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3.2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그네 야곱
성경본문 : 창세기 30장 25-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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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권태를 느낀 어떤 사람이 여장을 등에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곳 저곳을 살피면서 행복을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나그네와 함께 행복을 찾아 떠나 볼까요? 그가 먼저 들른 곳은 소문난 부자 마을이었습니다. 나그네는 한 부잣집 분주한 마당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마당 한 쪽에는 넓은 곳간이 있고, 그 속에서 일꾼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그네는 서성거리고 있는 어느 지게꾼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물어 보았습니다.
“저 곳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쥐들이 하도 많아서 쥐를 잡느라고 그런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이렇게들 서 있습니까?”
“쥐를 다 잡고 쥐가 먹다 남긴 작년 낟알들을 모두 쓸어낸 후에야 햇곡식을 곳간 안에 들여놓을 것 아니겠소.”
나그네는 기가 딱 막혔습니다. 그들은 쓸어낸 낟알들을 주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길을 걸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행복이 없어.”
나그네는 다시 선비 마을로 발을 옮겨 갔습니다. 소문난 선비의 집은 초라했습니다. 부잣집과는 너무도 대조가 되는 집 모양이었습니다. 선비가 글 읽는 소리가 밖에까지 또렷이 들려 왔습니다. 그 글 읽는 소리 가운데에 한 글귀가 귀에 머물렀습니다. ‘심선연’ 마음이 선한 연못이 된다. 나그네는 무릎을 쳤습니다.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인기척이 나서 돌아다보니 남루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한 아낙네와 세 어린아이들이 싸리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선비의 부인과 자녀들 같았습니다. 부인은 손에 바가지를 들고 동냥을 다녀오는 행색이었습니다. 나그네는 크게 실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여기에도 행복은 없어.”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찾아보기로 하자, 왠지 지배욕만 있으면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권력 말이지.” 이렇게 외치면서 나그네는 큰 권세가의 성으로 발길을 옮겨 갔습니다. 그 성에 가자마자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성은 언제나 권력 다툼이 끊이질 않았답니다. 그들은 항상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배만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울 계속 이어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사이 며칠 동안은 그 싸움이 너무도 잔학해서 아마 두 세력이 다 몰살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그네는 무서움에 질려 곧 대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오, 행복은 두려움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숲 속으로 깊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숨이 차 어느 나무 아래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등골에서는 식은땀이 싸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도 귀찮게만 여겨졌습니다.
잠결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새 둥지 속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어미새 품속에서 새끼들이 머리를 삐죽삐죽 내밀면서 재롱을 부리는 소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미새 품속으로 깊이깊이 파고 들어갔습니다. 나그네는 숨을 죽인 채 시간을 정지시키고, 이 장면을 거듭 눈 속에 담아 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새겨진 영상들이 쌓여 나갔습니다.
오랜 정지된 시간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왔나 봅니다. 어미새는 슬며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듯하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엄마 없는 둥지는 빈 집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새끼새들은 모두 목을 치켜 올리고, 작은 주둥이를 벌려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찾는 애절한 자연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나그네의 마음은 뭉클해졌습니다.
한참 있다가 어미새는 다시 나타났습니다. 새끼들은 서로 다투어 목을 쳐들고 주둥이를 벌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미를 그리며 반기는 창조의 소리였습니다. 어미새는 집어 온 먹이를 부리로 새끼 입 속에 집어넣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며 하나씩 어미의 생명이 새끼들에게 수혈되어 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어미 새는 다시 새끼들을 품 속에 안았습니다. 몸을 몇 번이나 움직이면서 따뜻한 품 안에 새끼들을 사랑으로 조여 갔습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는데도 나그네는 꼼짝도 안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숨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도 동의하십니까? 행복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숨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야기의 저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이것에 동의하기에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렸습니다. 참 행복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학식과 권력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각자 사이에 숨은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그 숨은 이야기를 소유한 자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숨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과의 숨은 이야기의 소유자가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숨은 이야기를 소유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잘 아시는 야곱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야곱의 전체의 삶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하기에, 먼저 짧게 소개해드리면….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팟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삽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주려고 했던 축복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갈취합니다. 화가 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멀리 외삼촌 집에 피난 보냅니다. 외삼촌 집에서 일을 하는 댓가로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 합니다. 두 딸을 맞이 하였으니 한 딸에 7년씩 해서 14년을 섬기게 됩니다. 14년 동안 일을 열심히 해서 이제 외삼촌 라반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14년이 지난 어느 날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합니다. 25, 26절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14년 동안 일했으면 두 딸을 얻기에 충분했다고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이에 라반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아주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처음에 야곱과 라반의 계약은 두 딸이었습니다. 물론 정확히는 동생 라헬이었습니다만 언니를 뒤로 하고 동생을 먼저 보낼 수 없다고 해서 둘을 다 보낸 것입니다. 이 두 딸을 위해 14년을 일한 것입니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라반은 ‘네 품삯을 정하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주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두 딸 말고도 더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감사하다고 말할까요? 29절입니다.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아니 품삯을 말하라고 하면 말하면 됐지 말이 많습니다. 사실 계약상으로는 두 딸만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간다고 하니 라반은 그러면 두 딸에다가 품삯을 정하라고 합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감사합니다” 말만하면 되는데, 야곱은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은 한 대 때리고 싶지만 꾹 참고 말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야곱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후 이야기를 보면, 야곱이 제시하는 것은 양과 염소 중에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나 검은 것을 자기 것으로 나머지는 외삼촌의 것으로 하자고 제안합니다. 라반이 마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야곱의 소유가 될 만한 것이 곧 점이 있고 아롱지거나 검은 것이 많지 않은 것을 알았는지 라반도 쉽게 OK합니다. 그래서 그 날 라반은 야곱의 소유를 한 데로 다 모으고 그것을 자기의 아들이 지키게 합니다. 반면 라반은 자기의 것은 야곱이 지키게 합니다. 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가축은 라반의 아들이 지킵니다. 라반의 것은 야곱이 지킵니다. 그런데 라반의 양과 염소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양과 염소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은 안 되었지만 여기까지 보면 아마 하얀 것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마음 놓고 yes 했고 자기의 가축을 야곱에게 지키게 하였을 줄 압니다. 아마 야곱의 손이 닿는 곳에 축복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37절 이하 말씀을 보면,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가지의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 껍질을 양떼가 물을 먹는 물 구유에 향하게 하였습니다. 물을 먹으로 올 때 새끼를 잘 배나 봅니다. 39절 말씀입니다.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자 야곱이 지키는 양과 염소는 모두 라반의 것이었습니다. 곧 다 하얀 양과 염소였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실 때 껍질을 벗긴 가지를 세워 두니 이 때 새끼를 배는 것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의학은 공부했었지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믿어야죠. 하여튼 41절 말씀입니다.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 튼튼한 양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반면 약한 양이 올 때는 가지를 두지 않습니다. 약한 하얀 양이나 염소를 낳게 합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잠시 정리를 하면, 야곱은 라반의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중 튼튼한 것들은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야곱의 양들은 라반의 아들이 치고 있었는데 그 양들은 계속 야곱의 소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소유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에게서 두 딸을 얻고 이제는 좋은 가축은 다 갖게 되었습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름 마따나 그야 말로 얌체입니다. 라반에게서 이것 저것 다 빼았고 있습니다. 딸들도 빼았고 가축도 빼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야곱에게서 전혀 배울 것이 없는가요? 지금 이 이야기는 야곱처럼 되지 말라는 뜻으로 창세기 기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하였을까요? 그럴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언급하실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야곱은 물론 얌체지만 그는 행복한 얌체였습니다. 분명 하나님과 숨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얌체짓을 하고 있는지 않은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얌체에게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밥 먹듯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만 있는 비밀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라반이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할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그런데 그 일은 바로 흰 양과 염소는 외삼촌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나의 것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때는 흰 양과 염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숨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해 주실지 알았습니다. 자기가 흰 양들이 물을 마실 때 흰 가지를 세워 놓으면 얼룩지는 양과 염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의 소원대로 행하셨습니다. 그것에 따라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 아닌지 상관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얌체 야곱은 하나님과 숨은 이야기를 소유한 자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의문을 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비윤리적인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시나? 이런 하나님을 과연 믿어야하나?” 저는 이렇게 답변 겸 질문하고 싶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윤리적인 사람에게만 골라서 복을 주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복을 받을수 있을까요?’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윤리적인 사람에게만 숨은 이야기를 허락하신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하나님과 숨은 이야기의 관계를 갖게 될까요?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윤리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숨은 이야기를 창출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주시는 교훈은 얌체 야곱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숨은 이야기의 축복을 주실까요?
야곱의 삶을 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손자였습니다. 곧 그는 택함 받은 자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나그네였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는 택함 받은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은 택함 받은 나그네와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시길 즐기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또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나그네가 아닌 사람들 하고는 숨은 이야기를 만드시지 않으신다는 말인가요? 물론 그렇지는 않겠죠.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숨은 이야기를 만드시기 원하실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의 이야기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나그네가 되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제일 가까워지고 그런 의미로 나그네가 되었을 때를 하나님은 기다리시지 않으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야곱과 숨은 이야기를 펼치길 원하셨습니다. 비록 얌체이지만 야곱이 나그네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숨은 이야기를 펼쳐 가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야곱이 나그네가 되길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이상 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그네들은 숨은 이야기의 소유자들입니다.
아니 나그네들이 숨은 이야기를 안고 살던 안 살던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를 그러한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그네들은 숨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라반이 야곱을 숨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야곱을 그렇게 대했을까요? 더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야곱을 통해 도리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야곱을 그냥 양심껏 대해 주었습니다. 윤리적으로 옳게만 대해 주었습니다.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대해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소유한 자로는 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얕잡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보다 못한 비윤리적인 놈이라고 깔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윤리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는 숨은 이야기를 나누는 나그네 야곱이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나그네를 주제로 이번 사순절 설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윤리적 관념을 벗어난 놀라운 고백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강도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윤리적인 차원을 떠나서 당신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과 숨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강도는 숨을 거둠과 함께, 그 후 낙원에서 예수님과의 멋진 숨은 이야기가 전개 되었을 것입니다. 강도와도 이런 숨은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나그네와도 멋진 이야기를 나누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합당한 비윤리적인 사람하고도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나그네는 어떨까요?
아니 예수님은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과 숨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강도와도 숨은 이야기를 나누심을 통하여 모든 인간들과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시길 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마치 강도와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께 불평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숨은 이야기의 축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웃을 숨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보아야 할 줄 압니다.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던 못 살던 상관없습니다. 강도를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모든 사람들과 주님은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라반의 비극은 그는 윤리적인 사람이었지만 비윤리적인 야곱의 숨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윤리적인 삶 안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삶, 이것이 진정 윤리적인 삶이 아닐까요?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약 30년 전에 미국에 오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구청에 가서 서류를 하나 띄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표는 이미 사 놓았습니다. 그런데 구청에 가 보니 서류가 열흘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저의 사정을 얘기 했더니 방법은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만원만 내면 당장 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간 이것은 불법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급행료야 이것을 가지고 구청에서 유익하게 사용하는 거지 불법은 아니야.” 어느새 저는 만원을 직원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서류를 챙겨서 돌아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종종 그 일이 생각이 납니다. 요즘도 생각이 납니다. “내가 그 때 돈을 안 주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미국에서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이 안되면 생각이 납니다. “그 때…”
그 날의 비윤리적인 행위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은 저와 숨은 이야기의 관계를 끊으셨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신은 분명합니다. 그 일과 상관없이 오늘까지 하나님은 저와 숨은 이야기를 계속 창조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누구 덕분일까요? 십자가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삶을 산 강도에게 이와 같은 멋진 말을 하신 분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의 주님 덕분에 비윤리적인 삶의 주인공인 우리들에게도 낙원은 매일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주님의 이 고백을 묵상하십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시는 주님을 묵상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 전 옛 교우님으로부터 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제목은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난 교인’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영길 목사님
멀리 이국땅에서 힘든 공부를 하는 저같은 유학생에게는
목사님의 그 따스한 미소는 언제나 아버지의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렇게 목사님의 말씀과 함께 한 5년 반의 시간을 뒤로하고
갑작스레 위독해 지신 아버님으로 하여
지난 2월 19일에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안에서 교제해오던 많은 분들께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정신없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제게 처한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작별의 인사를 고하지 못하였지만,
제 마음만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훗날 보스턴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교회에 들려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저와 같은 처지에 있을 많은 유학생들을 위하여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십시오.
짧은 편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무개 올림
나그네의 고된 유학생 생활이었지만 저희 교회를 통해서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다는 감사의 이메일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이메일을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저는 이 이메일을 받고 자못 놀랐습니다. 저는 이 형제에게 별로 해준 것이 없습니다. 단지 반갑게 교회에서 볼 때 맞이 해준 것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그네인 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미소가 이 형제에게는 하나님의 숨은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미소 하나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미소보다 더 정성이 담긴 사랑을 받을 때 이들은 어떠할까요? 그들은 더 깊은 하나님의 숨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은 그 누구와도 숨은 이야기를 창조하시길 원하십니다. 특히 택하신 나그네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미소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만납니다. 우리는 모두 비윤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택한 받은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와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사랑하십시다.
십자가의 숨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사랑하십시다. 이 말씀은 들어도 들어도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