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11.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성경본문 : 창세기 1장 24-31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1108.wmv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교육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성공을 꿈꾸는 한 젊은이로부터 인생상담을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고 약속시간을 정했습니다.
청년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프랭클린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그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청년은 눈앞의 광경에 너무 놀랐습니다. ‘아니, 저명한 교육자의 방이 어떻게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지?’ 프랭클린은 청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건넸습니다.
“방이 너무 지저분하지요? 문 밖에서 딱 1분만 기다려요. 대강 정리를 하고 부르죠.”
그리고는 방문을 살짝 닫는 것이었습니다. 채 1분이 되지 않아 그는 다시 방문을 열고 반갑게 청년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때 청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습니다. 방안의 모든 것들은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두 개의 유리잔에는 방금 따른 향긋한 포도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은한 향수냄새가 방안에 그윽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또다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프랭클린의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청년이 마음속 가득한 인생과 사업에 관한 의문을 토해내려는 찰나, 프랭클린이 친절하게 청년에게 말합니다.
“자 건배합시다. 그리고 잔을 비운 후 그만 돌아가도 좋아요.”
청년은 잔을 손에 들고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조금 무안하기도 하고, 그냥 가기에는 억울하고 아쉽기도 해 프랭클린에게 되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여쭤보지 않았는데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합니다.
“들어온 지 이미 1분이 지났는데!”
“1분……. 1분…….”
청년은 뭔가 생각하는 듯 중얼거리더니 입을 엽니다.
“아, 알겠어요. 1분 안에도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일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교수는 이 눈치 빠른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활짝 웃습니다. 청년은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도전을 줍니다. 그 후로 이 청년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물론 1분 안에 많은 일을 해내려고 본인이 시도를 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다음 둘 중에 한 가지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으리라 봅니다. 곧 성공했으면 자신도 1분 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살게 되었을 것이고, 반면 실패했으면 “나는 아니야” 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벤쟈민 프랭클린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벤쟈민 프랭클린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1분 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벤쟈민 프랭클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고의 삶을 살아가는 분 같습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 주일로 지킵니다. 청지기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최고의 삶을 누리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결단하기 위함일 줄 압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인해 기뻐하게 하시도록 결심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내가 정말 잘 주었다”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본문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최초로 청지기의 직분을 받는 장면이 소개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청지기의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대로만 살면 최고의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될 줄 압니다. 벤쟈민 프랭클린보다 더 멋진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 중 마지막 한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간 창조하셨는데 6일째 되는 날입니다. 24, 2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마디로 6일째 되는 날, 땅에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전 5일간은 첫째 날은 빛, 둘째 날은 궁창 곧 하늘, 셋째 날은 바다와 땅과 식물,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여섯째 날에는 땅에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를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계속 여섯째 날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마지막으로 기가 막힌 창조를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실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다스린다’는 뜻에는 care 곧 ‘관리한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맡아서 관리할 자로 사람을 만드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27,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을 알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이브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과 이브에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것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첫 음성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 못하시겠지만…. 하여튼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해서 드디어 70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요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복의 개념은 아닙니다. 요즘은 정복하면 깃발을 꽂고 ‘이 곳은 내 것이다’ 하는 것이 정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땅의 신비를 만끽하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줄 압니다.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뜻일줄 압니다. 농사짓는 분들이 많으신데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하실 때 먼저 지으신 분들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먼저 정복을 했기 때문입니다. 곧 정복의 의미는 이러한 의미입니다.
한편 마지막 부분을 다시 봉독해 드리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아주 바빠졌습니다. 땅을 정복해야 하고 물고기와 새와 동물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얼마나 바쁜 삶이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가정의 잔디를 관리하시느라 어떤 분들은 채소를 기르시느라 봄부터 여름까지 정신없이 지내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 작은 땅도 그렇게 바쁜데 아담과 이브는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주 바쁘게 그러나 아주 재미있게 지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3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가 온 세상을 바쁘게 다스리는 모습을 보시면서 너무도 흡족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 전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정도였는데 이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세상을 관리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무도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아담과 이브는 1분에도 수많은 일을 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1분이 아니라 1초 1초를 최고로 만끽하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하죠? 벤쟈민 프랭클린은 어떻게 보면 예외의 인물일줄 압니다. 우리는 1분이라는 시간이 그토록 소중함을 망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은연 중에 우리가 어디에 잘못 되어 있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28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마지막으로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그토록 좋아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소유하라’라는 단어는 빠져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 소유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청지기의 삶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소유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소유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한 가지는 주셨습니다.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먹을 식물만을 주셨습니다. 다른 것은 주신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 소유입니다. 인간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땅은 물론이거니와 동물들까지 다 청지기일 뿐입니다. 물론 노아의 홍수 이후에 동물들도 인간의 식물 곧 음식이 됩니다. 그러나 창조 시에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들도 일단은 다스림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왜 우리는 벤쟈민 프랭클린처럼 1분에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다스리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소유하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한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두 사람이 땅의 소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재판관을 불러 왔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재판관에게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재판관은 잠잠히 있으라 하고는 땅에 귀를 대어 봅니다. 일어나서 하는 말이, “이 땅이 말하는데 나는 그 누구 것도 아니래.”
오늘날 우리가 참 청지기의 신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도 아닌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산다면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과연 1분에도 많은 일을 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을까요?
교우 여러분, 청지기는 청지기입니다. 소유자가 아닙니다. 소유한다고 생각했을 때 인간의 최고의 삶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최고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유하게 하신 것은 먹을 양식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6:7,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1927년 벅민스터 풀러는 차가운 물속에 몸을 던져 자살할 생각으로 미시건 해변에 서 있었습니다. 첫 아이를 잃은 데다, 파산상태의 신용불량자였고 직업도 없었습니다. 아내와 새로 태어난 딸이 있었지만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의 자각이 풀러의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풀러는 보잘것없고 돈도 없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개인이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봉사하는 삶이란 어떤것일까?’ 이 후 54년 동안 풀러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이것이 실행 가능한 실용적인 것임을 여러 차례 입증해 보였습니다.
이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풀러는 미국 특허권 25개를 따냈고, 28권의 책을 썼으며, 예술 과학 공학 인문학 분야에서 47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미국 건축학회에서 주는 골드 메달과 영국 왕립건축학회에서 주는 골드메달을 포함하여 건축디자인 상을 수십 개나 받았습니다. 또한 전 세계 박물관에 영구소장품으로 보관되어 있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파산한 신용불량자로 자살을 생각하던 풀러는 그 후 성공한 강사로 지구를 57바퀴나 돌았으며 강연 인터뷰 저서 들을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1분에 수많은 일을 해 낸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용불량자가 이런 수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소유를 향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봉사를 향하여 살았습니다. 최고의 삶을 산 것입니다. 참 청지기의 삶을 산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담겨진 하나님의 신비를 정복하고야 만 것입니다.
한편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실 줄 압니다. “목사님, 그러나 지금 우리는 소유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의 방편입니다. 소유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먹을 것만 소유해서는 하루도 살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로는 소유가 필요악이 되어 간 것은 사실입니다. 소유권이 없으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소유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창13:13절을 보면,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왜 하나님은 이제 와서 아브라함에게 소유할 것을 명령하셨겠습니까? 이미 죄로 물든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소유가 필요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후로 청지기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을까요? 땅의 신비를 맛보는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였지만 엄청난 청지기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어떻게 청지기의 축복을 누렸을까요? 얼마나 좋습니까? 소유도 실컷하고 또 청지기의 최고의 삶도 누리고…. 그 이유를 창 14:20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전쟁에서 구하고 빼앗긴 재물들을 다시 안고 돌아 오는 길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리고 20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이 소유문화의 사회에 살면서도 청지기의 축복을 누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에게 돌렸습니다. 그는 실제로 소유를 향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삶을 산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소유를 향하여 사는 분들이 아닙니다. 청지기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끝내 수많은 일을 이 땅에 남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나서 최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소유를 원하십니까? 최고의 삶을 원하십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신부님이 에이즈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에이즈 환자가 이런 놀라운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정말로 살기 시작한 것은, 의사가 제게 에이즈에 걸렸다고 말해 주었을 때부터죠.”
신부님은 묻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살지 않았단 말인가요?”
“꿈적거리니까 살아 있기는 한 것이겠지만, 진실로 자기 생을 산다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한편 신부님이 말하기를 자기가 만난 에이즈 환자 30명중에 절반이 비슷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왜 에이즈환자들은 병이 걸린 다음에야 비로소 삶을 느끼기 시작했을까요?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은 더 이상 소유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소유를 버렸을 때 도리어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최고의 삶을 누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에이즈 없이 최고의 삶을 살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유를 버리는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은 소유를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특별한 삶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