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12.2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아기가 자라매
성경본문 : 누가복음 2장 39-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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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교사님이 외지에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쳐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파송한 선교단체에게 자신의 형편을 말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을 도울 젊은 선교사를 파송하겠습니다.” 드디어 젊은 선교사가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항구에는 그 마을 추장을 비롯해서 많은 주민들이 환영차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젊은 선교사에게 첫 인사의 말을 부탁하였습니다. 젊은 선교사는 유창한 영어로 말합니다. 늙은 선교사는 통역하려고 옆에 섰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영적 세계와 보이는 현세적 세계가 갈등적 구조를 안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구도 속에서 참된 진리를 고수하는 삶은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어갈 것입니다.”
늙은 선교사는 잠시 어리벙벙해셨습니다. 자기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천천히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주민들은 만족한 채 그 인사말을 가슴에 담습니다.
오늘 성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동안 4주에 걸쳐서 우리는 매주일 촛불을 하나씩 켜가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각자 자기의 삶의 정황에 맞는 기다림을 가지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 이 시간에 찾아오신 우리들에게 아기로 탄생하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위깊게 살펴 보세요.”
그러면 이것을 이어서 말해 볼까요?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위깊게 살펴 보세요.”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아기예수는 그 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아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첫 장면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40절 말씀을 보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기 예수가 점점 자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육체적으로 단단해지며 또 점차 많은 지혜를 소유하게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한편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자라는 모습을 소개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12살 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식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년 예수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사흘 후에 성전에서 찾았는데 선생들 중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있는 소년 예수를 찾았습니다. 이에 소년 예수는 답변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부모님들은 당혹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말과 엉뚱한 일을 간혹했지만 누가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어린 시절의 삶을 소개합니다. 5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또한 누가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소년 예수의 삶을 정리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땅에 태어나면서“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말한 아기 예수는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지는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사랑스러워진다’로 번역했습니다만,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조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이요 완전히 사람으로 자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주 신비스러운 존재로 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예수를 경외감을 안고 바라보지만 지금 누가는 누가 복음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예수는 신비함에 가득찬 모습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누가는 소년 예수가 신비스럽게 성장하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의 초대를 받아서 아기 예수의 탄생서부터 시작하여 아기 예수의 자라나는 과정을 주위깊게 살핀 분 중에 이레나에우스(Irenaeus)라는 초대교회 교부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제자가 폴리캅(Polycarp)인데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입니다. 곧 이레나에우스는 사도요한의 손자뻘 되는 셈입니다. 이분의 신학은 자라남의 신학(Theology of Growth)입니다. 모든 것 안에 자라남의 특성을 찾곤 하신 분이십니다. 아기 예수에 깊게 빠지다 보니 자라남의 신학에 빠지게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 예수는 끝없이 신비스럽게 자라납니다. 이레나에우스는 아기 예수는 끝없이 자라나 모든 인류의 죄를 가리우는데 까지 자라난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그가 이런 결론을 내린 성경적 근거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을 때 스스로 부끄러워서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레나에우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선택한 거친 무화과 잎 대신에 부드러운 동물의 가죽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아주 놀라운 통찰력에 가득 찬 고백입니다. 그런데 실상 이 부드러운 동물의 가죽은 무엇으로 대치됩니까? 예수님의 부드러운 피부로 대치됩니다. 이레나에우스는 아기 예수의 부드러운 피부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당신의 피부로 인간의 죄를 가리려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끝없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모든 사람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끝없이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가리려고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드러운 살결로 모든 인간의 죄를 가리우길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품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끝없이 자라 가셨어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면 실상 예수님은 어떻게 끝없이 자라 갈까요? 끝없이 자라가다간 도리어 괴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함께 태어나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자람과 더불어 예수님도 함께 자라십니다. 왜냐구요? 태어난 아기의 수치를 가리우시기 위하여 거친 무화과 잎이 아니라 당신의 부드러운 살결로 가려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그리고는 소년이 되셨고 청년이 되셨습니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33세가 되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오늘 12명의 어린 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12명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 예수님도 함께 태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기들이 자란 만큼 예수님도 같이 자라시지 않을까요? 이들과 함께 소년 소녀가 되고 청년이 되어 갑니다. 더 이상 클수 없는데 까지 함께 자라십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속 자라시는 방법이 아닐까요? 비단 12명의 아이들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주님은 태어나십니다. 온 인류의 죄와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1950년 12월 22일, 한국땅은 6/25전쟁으로 한참 피로 물들고 있을 때입니다. 물론 세계는 크리스마스 무드로 가득 차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북한의 흥남부두는 연합군 장병 105,000명과 약 1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바람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자유의 땅 남한으로 가는 것입니다. 피난민이 계속 늘어나자, 미국은 193척의 선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때 등장한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였습니다. 이화물선은 7,600톤 규모로 제트연료를 싣고, 부산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이 배의 승선정원은 59명에 불과했습니다. 화물칸에 피난민을 태운다고 해도 불과 천여 명, 미군과 피난민, 그들에겐 악몽과 같은 12월이었습니다. 12월 22일 밤 9시 30분에 피난민들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자정무렵엔 이미 5,000명이 탔습니다.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두엔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주민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태워라.” 외부갑판을 비롯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찼습니다. 다음 날 아침 11시 10분 승선이 종료됐습니다. 승선한 인원은 14,000명 원래 정원의 230배가 넘었습니다. 적군의 공습과 포화에도 마지막까지 항구에 정박해 남은 피난민을 모두 구출했습니다. 그 후,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구한 배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라루 선장은 그 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그들을 안전하게 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피난민들의 국적이나 정치 성향을 문제 삼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것을 조사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구출해야 할 생명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피난민들을 탈출시키기로 한 결정의 현명함에 대해 나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문제라는 것이 저의 확신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습니다.”
라루 선장은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사건을 정말로 잘 이해한 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결로 가리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임을 알고 계셨던 분입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라는 배에 온 인류를 태우시려고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아기 예수호에 태워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아기 예수가 성탄절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아기 예수는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향과 신분을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기 예수 부드러운 살결로 가려진 축복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들의 남은 4각(senses-눈, 코, 입, 귀)도 예수님의 4각이 될 줄 압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귀로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코로 세상을 맛보며, 예수님의 입으로 말하게 될 줄 압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에드워드 글로버(Edward Glover)라는 정신분석가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아주 정상적인 아이는 거의 완벽하게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자기에 도취되어 있고, 도덕적 양심이 없고, 기회주의적이고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나타내고 이웃을 악용하는 습성이 있다. 한 마디로 어른들의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정상적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들이다.”
이 말에 틀렸다고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줄 압니다. 오늘 자녀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부모님들도 반박하지 못할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의 수치를 감싸기 위하여 태어나신 아기 예수 때문입니다. 아기예수의 살결이 모든 아기들의 살결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피부뿐이 아닙니다. 남은 4각도 예수님의 4각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을 감싸기 위하여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환영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자녀들을 아기 예수호에 태우십시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아기 예수호에 태우십시다. 아기 예수호는 모든 사람이 탈수 있는 사랑스러운 배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자꾸 자꾸 커지는 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완벽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배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 때문에 우리 모두도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신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으로 놀라운 세상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귀로 아름다운 세상 소리를 들으십시다. 예수님의 코와 입을 소유한 신비한 존재가 되어 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