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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허락하라

날짜 : 2010.01.3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제 허락하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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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시골도로를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운전하다가 그만 차가 도랑에 빠졌습니다. 차는 깊은 진흙탕에 빠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걸어서 가까운 농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가 말합니다. “워윅 (Warwick)”이 당신의 차를 도랑에서 끌어 낼 것입니다.” 밭에는 늙은 노새가 서 있었습니다. 그 노새의 이름이 Warwick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노새와 농부를 번갈아 봅니다. 농부는 또 다시 말합니다. “늙은 Warwick은 그 일을 해 내고 말 겁니다.” 그 사람은 손해날 것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워윅과 함께 도랑으로 갔습니다.
농부는 워윅이 차를 끌수 있도록 밧줄로 묶었습니다. 회초리를 치며 소리를 지릅니다. “끌어라, Fred! 끌어라, Jack! 끌어라, Ted! 끌어라, Warwick!” 그러자 노새는 가볍게 차를 도랑에서 끌어냈습니다.
그 사람은 놀랬습니다. 농부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후 노새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농부에게 묻습니다. “왜 Warwick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있지도 않은 세 이름을 불렀습니까?” 농부는 슬며서 웃으며 말합니다. “늙은 Warwick은 보지 못합니다. Warwick은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 한 팀의 멤버로 생각된다면 힘써 끄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노새와 슬기로운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미련한 노새는 혼자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일을 안합니다. 반면 누가 같이 한다고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서 일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언제나 없는 노새의 세 이름을 부른 후에 마지막으로 Warwick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늘 제직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임직받으시는 분들에게 주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일을 맡기실까요? Warwick에게 일을 부리는 농부처럼 우리를 대하고 계실까요? 혼자서는 일을 안할거라고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일을 맡기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심정으로 일을 맡기시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 장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만나기 위하여서 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세례를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아니 정확히는 그 줄에 서서 당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세례를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다리셨을지 모릅니다. 드디어 당신의 차례가 왔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은 금방 예수가 누구인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메시야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요한은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찌 감히 자기가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풉니까?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의 이 한 마디에 세례요한은 몸이 얼어 붙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세례 요한은 더 이상 세례를 못 주겠다고 사양하지 못합니다. 감히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를 베푸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금 귀에 쟁쟁 울립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것이 합당하니라.” 요한은 많은 의아심이 생깁니다. “함께 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복잡한 생각이 오갑니다. 그러나 “이제 허락하라” 하신 말씀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물 위로 올라 오심과 더불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하늘로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례요한은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감히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공생애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렴풋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요한은 자신이 베푼 세례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셔야 하는 의의 세계를 여는데 한 몫을 담당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일견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오늘 본문 말씀은 제직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과 는 좀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세례를 줍니까? 어쩌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만 있을수 있는 대화나 사건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는 잊어 버리시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만 들으면 좀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하신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어떻습니까? 제직 임직식에 너무도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직 임직식을 맞이하여 임직받으시는 제직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임직을 받으신 분들 또한 앞으로 언젠가 임직 받으실 분들 곧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우리 주님은 처음 소개한 이야기의 농부처럼 그 자리에 없는 세 노새의 이름을 먼저 부르면서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임직시켜 주시길 바라십니까? 워윅처럼 있지도 않은 제직들의 이름을 부른 후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면 좋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의 본성은 워윅가 같습니다. 혼자서 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같이 일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워윅의 주인인 농부와는 정반대입니다. 마치 혼자서만 일시키시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나에게만 고생보따리를 맡기시는 같습니다.
주님은 마치 세례요한에게 모든 일이 다 달려있는듯이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교우 여러분,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지난 주 김용택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는데 김 용택 시인이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추천한 시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시입니다. 제목은 ‘뭘 써요? 뭘 쓰라고요?’ 시를 쓰라고 했더니 이런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쓴 것입니다.
“시써라.

뭘써요?

시 쓰라고

뭘 써요?

시 써서 내라고!

.제목을 뭘 써요?

니맘대로 해야지.

뭘 쓰라고요?

니 맘대로 쓰라고.

뭘 쓰라고요?

1번만 더하면 죽는다

뭘 쓰라고요?

이 녀석아!

장난하냐!”

시를 쓰라는 숙제는 받았는데 도저히 쓸 시가 생각이 안 나니 그냥 자기의 느낌 그대로를 써내려 갔습니다. 너무도 멋진 시가 된 것입니다. 왜 이 시가 김용택 시인의 가슴을 울렸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하다고 봅니다. 시를 써서 내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가슴 깊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는 생전 써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짜내도 나오지 않습니다. 가슴 속에 깊게 담겨진 선생님의 명령은 조용한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그 소용돌이를 그대로 글로 표현했습니다. 멋진 시가 탄생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솔직히 우리의 심정을 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의 명령을 가슴 깊게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명령에 따른 소용돌이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아마 주님도 대견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흉내내 볼까요? 위 어린이의 시를 좀 각색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이제 허락하라.”

“허락하라.
뭘요?
허락하라고.
뭘 허락하라고요?
그냥 허락하라니깐.
왜 나만 하라고 하세요.
우리 교회 일할 사람 많은데.
없다니깐.
왜 없어요.
주소록에 보면 많은데.
1번만 더 말하면 죽는다.
뭘 허락하라구요?
이 녀석아 !
장난하냐!”

아마 세례 요한도 예수님과 이처럼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니 당연히 할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를 창조하신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풉니까? 다투고 다투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세례 요한에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이 녀석아! 장난하냐!” 어쩔수 없이 세례를 베풉니다. 그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역에 큰 몫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제직 임직식과 세례 요한이베푼 예수 세례식과 비교할수 있을까 의혹도 생길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의 공적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위대한 분은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요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그저 예수님을 세례만을 준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령님이 나타나셨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곧 세례 요한의 위대함은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억지로 세례를 베푼 것뿐입니다. 더 위대한 분은 성삼위일체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한 것은 예수님과 잠시 다툰 것 뿐입니다.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제직 임직식에 너무도 적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다툼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허락하라고요? 왜 나만 하라고 하세요?” 이 다툼이 어떻게 보면 헌신의 시작입니다. 이 다툼이 있는 곳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다툼을 세례 요한은 사도요한과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인들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말다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직 임직식은 곧 이웃과의 말다툼에서 예수님과의 말다툼으로 발전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아니 많은 경우 재확인하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말다툼을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모든 의를 이루는 자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과 말다툼하신지가 언제이십니까? 우리 오늘 다 함께 주님과 말다툼하십시다. “뭘 허락하라고요?” 주님의 이 말씀을 듣기까지 말다툼하십시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니렘버그 (Nieremberg)신부님이 그의 저서 “시간과 영원의 차이”에서 신앙을 잃어버린 가엾은 죄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의 덕망있는 부인은 남편에게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권고하며 지옥의 존재를 깨우쳐 주었지만, 그는 완고하게 대답했습니다.
“지옥은 없어.”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이 신비로운 종이를 들고 죽어있는 이상한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큰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무서운 고백이 적혀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안다!”

끝내 지옥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지옥으로 향하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마지막에 이 분의 고백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의를 이루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옥에 가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한다면 아니 주님과 말다툼 끝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는 놀라운 의로운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지옥에서구원하시기 위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의로운 일을 누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신다고요? 우리들과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작은 순종이 지옥으로 향하는 자들의 발걸음을 천국으로 향하게 합니다. “나는 이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이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작은 섬김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작은 시간 작은 기도 작은 물질이 하등 큰 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찮아 보이는 섬김이 지옥으로 향하는 이웃의 발걸음들을 천국으로 향하게 합니다.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우리들의 섬김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과 말다툼 하십시다. 그러고는 말없이 순종하십시다. 주님은 오늘 임직 받으시는 제직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우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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