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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날짜 : 2010.06.1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성경본문 : 시편 43편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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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061310
제목: 하나님을 바라라
본문: 시편 43: 1-5

숭실대학교에서 상담 심리를 가르치는 오제은 교수님이 계십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 상담 심리 전문가 중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교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오늘의 위치에 서기까지는 많은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인데 한참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먹고 싶지도 않고 무엇을 하고 싶지도 않고 누구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몇 달을 이렇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빨이 빠지고 있었습니다. 전문의를 찾아가보니 신경성 스트레스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술 몇 병을 사들고 옵니다. 비몽사몽 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어차피 끝난 거야. 이봐요. 하나님.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요. 당신 앞에서 인생을 아주 비참하게 끝내줄 테니까. 이게 당신이 원한 게 아니었나요? 아주 비참하게, 죽어가는 꼴을 보시라구요. 이번엔 날 절대로 막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술을 마십니다. 사나흘이 지난 다음입니다. 다음과 같이 계속 글을 써내려갑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둠 속 어디선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의식 저편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렸다. 한참 귀 기울여 듣다보니 그 소리는 슬픔에 가득 차 있는, 그 누구도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통곡의 소리였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우는 걸까?’ 통곡 소리가 엄청나게 크고 기이하긴 했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쩐지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울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세요?’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아버지 왜 울어요? 뭐 서러울 게 있다고 그렇게 우세요?’ 나는 허공에 대고 묻고는 한참 동안 반응을 기다렸다. 답변이 없었다. ‘아버지가 아닌가? 혹시…. 하나님이세요?’ 묻고 보니 바로 그렇다는 느낌이 왔다. ‘하나님이셨군요. 그런데 왜 우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 때문이예요? 에이, 이제 와서 운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울지 마세요.’ 통곡 소리가 멎은 지 한참 뒤에 이런 대답이 조용히 들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 네가 너 스스로를 학대하고 저주하니 내가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 슬프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참 내 그럼 내가 이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주셨어야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신경도 안 쓰다가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내 멱살 잡은 놈 손목을 비틀어버리든지, 마누라가 떠나가기 전에 무슨 수를 내줬어야죠. 이빨도 다 뽑히게 해놓고, 이제 다 필요 없어요. 난 살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다구요. 난 인생 셔터 문을 내렸어요. 다 끝났다구요.”
“통곡소리 가운데 다시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제은아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나는 목회에도 실패했어요. 그래도 괜찮다고요?”
“괜찮아.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야.”
한참 있다가 다시 물었다.
“나는 가정도 흔들리고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괜찮아.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야.”
“나 목회 안 할래요. 그냥 어디 캐나다 시골에 들어가서 이름도 바꾸고 구멍가게나 하겠어요. 그래도 좋으세요?”
“그래 네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규제 속에 갇혀 살았었다. 금욕해야 하고, 절제해야 하고 엄숙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너 괜찮다’하실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하나님은 내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글을 마칩니다.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살을 꿈 꾸었던 온타리오 호숫가에 서서, 나는 찬란한 햇볕을 쬐며 감격해하고 있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심정이었다. ‘나는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니야’ 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 거리며 마음껏 햇살을 누렸다. 어제는 죽고 싶어 견딜 수 없어하고, 오늘은 찬란한 햇살 앞에서 인생의 기쁨과 축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제은 교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제은아,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래 네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 후 그의 삶은 전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제는 남을 위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그토록 바꾼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살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런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나요? 이와 같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오 교수님의 그 귀한 체험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사랑의 고백을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 바랍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오 교수님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시인은 원수들에게 둘려 쌓여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반면 3절과 4절을 보면 시인은 오 교수님과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먼저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릴까요?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시인은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 가운데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과 오 교수님과의 같은 점이 있고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두 분 다 극락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른 점은 시인은 원수로 인해서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 교수님은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단지 자살 충동이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 교수님이나 시인이나 모두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오교수님처럼 자신의 문제에 빠지지도 않고 또 이 시인처럼 원수들에게 둘려싸이지 않고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수는 없을까? 이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멀리서 시인과 오 교수님을 살펴 보면 결코 이들이 겪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같은 문제입니다. 시인에게는 이웃이 원수였습니다. 오 교수님은 자신이 원수였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원수였습니다. 둘 다 원수로 인한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정말로 두 분은 같은 배에 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인은 자신이 버림 받은 것을 고백합니다. 오 교수님도 자신이 버림 받은 것을 고백합니다. 버림받은 이유는 원수인데, 두 분다 원수를 안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웃이 원수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원수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시인은 지금 두 원수를 다 포함해서 고백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곧 때로는 원수가 자신이 되고 때로는 원수가 이웃이 됩니다. 자신이 원수가 되던 이웃이 원수가 되던 그 원수들은 우리들의 삶 속에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두 가지 원수를 다 갖고 계실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둘 중에 하나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안고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실 줄 생각됩니다. 나 자신이 원수가 되어서 많은 상처를 입으신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또 다른 분들은 이웃에게 받은 고통을 안고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자신이 문제가 되었던 이웃이 문제가 되었던 우리는 똑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고통이 바로 2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한번 봉독해 드리면,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한 마디로 우리들의 고통은 ‘버림받은 고통’입니다. 원인이야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이던 상대방의 잘못이던 우리가 받은 상처는 우리들에게 같은 아픔을 남겨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오늘의 시인은 이 ‘버림받은 고통’을 안고 스스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버림받은 고통의 에너지를 가지고 선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 에너지를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는 에너지로 바꾸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버림받은 고통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합니까? 이웃에게 당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갚아지나요? 더욱 상처는 깊어지죠. 한편 자신의 문제는 하루 속히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약으로라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급한 대로 고비는 넘기게 하지만 완전한 해결은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반면 시인은 자신의 고통의 에너지가 사용되어야할 최선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는 에너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조이스 러프 (Joyce Rupp) 이라는 저술가가 당신의 책에서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분은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그룹과 함께 등산을 하였는데 좀 뒤쳐지더니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과 함께 ranger (안내인)이 함께 뒤쳐졌습니다. 두 분 다 지도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당연히 안내인과 함께 있으니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안내인이 말합니다.
“앞 장 서세요. 제가 뒤따르겠습니다.”
“저는 길을 전혀 모르는데요.”
“사실 여기는 지도가 없는 산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찾아 갈수 있습니다. 제가 뒤따르겠습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너무 놀랍니다. 지도도 없이 자기보고 앞장을 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최소한 안내인이 앞장은 서지 않지만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 험한 산 정상에 무사히 올라갔습니다.
이 여인이 정상에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상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는 자기를 뒤에서 바쳐 주는 안내인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시인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어떻게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정상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데 그는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통을 안고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사모했습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정상을 향하고자 하는 시인을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끌어줍니까? 정상을 갈망하는 자들만 끌어줍니다.
시인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도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원수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높은 산이 있었습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이었습니다. 원수가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그의 마음은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받아 그는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종종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원수들의 공격을 당합니다. 그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물론 버림받은 고통을 안고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때 높은 산으로 향하십니까? 원수들로 향하십니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맞은 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돼 냄새가 지독하다. 심지어 승무원도 불친절하다고 갖은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 때 부인의 불평을 듣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자입니다.” 필박사가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종류의 제조업에 종사하시는지요?”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 아내는 항상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입니다.
사실 요즘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수는 불평의 말인 것 같습니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서 불평의 말은 전보다 수백 배 빠르게 번져 나갑니다. 인류 역사상 불평을 하기가 제일 쉽고 또 많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편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 의 소리를 많이 들으면 어느새 우리 자신이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도 됩니다. 불평의 힘은 우리를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불평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 하나씩 그들의 말들을 분석하여서 잘못된 것을 지적할까요? 시인은 이럴 때 어떻게 하였나요? 시인은 원수들의 괴롭힘을 그래도 감수하였습니다. 하나님께만 불평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그리고는 도리어 최고의 길을 선택합니다. 높은 산을 향합니다. 원수에게로 향하지 않습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는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 후 어려운 일이 찾아 올 때마다 그는 노래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는 어려움이 찾아 올 때마다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현미경처럼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계략을 형사가 되어 조사하지 않습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도리어 산을 향합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교우 여러분, 최근에 들은 불평의 이야기들을 잠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몇 차례 들으셨습니까?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얼마나 버림받은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이제는 그 고통을 안고 정상으로 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실 것입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래 네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아울러 한 때 당신을 따랐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끝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는 고통을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그 고백 후 새로이 정상을 향하셨습니다. 그토록 심한 버림을 받으셨기에 더 높게 정상을 향하여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끝내 “다 이루었다” 외치셨습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모두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웃 사람들의 불평소리 사이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티즌들의 비판의 글을 뛰어 넘어 십자가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자들의 발걸음 뒤에 우리를 돕는 천사의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극락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디오피아의 전설에 나오는 한 목동이 있습니다. 소년은 추운 겨울에 혼자서 깊은 산 속에서 한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얇은 옷 하나만 그를 따뜻하게 해줄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추운 겨울밤을 견뎠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대답합니다.
“밤은 혹독히 추었습니다. 하늘이 깜깜해지면서 나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다른 산에 어느 목동이 펴 놓은 불이 보였습니다. 나는 눈을 그 불빛에서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뜻함을 꿈꾸었습니다. 생각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극락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있습니다. 먼저 극락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여정을 돕기 위해서 종종 원수가 나타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되기도 하고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무개야,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래 네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교우 여러분, 우리 자신이 원수가 될 때 말씀을 손에 들고 높은 산을 바라보십시다. 이웃이 원수가 될 때 말씀을 손에 들고 높은 산을 바라보십시다. 우리는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래하십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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