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1.3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소리질러 외치라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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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로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을 잘 아실줄 압니다. 그는 시베리아 감옥에서 어느 용감한 크리스찬으로 인해서 예수를 영접합니다.
솔제니친처럼 감옥소에서 예수를 영접한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네 살 때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15년간 감옥 생활을 합니다. 곧 아들이 19세가 되었을 때가 되서야 출감합니다. 긴 감옥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감옥 생활 중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출감할 때 그의 생각은 온통 19살이 된 아들을 만나는데 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예수를 영접한 삶이 얼마나 좋은지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장성한 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만나는 순간 더 큰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아들이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었습니다. 아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큰 기쁨 가운데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질문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다니 예수님을 영접하였구나?”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 우리 세대에는 십자가는 하나의 fashion이예요.”
아버지는 큰 실망에 사로잡힙니다. 15년 전에는 십자가를 목에 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유행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아무런 신앙도 없이 십자가를 목에 건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장식품으로 전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15년만에 만난 아들을 통해 많이 변화된 세상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가 하나의 장식품이 되게 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아닐까요? 그런데 십자가가 하나의 장식품이 되게 하는 움직임은 요즘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늘 있어 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갈라디아서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바꾸려는 거센 물결에 대해서 큰 싸움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외침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참 십자가의 삶을 회복하는 축복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일견해서 읽으면 십자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관계된 내용은 나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먼저 두 가지 시제가 나오죠. 그 때와 이제. 그 때는 아브라함 때입니다. 이제는 사도바울이 목회하던 때입니다. 아브라함 때나 사도바울 때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같을까요? 다시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아브라함 때나 사도바울 때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도바울 때만이겠습니까? 요즘도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요? 십자가는 Fashion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항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 난 후 한 청년이 오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항상 십자가를 지고 다녀요.” “오 장하구나. 그런데 어떤 십가가를 항상 지고 다니니?” “저의 십자가 목걸이가 자꾸 등뒤로 가요. 그래서 저는 항상 십자가를 지고 다녀요.”
이런 식으로 십자가가 패션의 도구가 되었으면 그래도 귀엽게 봐줄만 합니다.
사도바울 당시 어떻게 십자가가 이런 패션의 도구가 되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사도바울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저는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율법의 장식 아래 숨으려 하는 자들아 율법의 내용을 좀 들어 보아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는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몰래 들어 왔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예수의 보혈의 피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할례를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은 후에는 십자가를 질 것을 주장하는 반면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들을 율법의 장식품 아래 숨어서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율법의 내용을 좀 들어 보아라.”
그리고는 율법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창세기 15과 21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출생에 대해서 말한 후 이에 대한 해석을 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미 창세기에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 두 그룹이 있음을 율법은 말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도 모르고 율법 아래 숨으려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율법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아브라함에게 두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내인 사라요. 두 번째는 여종인 하갈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두 여자들을 두 언약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종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종은 율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율법을 하갈과 같은 존재로 설명합니다.
조금 복잡하죠. 잠깐만 참으세요. 금방 아주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하고.”
하갈, 시내산, 이 땅의 예루살렘 이 모두는 종의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더 복잡해지는 것 같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26절 말씀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사도바울은 이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과 자유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갈과 사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TV를 보는데 어느 교수님이 나와서 아주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수님이시니 가르치는 분이신데,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마디로 ‘가르침은 가르킴이다’ 말씀하는 것을 들으면 저도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teaching은 곧 pointing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이 더 잘 알아서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저기에 있다 가르키는 것이 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의 율법관을 살피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갈은 사라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종은 자유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율법은 진리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21절을 봉독해 드릴까요?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다시 풀어보면, “율법의 가르침을 행하려 함으로 자신을 숨기려는 자들아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26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늘의 예루살렘, 참 자유, 참 어머니 사라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율법이 가르치지 못합니다. 율법이 가르킵니다. 율법은 우리들의 넓은 자유의 삶을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못하게 합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마음껏 하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것만 하는 사람들은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하는 자들에게는 넓고도 넓은 자유의 세계가 열려져 있습니다.
율법이 가르키는 것에 대해서 잘 설명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 후보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각자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서로 배운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조종사가 말합니다. “비행기 조종 방법에 관한 수십 가지 규칙을 배웠어.” 두 번째 조종사는 말합니다. “나는 세 가지 규칙만 배웠어.” 첫 번째 조종사는 자기가 더 많은 걸 안다고 생각해 우쭐해 합니다. 두 번째 조종사가 말합니다. “내 선생님은 내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세 가지만 가르쳐주셨어. 그 외의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래.”
사실 율법 안에도 가르치는 것은 있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가르칩니다. 나머지는 가르킵니다. 성령 안에서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인의 삶입니다. 곧 율법은 넓고도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분들은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답답해서 어떻게 믿어!’ 하지만 실제로 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할까요? 그 자유의 삶이 어떤 삶인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자유는 좋은데 그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들은 홀로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이 외치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찬양하는 자유가 있는데 이 자유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축복은 이들이 나은 자녀수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 났던 여인이 수 없이 많은 아이를 낳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들은 수없이 넓은 기적의 세계를 체험합니다.
십자가 없이 기적의 넓은 세계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이 가르키는 삶은 십자가와 더불어 있는 축복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를 사도바울이 차지하였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실라와 더불어 깜깜한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그 때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었던 모든 쇠고랑들이 풀렸습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찬양하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즐거이 소리 질렀을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아이를 못 낳던 여인이 아이를 낳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참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즐거이 외치는 경험을 한 적이 언제이십니까? 참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즐거이 외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참 자유인의 삶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이 외치는 찬양입니다. 또 하나는 수 많은 아이를 낳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또 생깁니다.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하려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을 필요로 할까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꼭 필요로 할까요?
이 땅에 살았던 또 다른 참 자유인을 소개해 드립니다. 성프란시스와 그의 제자 맛세오가 프랑스로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한 마을에 들어선 두 사람은 몹시 지치고 시장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회칙대로 구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프란시스는 천한 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지 몇 입 안되는 음식과 말라 빠진 빵 조각 몇 개를 얻어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맛세오 형제는 체격이 크고 풍채가 당당하였으므로 크고 맛있는 빵덩어리와 새로 만든 빵을 여러 개 얻어가지고 왔습니다.
구걸을 마친 그들은 식사를 하러 마을 밖 한 곳에 이르니 맑은 샘이 솟고 옆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구걸해 온 것을 모두 그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프란시스는 맛세오 형제의 빵이 자기 것보다 분량도 많고 더 크고 좋은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말합니다. “맛세오 형제여, 우리는 이런 훌륭한 보물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프란시스가 자꾸 되풀이하므로 맛세오 형제는 “사부님! 이처럼 가난하고 부족한 것뿐인데 왜 보물이라고 하십니까? 여기에는 집도 밥상도 식탁보도 없으며 더구나 칼도 접시도 시중꾼도 하녀도 없는데….”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보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로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구걸해 온 빵과 깨끗한 바위로 된 밥상과 맑고 시원한 샘을 보더라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고귀한 보물, 즉 하나님께서 시중드시는 지극히 거룩한 가난을 진심으로 사랑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시다.”
성프란시스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너무나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찬미를 드립니다. 이러한 성프란시스에게 하나님은 더 놀라운 보물로 채우시지 않으셨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누리십시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찬미를 드리십시다. 십자가의 삶은 자유한 삶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유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무척 즐거운 삶입니다. 즐거이 외치는 삶입니다. 외치면 외칠수록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더 많아집니다.
약속의 자녀가 되신 교우 여러분, 그러니 멀리만 내다보지 마십시다. 이미 우리에게는 하늘의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참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멀리만을 내다보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주어진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그 때 그 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2011년도 첫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남은 한 해 우리의 십자가를 각자 지고 최고로 자유한 삶을 사십시다. 즐거운 삶을 사십시다. 소리 질러 외치십시다. 그날 그날 필요한 외침을 발하십시다. 우리들의 그날 그날의 외침의 소리를 온 세상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외치는 소리는 십자가의 주님의 소리가 되어서 온 세상을 울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주 어느 교우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시면서 또한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냐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죠.”
그분은 참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셨습니다. 남들이 힘들어 하는 일을 행복으로 받는 자유의 사람임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분은 작은 목소리로 크게 외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죠.”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를 질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십자가 안에서 행복을 노래하십니다. 2011년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즐거이 외치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