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9.2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성전을 지은 자들의 축복
성경본문 : 이사야 54장 11-17절
어느 날 무슨 일이든 뒤로 미루는 버릇이 있는 필리무스라는 사람이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적선을 청하는 불쌍한 거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거지를 돕고 싶어서 말합니다.
“그럽시다. 그런데 내 나중에 도와주겠소.”
그는 교회 옆을 지나다가 자신이 아직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기도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혼자 말로 중얼거립니다.
“나중에 기도하지.”
그는 여행을 계속하다가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간청합니다.
“아픈 내 아들을 병원에다 좀 데려다 주세요. 난 혼자 몸이라 날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어요.”
“도와드리겠어요, 하지만 나중에요.”
할머니와 헤어진 뒤, 그는 사고를 당해 즉사하여 그의 영혼은 불바다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타들어 가는 불 속에서 한 천사에게 애원했습니다.
“제발 물 한 방울만 주세요.”
“그러마, 그런데 내 나중에 물을 주겠다.”
천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를 그대로 두고 가 버렸습니다. 다른 천사가 눈에 띄자, 필리무스는 다시 한 번 애원합니다.
“이 불에서 절 좀 꺼내 주세요.”
“그러마, 내 나중에 꺼내 주겠다.”
이 천사도 이렇게 말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밖에도 다른 여러천사들에게 호소했지만 필리무스는 똑 같은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러마, 나중에….”
이번에는 저에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8월초엔가 뉴욕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대광고등학교 은사님이신 송성찬 장로님의 100회 생신축하 파티를 연다는 소식의 편지였습니다. 캘렌더를 보았는데 도저히 가 뵙고 축하를 드릴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축하금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이사 준비로 몹시 바쁠 때였습니다.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이사 가서 부치지.” 그리고는 그 편지를 가방에 잘 보관을 하였습니다.
이사를 간 후 첫 주간은 짐 정리하느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주간이 되었을 때 정신이 번뜩 나는 것이 100세난 노인에게 하루라도 빨리 보내드려야하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방 안에 두었으니 가방을 뒤졌습니다. 편지는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분명히 가방 안에 두었었는데 가방 안에 없으니 어떡합니까? 이사하다가 쓰레기인줄 알고 누군가가 버렸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별별 생각이 다들죠. 뒤로 미루었던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했습니다.
두 주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른 가방을 우연히 열었을 때 찾아서 보내드렸습니다. 축하금을 보내기로 마음 먹인지 거의 두달이 되서야 편지통에 들어 간 것입니다. 100세가 되신 분에게 말입니다. 저의 편지를 받으실 때는 이미 100세하고 두 달이 되셨을 것입니다. 조금 더 늦었으면 101세 생일 축하편지가 될뻔 했습니다.
저는 필리무스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이 모습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저처럼 이런 생각이 안 떠오르는 분들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행복한 분인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이 또한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제 너희가 해방이 될텐데 예루살렘에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자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이제 예루살렘에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1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자들의 모습이 역역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은 깜짝 놀랍니다. 그동안 그들의 꿈은 단 하나였습니다. 언젠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기들이 직접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그 꿈을 꾸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집 짓는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혼자서 이런 저런 설계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당시 최고의 건축은 돌로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돌로된 성전을 설계했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다시한번 봉독할까요?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새로운 상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이 성전을 지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성전을 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 많은 보석으로…. 그러면 그 성전에서는 어떤 일이 진행되나요? 13절 말씀입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어른들은 그동안 바벨론이라는 고통의 집에서 늘 공포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자녀에게는 이런 삶을 물려주길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늘 부모들은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전도 멋지게 지어질뿐더러 자녀들은 평안한 가운데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만족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자녀들만 평안한 삶을 살아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어른들도 더 이상 공포에서 해방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70년간 바라던 해방이 이루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멸망을 생각하면서 통쾌해 하는데 마음 한쪽에서는 새로운 염려가 생깁니다. 바벨론은 무너지지만 언제나 또 다른 큰 나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즐거웠던 마음이 주춤합니다. 이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보라 그들이 분쟁을 일으킬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너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 70년전에 바벨론을 보낸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더 이상 바벨론과 같은 나라는 보내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바벨론과 같은 나라가 쳐 들어와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기에 도리어 통쾌하게 패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6, 17절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해석합니다. 바벨론의 뒤를 이어 큰 나라가 나오는데 그 나라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떤 권세나 권력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세상에 큰 나라가 나타나면 이스라엘민족은 늘 두려워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나라들이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바벨론이었습니다. 이 세 나라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보다 큰 나라만 보면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 큰 나라도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바로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해방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숙제는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7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이 민족은 죄책감에 병든 민족입니다. 아무리 좋은 축복을 많이 받아도 죄책감에 시달리면 축복이 축복이 못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못을 박습니다. 1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이 도리어 정죄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큰 나라건 작은 나라이건…. 정죄를 받았던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나라들이 정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땅히 지은 죄로 인하여 정죄를 당하여야 하는데 그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자가 도리어 정죄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제 죄책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곧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죄는 내가 다 잊어버렸다. 가라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나의 성전을 지어라. 너희를 정죄하는 나라들을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내가 그들은 도리어 정죄하리라.”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민족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물론 오늘 본문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상해 볼까요?
한 그룹은“당장 가리다.” 다른 그룹은 “내 나중에 가리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들은 당장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그토록 두려웠던 큰 나라들이 전혀 괴롭히지 않습니다. 도리어 큰 도움을 줍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쌓는 돌들이 보석이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정말 돌들이 보석으로 바뀌어질까?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는 멀리서 오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간간히 물어 봅니다. “그래 돌들이 보석으로 바뀌어 진데?” 언제나 답변은 “아니, 안 바뀌어진데.” 그리고 이들은 떠나지 않은 것을 현명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안 떠나길 잘했어. 보석으로 변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떠나도 되는데 뭘. 떠나도 나중에….”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속은 것일까요? 처음 이스라엘 인들은 그러한 기대를 안고 돌들을 쌓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돌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보석으로 바꿔주신데.” 서로 서로 속삭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쌓아도 보석으로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손을 놓고 속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신비한 일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일어납니다. 자신들이 쌓는 돌들은 하늘나라의 성전을 쌓는 돌이라는 확신에 사로 잡힙니다. 자기들은 돌을 쌓고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자기들이 쌓는 돌 하나 하나가 쌓는 순간 보석으로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영혼 속 깊숙히 확신합니다. 순종하는 자들만이 누리는 비밀스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돌이 보석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가리다” 고백한 사람들이 체험합니다. “내 나중에 가리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은 무거운 돌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바벨론을 떠나지 못합니다. 아직도 돌은 보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돌은 무거워 보였지만 결코 무거운 돌이 아니었습니다. 보석으로 변하는 가벼운 돌이었습니다. 돌을 손에 쥐는 순간 늘 하늘나라의 보석으로 변하곤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데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들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정죄하십니다. 아울러 세상의 크고 작은 권세들이 모두 우리릴 위해 존재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귀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우리의 사역의 열매는 언제나 신기한 보석으로 변합니다.
오늘은 너무도 기쁜 날입니다. 2년 반만에 우리는 감격적인 첫 예배를 저희 자녀들이 새 성전에서 드립니다. 지난주까지 2년 반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한 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은 돌 하나 하나가 무거웠지만 뒤 돌아 보니 정말로 가벼운 돌들임을 느낍니다. 이 돌들이 하늘나라의 보석이 되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가볍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오늘 이 모든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결단을 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 놀라운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서 더 놀라운 일을 예비해 두셨음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또 다시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새 성전과 함께 더욱 큰 일을 감당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성전의 돌이 아니라 다른 돌을 쌓기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ECC를 세우시라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모두 “Yes”하였습니다. 아니 “당장 하리다” 응답하였습니다. 이제 ECC를 통해서 새로운 사역을 펼쳐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우리 함께 또 다시 대답하십시다.
“당장 하리다.”
얼마 전 말씀드렸습니다. 자녀 교육과 함께 이웃 사랑이 아름답게 어울어지는 저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YPK & B40. 저희 자녀들이 Y(윤동주), P(사도바울), K(마틴루터 킹)과 같은 자녀들이 나오도록 함께 수고하십시다. 우리들의 청년들 안에서도 물론 YPK의 인물들이 나오도록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다. 아울러 ‘B40’, Brookline의 40%가 믿는 자가 되는 꿈을 갖고 돌을 하나씩 새롭게 쌓으십시다.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워 보일수록 실제로는 가벼운 돌입니다. 모두 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새로운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십자가들 앞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십자가들은 저마다 크기와 무게가 달랐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옮기고 싶은 십자가를 선택하여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은 십자가 더미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가장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갖지 위해 서로 밀쳐 댔습니다. 모두가 다 떠나 버린 뒤에 남은 것이라고 가장 크게 보인 십자가뿐이었습니다. 그 크기에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갑작스레 광풍이 불어와서 그 십자가를 공중에 날려 보냈습니다. 마치 깃틀처럼. 가장 큰 십자가가 실은 가장 가벼웠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들어야 하는 돌은 무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지난 2년 반 돌을 보석이 되게 하는 사역에 참여하셨던 여러분께 감사와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 앞에 더 큰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보면 가벼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