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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소망이 있사음은

날짜 : 2010.06.2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오히려 소망이 있사음은
성경본문 : 예레미야 애가 3장 19-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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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가 뉴욕 거리를 걷다가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개구리는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때 잘 생기고 돈 많은 증권 거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개구리로 변해버렸습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내 입에 키스해준다면 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겁니다.”
한 여자가 몸을 굽혀 개구리를 집어들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두 여자는 계속해서 걸어갑니다. 다른 한 여자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개구리 입에 키스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 놓을 작정이니?” 그녀는 대답합니다.
“아니, 나는 말하는 개구리를 가지고 싶을 뿐이야.”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면으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일견해서 들으면 욕심 많은 우리들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개구리의 애처러운 요구를 들을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말하는 개구리를 애완용으로 갖고 싶어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들의 키스를 통해서 개구리가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는데 우리는 도리어 말하는 개구리를 갖기 원해서 키스는 커녕 말하는 개구리를 우리 주머니에 넣지는 않나요? 반면 어떤 분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내가 바로 개구리인데, 누가 와서 나에게 키스하면 내가 본래 모습을 되찾을텐데….”

이번에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서 과학수업을 하던 중에 실험용 생쥐가 도망쳐서 어디론가 숨어 버렸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열심히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두 제 자리에 앉히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으니 스티비 모리스에게 부탁해야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스티비에겐 무리예요!”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사실 스티비 모리스는 시각장애자였습니다.
“그래, 스티비 모리스는 시각장애자야. 그래서 무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어. 스티비는 눈이 불편하지만 대신 신에게 멋진 능력을 선사받았어. 그것은 바로 청력이야. 그 능력을 활용하면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다고 선생님은 믿어. 스티비 모리스! 부탁해.”
스티비 모리스는 기대에 부응하듯 실험용 생쥐를 찾아냈습니다.
그날 밤 스티비 모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그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선생님은 내 귀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까지 내 눈이 불편하다는 현실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없었던 커다란 자신감이 솟아났다.”
생쥐 사건이 일어난 지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신이 주신 선물인 청력을 활용해서 스티비 모리스는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멋지게 데뷔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스티비 원더’입니다.

스티비는 키스를 받았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멋진 선물을 발휘하는 최고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내가 바로 개구리인데, 누가 와서 나에게 키스하면 내가 본래 모습을 되찾을텐데….” 조금 각색을 하면 “나도 스티비 원더가 될 수 있는데 누군가 내게 와서 키스를 해 준다면….”
교우여러분, 아무도 키스해 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도 아무도 안 해줄 것 같습니까? 아무도 키스를 안 해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성이 망한 직후 예레미야가 슬픔을 노래한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1, 2절만 읽어도 금방 예레미야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어두움을 예레미야가 어떻게 하였는지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19절 말씀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예레미야의 고초와 재난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 자체가 그에게 고초와 재난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망하면 그것이 고초와 재난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나라가 어떤 분들에게는 미국이 될 수도 있고 한국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두 나라가 될 수도 있을줄 압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또 다른 고초와 재난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예언을 하다가 감옥에도 갖히고 온갖 고초를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고초와 재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자기 자신의 고초보다는 민족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한국에 IMF가 왔을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이 한국이 망한다 생각하면서 큰 걱정을 안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고초와 재난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고초와 재난을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그런데 이 고초와 재난을 기억할수록 낙심이 됩니다. 당연히 낙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아옴은.” 잠시는 낙심이 되는 것 같았지만 중심에 회상하니 다르게 표현하면 마음에 담아 두니 도리어 소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신기한 체험을 합니다. 낙심이 되는 과거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 두니 도리어 낙심이 소망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하였더니 소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상처에 키스를 한 것입니다. 키스를 하였더니 그 낙심의 이야기 더미 가운데서 소망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궁금한 것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스티비 모리스는 선생님의 키스를 받아 스티비 원더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선생님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죠? 자기 자신이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담되 그냥 담는 것이 아니라 키스와 함께 담는 것입니다. 그 때 새로운 소망이 생겨납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소망이 생겨날까요? 계속 22, 2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 상처에 대고 키스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키스를 하고 있는데 그 상처를 그 어두움을 마음에 꼭 담을 때 아니 우리의 키스를 거기에 가미할 때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에 그 키스는 아침마다 어두움의 이야기를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은 사실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예레미야 애가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5장에 걸쳐서 당신의 애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은 것입니다. 곧 그는 고초와 재난에 키스를 한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을 체험합니다. 아침마다 체험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인자와 긍휼을 체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좋지 못한 과거는 뒤돌아보기도 싫어합니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됩니까?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되어서 찾아옵니다. 반면 고초와 재난에 키스를 할 때 놀라운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오늘은 6/25 60주년 회고 예배로 드립니다. 오랫동안 잊었던 민족적 고초와 재난을 다시 한번 마음에 담기 위함입니다. 한민족의 특권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민족은 많은 고초와 재난을 겪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마음에 담는다면 말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요? 민족적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 시간 먼저 부끄러운 자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도 정부 조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한국인들에게 6/25가 몇 년도에 터졌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중고등학생들중 56.8%가 모르는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청년들은 정확히 나이로는 19-29세 사이는 47.4%가 모르는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국민 전체로는 33%가 모르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젠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이 6/25가 터진 년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6/25는 우리에게 아픔이지만 우리가 마음에 잘 간직하면 새로운 소망의 샘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6/25가 1950년도에 발발하였는데 제주도 한라산 높이가 1950미터랍니다. 제주도민들은 잊어 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젊은이들이 이토록 6/25를 잊게 되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일줄 압니다. 우리들이 민족적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미국은 어떤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국은 그들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고 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아주 생각하기 쉬었습니다. 물론 제가 미국시민권자기에 쉽게 생각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때 한국에서 배운 것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여러분들도 모국에서 배웠을 줄 압니다. 유명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입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서 미국인들은 요즘도 남북전쟁의 아픔을 느끼곤 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과 6/25는 어쩌면 흡사한 전쟁인데 미국은 게티스버그 연설이 남아 있는 반면 한국은 아직도 휴전선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을 보면 함 선생님의 6/25에 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민족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으로 안고 있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었습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일본이 먹었다가도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처음으로 문을 열어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들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었다.”
먼저 여기까지 설명해 드리면 금수강산이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말이 가슴이 아픕니다. 사실 지금 함 선생님은 6/25뿐 아니라 그 전에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모든 민족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6/25를 통해 16개국이 와서 피로 물들인 안타까운 역사를 되새김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 표현합니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그 아들로 민족의 조상들이 나왔듯이 이제 이 인류는 그 아들을 잡아 드렸고, 새 시대, 새 나라, 새 인종을 얻기 위한 제사를 드렸다. 이 ‘한(韓)나라’는 ‘하나의 세계’의 제단이 되었다.”
16개국이 와서 피를 흘렸지만 실제적으로는 UN에 속한 모든 나라가 와서 피를 흘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흘린 피가 온 세계를 하나로 묶는 피였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가 하나가 되는 제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십니다.
“겪어야 하는 고난을 다 겪고, 당하여야 하는 시련을 다 당한 후, 인류는 저들의 빛나는 후손을 이 세계의 모리아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지낸 산) ‘한(韓)나라’에 보내어 일찍이 자기네 조상의 피로부터 성별한 이 땅을 조물주 앞에 영원한 게티스버그로 드리고 눈물과 감사로 기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한국에게 6/25로 인해 피로 물들게 한 이유는 한국을 세계의 제단으로 삼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세계의 게티스버그라는 것입니다. 게티스버그를 통해서 미국에 참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 것처럼 한국을 통해서 전 인류가 참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만끽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에 그는 흠뻑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 선생님에게 이런 소망이 거저 생겨났나요? 그는 민족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그로인해 낙심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고초와 재난에 뜨거운 키스를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키스하시고 계신 것을 알게 되신 것입니다. 결과 그 소망은 한민족만을 위한 소망이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6/25를 깊게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는 먼저 한민족의 밝은 미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니 오늘의 발전된 조국의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되면 될수록 더욱 우리는 우리의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간직하여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6/25를 계속 깊게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몰려와서 그들의 피로 산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세계의 제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솟아오르는 인류에 대한 소망이 우리들의 가슴을 메울 것입니다. 이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국에게 6/25를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6/25는 결코 절망의 날이 아닙니다. 새로운 소망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새로운 인류 역사가 전개되는 날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세계는 인류의 장래에 소망을 가진 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6/25는 바로 그러한 인물들을 필요로 하기에 일어났던 어쩔 수 없었던 사건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밝은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인간 세계에 끝없이 키스를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6/25를 마음에 간직하는 자들은 오늘도 세계에 일어나는 어떤 비극적 상황을 보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
이 노래는 한민족만을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온 인류를 위한 노래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끝으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의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가장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문단입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未完)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링컨은 제일 마지막에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나 저는 중간 문단에 이 표현이 눈에 띄였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링컨은 그날 자기가 연설한 것을 아무도 주목하지도 않고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147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6/25를 회상하면서 게티스버그 연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는 자들은 온 인류를 마음에 담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는 것은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소망이요, 온 인류를 위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고초와 재난을 중심에 회상하십시다. 온 인류를 위한 소망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6/25를 회상하며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는 온 인류를 위한 노래가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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