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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립니다.

날짜 : 2010.11.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주님을 기다립니다.
성경본문 : 시편 33장 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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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후안 프란시스코(Juan Francisco) 선장이 미대륙의 서해안 곧 현재 원싱톤주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지역을 탐험하고 있었습니다. Juan 선장은 스페인국기를 달고 항해하고 있었는데 같은 때 밴쿠버(Vancouver) 선장이 영국 국기를 달고 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하여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두 선장 모두 서해안이 자기 나라 소속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항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밴쿠버 선장의 여행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계속 어려움이 닥쳐 왔습니다. 선원들은 참을성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의 배는 드디어 서해안 암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명의 선원들을 나무와 물을 얻어 오게 하려고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모두 원주민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원주민과 겨루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포기하고 멕시코로 돌아 갔습니다.
한편 후안 선장은 계속 서해안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현재의 알라스카까지 항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후안 선장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계속 전진하였다, 새로운 장애물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I pressed on, taking fresh trouble for granted.)”
두 선장이 있었는데 한 선장은 알라스카까지 정복하는데 성공하였고 한 선장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후안 선장의 일기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나는 계속 전진하였다, 새로운 장애물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주님의 2천 년 전 오심을 기억하며 또한 앞으로 구름타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되어졌던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주님의 오심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면서 삶의 위안을 받는 절기가 아닌가 라는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텐데 지금 이렇게 애쓰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한편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일까요?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니 아웅 다웅 살지 않고, 되는대로 사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일까요?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기다림과 소극적인 기다림이 있습니다. 힘든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기다리며 위로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기다림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강절을 맞이하여 온 교회가 함께 동참하는 기다림은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그동안 잊었던 적극적인 기다림을 이번 대강절 기간 다시 한번 되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삶은 어떤 삶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표준새번역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문단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9, 10-마지막 절까지입니다. 먼저 9절까지는 시인은 의인들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명령의 말씀입니다. 1, 2절 말씀을 보면,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찬양은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두 가지 명령이 눈에 뜨이죠. 주님을 생각하며 기뻐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계속해서 3절 말씀을 보면,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우렁차게 노래하여라.”
그리고는 잠시 다른 내용이 나오고, 8절에 또 다른 명령이 나오는데, “온 땅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세상 모든 사람아, 주님을 경외하여라.”
아까는 찬양하고 노래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제는 두려워하고 경외하라는 명령입니다. 하여튼 9절까지는 이와 같은 명령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편 10절에서 19절까지는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해야 하는지 이유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마지막 20절 이하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요, 우리의 방패이시니, 우리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1-9절까지와는 정반대의 어조입니다. 찬양하라는 명령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다음 2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이름을 의지하기에 우리 마음이 그분 때문에 기쁩니다.”
이번에는 자기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기쁩니다.”
마지막으로 22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또다시 주님을 기다린다는 표현으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찬양하라. 노래하라. 경외하라’ 하더니 마지막에는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왜 처음부터 ‘주님을 기다려라’ 명령하지 않고 마지막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찬양과 노래와 경외의 삶은 바로 기다림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적극적 기다림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과 노래와 경외의 삶이 바로 주님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찬양 노래 경외가 어떻게 기다림으로 이어지는가?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9절까지는 찬양과 노래와 경외하라는 명령의 말씀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서부터 기다림의 모습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10절부터 19절 말씀을 살펴보면 궁금증이 풀어질 것 같습니다. 찬양과 노래와 경외의 삶이 기다림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을 것 같습니다. 10, 11절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라들의 도모를 흩으시고, 민족들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신다. 주의 도모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에 품으신 뜻은 대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조금 건너 뛰어서 18, 19절 말씀입니다.
“그렇다 주의 눈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살펴보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사모하는 사람을 살펴보시고, 그들의 목숨을 죽을 자리에서 건져내시고, 굶주릴 때에 살려 주신다.” 10절에서 19절 말씀은 시인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니 과거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모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찬양과 경외의 삶이 그냥 기다림의 삶으로 승화된 것이 아닙니다. 메모리를 통해서 기다림의 삶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외가 과거에 대한 기억과 합쳐질 때 비로서 기다림의 축복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4주간 대강절이 시작되는데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기다리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미국 군인이 있습니다. 수년간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서 나온 군인이었습니다. 같은 군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감옥에 갇히지 않았던 친구보다 감옥에 갇혔던 친구가 과거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렇게 잘 기억하냐?” 친구가 대답하기를, “만일 너도 7년간 혼자 감옥에 갇혀 있었어 봐. 너도 모든 것을 기억할거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경험했기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험한 것을 자주 생각했기에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늘 미래에 쫓겨 사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과거를 잊어버리면 그처럼 이상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강절에 두 가지를 함께 지키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대강절은 과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미래를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2천 년 전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아니 2천 년 전에 이곳에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언젠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2천 년 전에 이곳에 오신 예수님을 깊게 생각한 만큼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억은 평범한 기억이 아닙니다. 찬양과 노래와 경외의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기억입니다. 거룩한 기억을 소유한 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깊게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대강절 기간 곧 한 달 간 주님을 깊게 기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될까요? 당연한 것은 주님을 기다리는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나다니엘 호손이 지은 ‘큰바위 얼굴’ 이야기를 잘 아실줄 압니다. 주인공은 늘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며 언젠가 저 바위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전설을 믿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로 그 전설의 인물이 자기라는 것을 주위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늘 그를 기다렸더니 자신이 바로 그 인물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분명히 주님을 닮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닮은 삶은 어떤 삶일까요? 착하고 사랑 많고 온유하고…. 물론 착하고 사랑 많고 온유한 삶을 살게 될 줄 압니다. 이것 말고 주님을 닮은 또 다른 면도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요즘처럼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꼭 필요한 모습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처음 소개해 드린 후안 선장과 같은 모습 말입니다.
“나는 계속 전진하였다, 새로운 장애물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주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피해자이니 주님께서 오셔서 해결해 달라는 피해자의 고백으로 받아드려지곤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치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날 때까지 동굴속에 숨어 있다가 주님이 오시면 나오는 것처럼 생각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동굴 속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생각하며 동굴속에서 불평만하면서 지내는 것이 마치 주님을 기다리는 삶인 것처럼 여겨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의 삶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아마도, “나는 계속 전진하였다, 새로운 장애물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이와 관련해서 16, 17절이 주는 숨겨진 멧세지가 있습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은 아니면,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운명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볼까요? 주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이 생각하는 주님의 모습은 온유한 착한 모습만이 아닙니다. 능력의 모습입니다. 온 세상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님은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운명도 변하게 하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요? 너무 과장되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주님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통해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사건일줄 압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의 기적이기 전에 누구의 기적입니까? 오병이어를 곧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내어 놓은 어린 아이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어린 아이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른들도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있었을줄 압니다. 남자 장정만 5천명이었다면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다 합하면 만 명은 족히 되었을텐데 이 한 아이만 먹을 것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이 어린이와 다른 어른들과의 큰 차이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어린이는 자기의 작은 소유가 놀라운 일을 해 낼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 다른 어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 배나 겨우 채울까 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어린이는 자기는 놀라운 일에 동참할 수 있음을 알고 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동굴속에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아이처럼 자기가 폭풍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폭풍속으로 뛰어드는 자들입니다. 장정 오천명의 굶주림의 폭풍을 잠재웠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앞에 보이는 폭풍이 있지 않습니까? 폭풍을 바라보면서 동굴 속에 숨는 것이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삶일까요? 주님을 기다리는 삶은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삶이 아닐까요? 온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로 인해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폭풍속에서 많은 생명이 앗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외치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주님은 나를 통해 이 폭풍을 잠재우기 원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강절 기간 찬양하고 노래하고 경외하십시다. 일 년간의 일들을 기억하십시다. 주님을 기다리십시다. 주님을 닮은 자가 되어서 새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일 년간의 모든 문제도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님을 닮게 하는 재료가 되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세상에 묵은 문제들이 이제 해결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 역사가 뒤바뀌어질 것을 사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수 많은 문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통해서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닮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닯은 자들은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계속 전진하였다, 새로운 장애물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말씀을 거둡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앉아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무척 슬퍼 보었습니다. 눈물은 다 닦은 채…. 어른이 묻습니다. “무슨 일이야? 운동게임에서 졌어?”
“No.”
“오늘 큰 시험이 학교에서 있었어?”
“No.”
“서로 서로 화가 났어?”
“No.”
“그러면 왜들 그래?”
한 작은 아이가 말합니다.
“지미가 배가 아프다고 그래서 우리 모두 아파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이들은 함께 배가 아퍼할까요? 함께 아파할 때 지미가 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들의 눈물에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아직 안 오시고 계신 이유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로 인해 많은 일들을 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십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 아퍼하십시다. 폭풍속으로 뛰어 들어가십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웃을 낫게 합니다. 폭풍을 잠재웁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의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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