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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날짜 : 2010.03.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다 이루었다
성경본문 : 요한복음 19장 28-30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00328.wmv

어느 미국 사람이 자신의 삶의 혁명을 가져오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자분들은 머리스타일을 바꾸는 분들이 있는 반면 남자 분들은 아예 중처럼 머리를 밀기도 합니다. 좀 점잖은 사람은 수염을 기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분은 아예 자신의 이름을 바꾸길 원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너무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 왔는데 이제는 평범하고 안전한 삶에서 벗어나 좀 화끈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름과 성(last name)을 그대로 두고 미들 네임 (middle name)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이름을 바꾸기 위하여 법정에 갔습니다.
이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서류를 작성했고 여러 번 법정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정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케이스가 있는 날이라서 오래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바로 앞서 법정에 선 사람들은 아주 심각한 케이스였던 것 같습니다. 법정 안에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결국은 보안관들이 와서 에스코트해서 법정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 차례가 되었습니다. 문제없이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법관은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이름이 바뀐 판결문을 손에 쥐고 법정을 나서려는데, 법정 수위가 붙잡으면서 지금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조금 전에 나간 두 사람이 파킹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괜히 잘못 나가다가 피해를 볼지 모르니 나가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바꿔진 이름을 수위에게 보여줍니다. 그의 바뀌어진 middle name은 ‘Danger (위험).’
여러분은 저의 이름을 잘 아시니 제 이름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Young Ghil Lee인데, 곧 저의 미들네임은 Ghil입니다. 이분처럼 저의 이름을 바꾸어 본다면, ‘Young Danger Lee.’ 저에게 가까이 오시지 마십시요.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여 성경에 나온 나그네들을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살펴보았던 이들은 모두 위험한 나그네 길을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라합, 특히 이번 주는 우리가 고난주간으로 지내는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삶을 보면 한 시도 위험하지 않은 시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성경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위험한 나그네의 길을 갔습니다. 이들 모두의 미들네임은 ‘Danger”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성경에 나온 인물들은 모두 위험한 나그네의 길을 갈수 밖에 없었을까요?

이번 주 우리는 마지막 사순절시간을 보냅니다. 영어로는 Holy Week이라고 부릅니다. 한국말로는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고난주간 그토록 위험한 길을 가신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며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 보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40일을 지내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이 땅 위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소개되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시간부터가 위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위험한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한편 주님은 당신의 3년간의 삶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이처럼 평생을 아슬아슬하게 사시다가 이제 역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형틀로 인정되고 있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짧은 절이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줄 아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구약에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구약에 약속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물론 예수님께서 목마르시기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었는데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하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마르다’ 라는 말과 성경을 응하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장면이 이미 시편69:21절에 기록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69:2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와서 자기에게 쓸개와 초를 마시게 하여야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고백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9절 말씀입니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결국 시편69:21절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신포도주를 마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마셨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최근 암투병을 하고 계신 것 잘 아실줄 압니다. 고통스런 암치료를 마친 후 시집을 펴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치료를 받으시면서 썼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신포도주를 받으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 것이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들어하는 내게 어느 날 예쁜 영양사가 웃으며 말했다. 물도 음식이라 생각하고 아주 천천히 맛있게 씹어서 드세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왜 하나님께서 이해인 수녀에게 암투병을 하시게 하셨는지 한 가지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입도 타고 식도까지 다 타서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든 고통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사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세포 세포가 다 타셨습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은 신포도주를 입에 대십니다. 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마지막 남아있는 시편 69:21을 응하게 하시려고 모든 세포는 다 타 있었지만 예수님은 신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땅에서의 최후의 말씀을 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가장 위험한 나그네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그래서 외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의 질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의 미들네임을 ‘위험’으로 하셨어야 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위험한 길을 가셔야 하셨는가? 물론 많은 분들은 해답을 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우리들 죄 때문이지.” 그 생각은 잠시 접어 두시고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십시다. 같은 결론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사실 구약에 보면 예수님의 미들네임이 ‘Danger’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는 ‘예수’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곧 ‘예수’가 ‘여호수아’이고 ‘여호수아’가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구원자’, 좀더 정확히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 전체에서 나타나 있지만 특히 여호수아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을 제일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모습을 살펴 보면 왜 예수의 미들네임이 ‘Danger’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와 여호수아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금방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여호수아도 모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시절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지만, 여호수아는 이제 광야의 삶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는 모험을 시도합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청동기 문화에 살고 있는 가나안을 침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모험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미들네임은 ‘Danger’였습니다. 예수님이 여호수아를 따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왜 ‘Dangerous’한 사람일수 밖에 없었는가 알게 되면 예수님이 왜 그렇게 위험한 길을 갈수밖에 없었는지 실마리가 잡히게 될줄 압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여호수아와 예수의 또 다른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 안식을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안식을 준분이십니다. 곧 여호수아가 그처럼 위험한 길을 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위험한 길을 가신 이유가 쉽게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온 인류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곧 온 인류의 죄를 사하게 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그 누구도 갈수 없는 위험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제 왜 이 두 분의 미들네임이 ‘Danger’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밝혀진 것 같습니다. 그들은 큰 것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안식을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온 인류의 안식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위험한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미들네임은 ‘Danger’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큰 꿈을 가질 때 큰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어느새 우리들의 미들네임은 변합니다. ‘Danger.’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길 원했습니다. 순간 그의 미들네임은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인류의 아비가 되길 원했습니다. 복 그자체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의 미들네임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안식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사하길 원하셨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미들네임은 바뀔 수 밖에 없었습니다. ‘Danger.’

금주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자 고난주간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 너무도 엄청난 꿈을 가지셨기에 온갖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바라보십시다. 우리를 위하여 위험한 길을 가신 주님의 모습을 만나십시다. 아울러 우리도 주님을 본받으십시다. 주님처럼 큰 것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는 삶의 결단을 하십시다. 우리도 위험한 나그네가 되십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나그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큰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나그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참된 나그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나그네’라고 말씀드리고 보니 질문이 떠오릅니다. ‘참된 나그네가 있고 거짓 나그네가 있는가?’ 저는 나그네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피난민,’ 또 하나는 ‘순례자.’ 이 둘은 밖으로 보면 참으로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분명 나그네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 둘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이 둘은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이 면은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향하여 가느냐가 한 사람은 피난민 한 사람은 순례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피난민은 자기의 삶의 안정을 향하여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이유가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가 온 세상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이들의 미들네임은 ‘Danger’가 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Danger’ 같습니다. 그러나 ‘안락’입니다. 안락을 향해서 갑니다. 반면 순례자는 삶의 큰 목적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보다 더 큰 목적을 안고 갑니다. 한 가지 목적이 이루어지면 더 큰 목적을 향하여 갑니다. 아니 더 큰 목적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미들 네임은 항상 ‘Danger’입니다.

얼마 전 저희 교우님들 중에 미들네임이 ‘Danger’인분을 만났습니다. 요즘 그 사람을 피해 다니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 분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안수집사 교육 시간에 ‘어머니 교회’라는 주제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집사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셨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몇년전부터 보스톤 한인 교회는 저의 어머니 교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저에게는 교회를 향한 큰 꿈이 있습니다. 저는 제2희년 행사위원장이 되어서 멋지게 저희 교회 사역을 꾸려나갈 꿈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교회가 제2희년을 맞이하려면 43년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벌써 43년 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아마 장수의 비결까지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꿈을 그대로 이루시던가 아니면 더 크게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험한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라합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 집사님께서 제2희년의 꿈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그러한 꿈을 가졌습니다. 조금 전 여호수아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호수아와 함께 처음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갈렙이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이 둘만 긍정적인 보고를 모세에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첫 정탐을 마치고 40년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한 유명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청년들이 좋아하는 복음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구했던 그 땅은 가장 험한 땅이었습니다. 험한 산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산지를 달라고 하였을 때 정확히 85세였습니다. 곧 이 노래는 청년들이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상록회 회원을 비롯한 모든 교우님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입니다. 갈렙은 85세에 가장 어려운 땅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그 나이가 되면 도리어 ‘나에게는 누어서 떡먹기 하는 땅을 주시오’ 말해도 당연지사인데, 그는 도리어 가장 험한 산지를 맡겨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삶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끝까지 큰 삶의 목표를 안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그로 인해 그의 미들네임은 ‘Danger’….

에블린 브랜드 (Evelyn Brand)라는 영국 여인이 1909년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로 떠납니다. 인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산지였습니다. Evelyn이 50세가 되었을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납니다. 모두들 이제는 영국으로 귀국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미들네임은 ‘Danger’였습니다. 나이 70이 되었습니다. 선교부에서 귀국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는 더 있어도 선교비가 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부 도움 없이 혼자서 계속 당신에게 주신 산지에서 일합니다. 75세가 되었습니다. 말을 타며 선교를 하였는데, 말에서 떨어져서 엉덩이 뼈가 부러졌습니다. 아들이 와서 권합니다. “어머니, 훌륭하게 사역하셨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Evelyn은 거절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녀가 갖고 있는 산지를 정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93세가 되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말을 탈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Evelyn을 사랑하는 이 곳 주민들이 그녀를 가마에 태우고 산지를 다닙니다. 2년간 더. 평생을 위험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danger’라는 미들네임을 안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그네이십니까? 피난민이십니까? 순례자이십니까? 무엇을 향하여 가십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에 따라 우리의 나그네길은 결정이 됩니다. 이번 고난주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참 나그네가 되기로 결단하십시다. 순례자가 되기로 결단하십시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구하십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구하십시다. 새로운 미들네임을 소유하십시다. “Danger.”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호산나 찬송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에 주님은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가롯유다에게 팔리신 후 베드로에게 배신 당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기에 침묵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저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통해 그래도 주님의 고난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인 수녀가 다음과 같이 은연 중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제목은 ‘병상일기2.’

“아플 땐 아프다하고
신음도 하고
슬프면 눈물도 많이
흘리는 게 좋다고
벗들이 나에게 말해주지만
진정 소리 내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는 나의 아픔과 슬픔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
그들은 내게 딱 부러지게
대답은 안 했지만
침묵을 좋아하는 눈빛이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지
끝내 참기로 했지.”

우리 주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가만히 끝까지 참지 않으셨을까요? 도리어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셔서 마지막으로 고통 중에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위험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갈 길을 마친 후 외치신 것입니다.
“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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