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8.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무엇이 보이느냐?
성경본문 : 마가복음 8장 22-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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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080810
제목: 무엇이 보이느냐?
본문: 마가복음 8:22-26
1520년에 멜리건(Mallegan)이라는 사람이 남아메리카의 끝 티에라 델 퓨고(Tierra del Fuego)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큰 배를 타고 나타나는 자기들을 원주민들이 어떻게 대할까 많은 염려를 안고 육지에 다가갑니다. 그런데 멜리건과 그의 선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곳 원주민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교묘히 원주민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왜 그들의 눈에 안 띄었을까요? 원주민들의 눈에는 작은 카누(canoe)는 보이지만 큰 배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큰 배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우리들 생각 안에 있는 것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것 아니면 우리들의 상상 안에 있는 것들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과학자들이 증명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백내장으로 인해 보지 못한 아이들을 수술을 해서 눈을 뜨게 하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은 단지 빛과 색깔의 뭉치가 빙빙 도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물체로 보이지 않고 그냥 추상화처럼 빛과 색깔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으로 물체를 봅니다.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경험과 좋은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이 좋은 시력의 소유자가 된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생각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경험과 좋은 생각을 많이 해서 좋은 시력의 소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라도 우리 모두 좋은 시력을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남은 생애 최고로 좋은 시력을 갖고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에 가득찬 최고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어떻게 좋은 시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에 도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안수하여 고쳐주십사 하는 뜻이었을줄 압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아니 그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안수하시면 되는데 친히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십니다. 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는지 좀 의아합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각자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을줄 압니다.
이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환자의 눈에 당신의 침을 뱉으십니다. 그래도 지난 주 장면보다는 괜찮습니다. 지난 주에는 당신의 침으로 어느 벙어리의 혀에 닿게 하셨는데 이번에는 눈에 닿게 하십니다.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일줄 압니다. 침을 맞고는 어리둥절하였겠죠. 그런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침이니 마음 놓고 받습니다. 곧바로 눈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를 해주십니다. 안수가 끝난 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24절 말씀입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사람이 나무인지 나무가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빛의 덩어리가 걸어다니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처음 눈을 뜨는 사람들은 빛과 색깔의 덩어리가 빙빙 도는 것이 보인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시각장애인은 이것이 전부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아하! 눈을 떴다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깜깜하게 살던 사람이 빛을 느끼게 되었으니 날아 갈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줄 압니다. 자기도 나무처럼 걸어 다니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눈을 떴으니 예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 멋진 사람이 되어 살겠다는 각오 내지 결단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인사를 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끼우뚱 끼우뚱 하며 걸어가려고 하는데, 다 나았다고 생각하니깐, 잠깐…!
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를 붙잡더니 눈에 두 번째 안수하셨습니다. 환자는 의아해 했을줄 압니다. “아니 다 나았는데 왜 또 귀찮게 구시나.” 두 번째 안수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전보다 더 이상한 느낌입니다.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눈을 떠서 사물을 하나 하나 열심히 바라봅니다.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만 안 움직이는 것은 안 움직입니다. 첫 번째 안수 후에는 모든 것이 움직였는데…. 이제는 사람인지 나무인지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짜 보게 된 것입니다. 아까는 한 눈을 뜨고 보았다면 이제는 두 눈을 뜨고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안수를 받고 빨리 달아나지 않은 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졌으니 말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또 궁금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집으로는 가지만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마을에서 고치실수도 있으신데 데리고 나가시더니 이제 다 고치신 다음에는 다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자는 그 이유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보기만하면 됬지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 마을에 대해서 무엇인가 꺼리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 마을에는 보지 못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면에 대해서 잠시 후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두 가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한 번에 또렷하게 보이게 하실 수 있으셨는데 두 번에 걸쳐서 안수를 하신 점. 또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점. 본문 말씀은 두 가지 궁금한 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전의 양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두 번째가 해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먼저 예수님께서는 왜 두 번씩이나 안수하셨는지 이유를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첫 번째 안수로 반만 보게 하고 두 번째 안수로 온전하게 보게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봐야 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안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주어진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아니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본문 앞뒤의 내용이 크게 도움이 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 귀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가 백점을 받았습니다. 여기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잠시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한 가지 눈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예수를 보는 눈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 안수하신 이유는 곧 인간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음을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과 예수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당시 베드로는 세상을 보는 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는 눈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두 번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침도 뱉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눈이 됨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소유한 채 세상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얼마나 멋지게 보이겠습니까? 첫 번째 눈은 지성의 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눈은 영성의 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눈이 합쳤을 때 예수님의 눈이 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아직까지는 지성의 눈은 가지고 있었지만 영성의 눈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후에 자기를 사탄이라 부르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본 후 영성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최고의 사도가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영성의 눈을 소유한 자가 되어 가십시다. 그러면 영성의 눈을 소유한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그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옮겨간 장본인인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후에 영성의 사도가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사도베드로의 고백 중 이것이 아마 최고의 금언일줄 압니다.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베드로는 하찮아 보이는 세상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왕 같은 제사장!” 그의 눈이 변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보는 위대한 눈을 소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은 요즘 식으로 하면 ‘대통령 같은 교황’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의 눈을 소유하였을 때 그는 하찮은 사람들을 향하여 ‘대통령 같은 교황’이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영성의 눈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예수의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아직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소서.”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선언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
교우 여러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을 바라본 만큼 우리는 영성의 눈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웃을 예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안 풀렸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성의 눈을 소유하게 된 이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웃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마을에 얼마나 필요합니까? 특히 우리가 사는 보스톤은 이러한 외침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서로를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칠 때 이 보스톤은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진심이었을까요?
H.G.웰스(H.G.Wells)라는 분의 ‘The Country of the Blind(시각장애인들의 나라)’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높은 곳을 팀과 함께 탐험하다가 혼자서 절벽으로 떨어집니다. 다행히 눈으로 덮힌 절벽이라서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마을은 전설의 마을이었는데 앞을 못보는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I can see.”라고 말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see?” 처음 듣는 말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바위에서 튀어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덜 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말도 더듬는다고 생각하면서 한마디로 개발이 덜 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손을 꼭 붙잡고 안내를 하게 합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는데 주인공은 말합니다. “I can see it(나는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답변합니다. “There is no such word as see(볼 수 있다는 말은 없어). 어리석은 말 고만해.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따라와.” 이러면서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그곳의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됩니다. 청원을 하였는데 부모님은 못마땅합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싫습니다. 그러면 이 어리석은 자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는데 그곳 의사가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주인공의 두뇌가 병이 들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데, 두뇌가 이처럼 개발이 안 된 이유를 찾았다고 합니다. 두뇌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눈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두뇌에 손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눈을 빼어내면 두뇌도 좋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딸을 시집보내도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합니다. 주인공은 수술하는 날 아침 자신의 눈이 없어지는 날 아침 탈출을 합니다.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소설입니다. 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있습니다. 눈을 빼야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을 보면서 살아간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자라는 편견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정말로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지성의 눈을 우상화하고 있는 마을에 들어가면 도리어 영성의 눈을 소유한 자들은 어리석은 자라고 핍박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보게 된 사람에게 마을로 갈 것을 삼가하고 있습니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보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보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성의 눈을 소유한 사람들이 지성의 마을에서 고난을 받을 것을 보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시기에 고난을 당하시게 되어 있으셨습니다. 지성만이 우상이 되어 있는 세계에 참 영성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게 되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말씀하셨지만, 스스로 먼저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을 영성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고난을 당합니다. 지성의 세계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최고의 삶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은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갑니다.
최근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옮겨 간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문학비평가 이어령 교수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따님의 병 때문입니다. 1992년, 이 교수님의 딸 민아 씨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에 두 차례나 암이 재발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민아 씨의 작은 아들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로 판명나면서 민아 씨는 밤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아들의 일까지 생기자 그녀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눈이 점차 흐릿해져 갑니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는 시력을 잃은 딸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기적과 같이 따님도 낫고 손자도 낫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기적은 지성의 사람 이어령 교수가 영성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최근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한 때는 지성의 사람으로서 영성의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지성의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비웃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하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때로는 경멸조로 때로는 질책하는 투로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 위선자 아니야? 당신 같은 사람은 그저 성서 보고 신학책 읽고 기도드리면 됐지 왜 교회 나가서 나 예수 믿는다고 떠드느냐 차라리 무교회주의자가 되지.”
하여튼 계기가 어떻게 되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그는 두 가지 눈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을 예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교우 여러분, 지성의 사람으로 머물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의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의 눈을 소유한 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외치십시다. “왕같은 제사장!”
말씀을 거둡니다. 이어령 교수님 가정에 이와 같이 놀라운 기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딸도 병에서 낫고 손자도 나았지만 큰 손자가 버클리를 졸업하고 법대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코마에 빠지더니 손도 못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치의 병들을 치료시켜 주셨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건강한 아이를 데려 간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두 사람을 기적처럼 고쳐 놓아주시고 멀쩡한 한 사람은 갑자기 데려가시고…. 따님은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는 이사야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손자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영성의 사람 이어령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씁니다.
“향기로운 비가 내린다.
너 지금 거기에 살아 있구나.
표주박으로 은하의 강물을 떠서
잘 있다 잘 산다 말하려고,
너 지금 그 많은 비가 되어
오늘 내 문지방을 적시는 구나
비야 향기로운 비야.”
예수의 눈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손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도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손자의 모습은 일류학교를 졸업하고 장래가 촉망된 변호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손자의 모습은 그 것과 비교도 안 되는 대통령 같은 교황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손자가 하나님 품에 안겼을 때 그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과 같은 교황이 하나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영성의 사람에게는 비까지도 향기로운 비가 된것입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을 소유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눈을 소유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최고의 노래를 부릅니다. “왕 같은 제사장.”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