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5.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를 살피사
성경본문 : 시편 139장 17-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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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 더글라스 (Kirk Douglass)라는 유명한 배우를 잘 아실줄 압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삶의 철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이 손을 들어 태워달라고 하면, 곧 히치하이크를 하면 무조건 태워 주는 것입니다. 요즘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많이들 해서 별로 히치하이크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곧 30년 전만해도 히치하이크하는 사람이 꽤 많았었습니다. 그때가 좋은 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더글라스가 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길에서 히치하이크합니다. 물론 태워줍니다. 그 사람은 선원이었는데 이제 막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짐을 뒷자석에 던져 놓은 선원은 더글라스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원 세상에, 아저씨 당신이 누군지 아시오?”
더글러스와 같은 유명한 배우가 자기와 같은 하찮은 사람을 태워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가 막혀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너무나 귀한 사람이 너무도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반면 그 반대도 있겠죠. 하여튼 이 질문은 사실 우리 스스로가 각자를 향하여 종종 던져 봐야할 질문일 줄로 압니다. “원 세상에,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 아시오?” 나의 행동이 나의 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주관적입니다. 더글라스는 남에게 히치하이크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참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반면 차를 타는 선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곧 각자 자신의 주관적 세계가 있습니다.
오늘 졸업예배를 드리는 만큼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주관적 세계를 살펴보겠습니다. 20세미만의 크리스천들에게 온라인 상 토론 주제 1순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을 요즘 청년 크리스챤들이 제일 관심 있어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문신, 피어싱, 신체이식과 같은 신체 변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일 많이 하는 문신이 무엇일까요? WWJD(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할까?). 크리스챤다운 문신입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책에 소개하셨습니다. 어느 분에게 딸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에 답변하기를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학 때 집에 올 텐데, 며칠 전 나를 놀라게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인지 짐작은 가세요?”
“대충 짐작은 가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문신이나 피어싱일 겁니다. 날 좀 도와주세요. 딸애가 그렇게 한다면 등록금을 보내주지 않으려고 해요.”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립니다. 등록금을 보내주지 않는 것이 옳은가요, 아닌가요? 아니 WWJD, 예수님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실까요? 아마 아무 답변 안 하시고 묵묵히 시편 139편을 펼쳐 주시지 않으실까 생각해 봅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얼핏 들으면 문신은 필요 없다는 의미로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그 질문을 피해 갑니다. 문신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중요한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가끔 전국 집회 특히 NCKPC모임을 가면 젊은이들을 초대해서 찬양을 인도하게 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어떤 젊은이는 문신도 하고 피어싱도 한 채로 찬양을 인도합니다. 아직까지도 조금은 거북하지만 처음에는 많이 거북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은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젊은이들에게는 무척 중요하겠죠. 그러나 제 삼자가 문신과 피어싱을 보면서 이웃을 판단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를 위한 주님의 생각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오늘 졸업을 하면서 감사의 시를 쓴다면 모래보다도 우리 몸의 세포숫자로 고백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도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정확히 우리 몸의 세포수가 얼마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그 옛날 모래수가 얼마인지 몰랐던 것처럼, 과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10조(10trillion), 어떤 과학자는 100조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자, 다윗이 자기를 향한 주님의 생각이 세포 수 보다 많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작게는10조보다도 더 많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는 100조보다도 많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세포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피어싱을 하던 문신을 하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신할 때 고통을 느끼는 세포 세포 마다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번 쉐마의 밤에 나눈 말씀입니다. 한번 더 나눕니다. 그 날 슬라이드로 두 가지를 보여 드렸습니다. 하나는 장엄한 우주의 사진, 또 하나도 비슷하게 장엄한 사진을 보여 드렸습니다. 장엄한 우주의 사진을 보여드린 후에 두 번째 장엄한 사진은 무슨 사진이냐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과학자이신 것 같았는데, 세포의 사진이었습니다. 우주와 세포의 사진은 너무도 유사합니다. 그래서 그 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주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가 우리 안에 몇 개나 들어 있다구요? 못해도 10조 내지 100조의 우주 이야기가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수조의 우주 이야기는 듣기는 좋아도 매일 매일 겪어야 하는 한두 가지 반복되는 아픔의 이야기는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요? 사실 한두 가지 아픔의 이야기 속에 때로는 수많은 우주적 이야기도 숨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조나단 (Jonathan)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일찍 하늘나라로 가시고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납니다. 여러모로 동작도 느리고 사고도 느려서 남달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조나단에게 강아지를 하나 사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강아지의 이름을 호머 (Homer)라고 불렀습니다. 야구를 좋아 했던 조나단은 홈런 (Home run)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름을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Homer가 길가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총으로 쏘아서 죽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Homer를 위해 뒷 뜰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줍니다. 어느 날 아침 조나단은 무덤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영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해답이 필요합니다. 저는 Homer를 사랑합니다. Homer는 아무도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은 그 착한 Homer를…. Homer는 저의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저를 사랑했습니다. 제가 밥을 주는 것을 잊어버릴 때에도…. Homer는 저의 동작이 늦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Homer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의 가슴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Homer를 위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은 아픕니다. Homer가 없기 때문에….”
옆에서 기도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울었습니다. 다음 토요일입니다. 할아버지를 위하여 메일을 체크하려고 나갔습니다. 옆에 나무 밑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립니다. 조그마한 강아지가 눈에 띄였습니다. “할머니”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Baby Homer인가 봐요.” 할머니는 서서 손자와 강아지가 즐겁게 노는 것을 바라봅니다. 순간 아침에 보았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침에 낡은 픽업트럭 (pickup truck)이 열리더니 길 옆에 서서 문을 열고 한 강아지를 버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그리면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한 폭군은 조나단의 강아지를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폭군이 원하지 않는 강아지를 버렸습니다. 과정은 이해하기 너무 복잡하지만 두 폭군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할머니는 느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윙크를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식사 준비를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세포 수 보다도 더 많은 생각을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의 한 단면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주와 같이 멋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주와 같이 멋진 우리를 가만히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폭군의 무자비함을 다른 폭군의 미련함을 가지고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 억울하고 아프지만 그러나 그 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치유시켜 주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게 되면 예상치 못하는 일들을 만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조나단의 경우는 일주일 만에 해결을 보았으니 신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깨달았지만 때로는 그 두 가지의 사건이 일년 내지 수년 내지 수 십년 사이 간격을 두고 일어날 경우가 허다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다윗도 이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 아니라 수 십 년이 지나야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절 말씀 이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다윗도 조나단의 아픔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다윗의 논리는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녕 하나님은 끄덕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릅니다.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조나단도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은 일주일 안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아마 아무리 기도해도 뚜렷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다윗과 비슷한 경험 얼마나 많이 합니까? 자기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하나님은 아무런 답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소리 지릅니다.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번에 졸업을 하시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졸업생 교우 여러분, 사회에 나가 살다 보면 별 일을 다 당하게 됩니다. 조나단이 만난 폭군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다윗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때는 조나단처럼 1주일 안에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적이 훨씬 많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무리 하나님께 아뢰어도 응답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죠? 응답이 있을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까요?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이 없으실 때 어떻게 하였나요? 23, 2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다윗의 이 고백을 하여야 할 줄 압니다.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모습을 더 이상 하나님께 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죄를 하나님께 더 이상 고자질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영원을 항하여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나의 원수가 당신의 원수라고 협박하면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도 소식이 없을 때 우리는 조용히 다윗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침팬지와 사람을 유전적으로 비교해 보면 97%의 DNA가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3%로 인해서 사람과 침팬지는 구분이 됩니다. 사람과 침팬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유전학적으로는 그 차이는 3%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과 침팬지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입니다. 침팬지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유전인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깨달은 마음입니다.
침팬지의 세포나 인간의 세포나 모두 우주와 같은 장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우월성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 과감하게 고백하는 이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살피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을 항하여 가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항하여 가는 자답게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께 “살피소서” 고백할 때 우리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주님은 당신의 보혈로 우리들의 마음을 씻어주십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안에 우주가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영원한 길로 향하는 자들의 입에는 ‘예수 이름’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살피소서”입니다.
졸업생 교우 여러분, 사회에 나가면 아주 바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이야기가 흘러 나오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신지 아십니까? 이 사회에서 1등이 되기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을 항하여 가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며 힘차게 살아가십시다. 그러나 우리의 입에서 ‘예수이야기’가 사라지는 날에는 다시 고백하십시다. “살피소서!”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분이 영국에 있는 워체스터쉬어 (Worcestershire)라는 마을에 중세기 때부터 알려진 병을 고치는 샘을 찾아 나섰습니다. 몇 일 간을 소모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따뜻한 날 한 번 더 삽을 들고 샘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수 시간 땅을 팠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마리의 소가 진흙탕에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치 귀한 보물을 보호하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삽으로 소들을 쫓아내고는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땅이라기보다는 소똥이었습니다. 20분후에 삽이 돌에 닿았습니다. 돌을 치우니 나무로 된 파이프가 나왔습니다. 드디어 샘물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샘물은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소들의 놀이터로 버려진 곳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도 버려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을 가로 막고 있는 더러운 것들을 청소할 때 우리를 통해서 최고로 아름다운 선물들이 세상을 향하여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요?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
교우 여러분, 우리 안에는 우주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위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의 악한 행위로 막힌 샘물이 되곤 합니다. 이 두 모순을 안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힌 샘물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이름을 부르눈 샘물이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주님께 고백하십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