하고 톱에 켜이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지만 이 축복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을 대신하여 자기들이 이 약속을 처음 누리는 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자고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영락교회를 다닐 때 박조준 목사님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오면 삶이 언제나 플러스가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모양이 +의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으로 향하면 언제나 마이너스가 된다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것은 늘 옆으로 가기 때문에 ‘-’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감에 맞추어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면 향할수록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반면 세상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자신감을 잃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는 자신감의 +, 세상은 자신감의 – 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어야지 자신감이 생기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신감이 생기게 한 그 세상적인 것이 항상 같이 있나요? 언젠가 떠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 그 자신감은 어떻게 되나요?
교우 여러분, 십자가 이 외에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은 우상입니다. 잠시 자신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 우상은 언젠가 우리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없던 것보다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반면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들은 자신감의 사람이 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이런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All will be well.”
그러면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 자신감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계속 쫓아다니는 죄의식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 앞에서 이 두가지가 모두 해결받았을 줄 압니다.
첫 번째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사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 깊게 만나려고 십자가 앞에 매일 나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이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한편 이 시간 두 번째 십자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경험을 하였을까요? 두 번째로는 자기가 받은 상처를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한 십자가라면 두 번째 십자가는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상처로 인한 십자가입니다. 영어로는 ‘sinned against’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아울러 우리가 당한 이웃의 죄로 인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곧 우리의 영혼은 두 가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한 상처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이 우리에게 준 영혼의 상처입니다. 이웃은 우리에게 좋은 것도 주지만 한편 나쁜 것도 줍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대개 그들을 만든 위대한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전에도 소개해 드렸지만 레오날도 다빈치는 할머니의 격려의 말이 그를 위대한 예술인으로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분들에 대한 자료는 우리가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반대의 길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별로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실패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는 누군가에게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서 실패한 삶을 살아 갑니다.
필라델피아 연합교회를 섬길 때입니다. 한 교우님이 아니 한 장로님이 찬양에 늘 자신이 없어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장로님쯤 되셨으면 신앙생활도 오래하셨는데 왜 그리 찬양에 자신이 없으시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어릴 때 이북에서 교육을 받고 남한으로 피난 내려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음악시간에 한 사람씩 노래를 시키는데 아는 노래가 없어서 북한에서 배운 김일성 찬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한 소절을 겨우 불렀을 때 선생님이 따귀를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 노래에는 공포가 생겼다고 합니다. 노래하면 누군가 와서 따귀를 때릴지 모르는 공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아 옵니다. 알게 모르게 죄를 짓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서 받은 상처, 곧 ‘sinned against’의 상처도 해결할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 그대로 주님께서 느끼십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 그대로 주님이 아파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를 하는데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억나는 죄는 다 고백하였는데도 아직 풀리지 않는 무거움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웃에게 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상처를 내 놓으십시다. 주님이 우리의 상처를 대신 받으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 그대로를 주님이 느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의 상처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주님의 위로가 임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이들은 남을 위로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도리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그 상처를 통해서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릴 때부터 좋은 말을 많이 들은 사람들입니다. 레오날도 다빈치처럼 어릴 때 남들에게 귀한 말을 듣는 것 소중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찾아다니면서 나에게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이 축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삶에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를 통하여 큰 일을 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이 준 상처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위로를 가지고 자기와 비슷한 상처를 받은 자들을 위로할뿐 아니라 이들은 어떤 역경도 참아내는 자신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감싸실 뿐 아니라 더 큰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첫 번째 십자가는 주님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반면 두 번째 십자가는 우리가 받는 고통 그대로를 주님은 느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더 주님과 가깝게 느끼게 하곤 합니다. 이 때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이 때 우리들에게는 기쁨과 아울러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치게 됩니다. ”All will be well.”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던 최고의 찬양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우리의 상처로 인해 대신 십자가에서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그리고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사순절은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쥴라언아 그런 축복을 받았기에 그런 사람이 되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보지도 못하지만 “All will be well”외치면서 믿음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톱에 켜이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과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믿음 가운데 외치면서 살았습니다. “All will be well.”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이 현재는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니라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골방에서 아니면 새벽기도회에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보혈의 은총을 체험하는 남은 사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쟌 쥬강이라는 수녀의 기쁨과 자신감에 찬 말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작은 사람이 되세요. 작은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자꾸 커지려고 합니다. 그래야지 자신감이 생길 것 같으니까. 그러나 참 자신감은 한 없이 십자가에서 작아지신 주님을 만날 때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감의 사람들은 작지만 크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작지만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주님 앞에 서십시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십시다. 때로 이웃에게 받은 상처가 해결이 안 될 때 온 인류의 상처를 안고 아파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작지만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들은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