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6.14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고린도 전서 3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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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난한 소년이 비싼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진주를 보자 이 진주를 팔면 온 가족이 평생 먹고 살 돈이 마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소년이 진주를 팔려고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장사꾼들이 몰려 와 헐값에 살려고 여러 가지 계략을 꾸몄습니다. 소년은 지혜로웠습니다. 그 계략이 잘 안 통하자 장사꾼들은 누군가를 고용하여서 이 소년의 진주를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강도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을 보자, 소년은 바닷가로 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주를 바다로 던집니다. 그리고 소년은 평상시와 같은 삶으로 돌아옵니다. 가난하지만 조용한 삶으로….
물론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진주를 다시금 바다로 던지는 소년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낍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생각나는 속담이 있습니다.
“나 못 먹을 밥이라고 재 뿌린다.”
소년은 자기도 못 먹을 것 아무도 먹지 못하게끔 바다에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악의 경쟁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쟁에 몸이 배어 있습니다. 서로 뺏고 빼앗고 그러다가 자기 것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나 못 먹을 밥에 재나 뿌리고 맙니다. 그러는 가운데 귀한 진주는 사라집니다. 이러한 경쟁사회 가운데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제 교회력에 의하면 성장의 계절이 돌아 왔습니다. 초록색 Pulpit scarf로 강단을 장식했습니다. 초록색은 성장을 상징합니다. 모든 나무들이 다투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경쟁사회에서 성장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성장하는 것인가요? ‘성장’ ‘성장’ 하다 보니 이제는 성장이 우상화된 시대가 된 것도 같습니다. 이러한 경쟁 사회에서 참된 성장은 무엇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이 당시 상업도시로 많은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숨김없이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보는 견해를 글로 쓰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의 속한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라는 표현은 신앙적으로 미숙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여튼 고린도 교인들은 이 표현을 듣고 기분이 안 좋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놀랐을지 모릅니다. 세련된 도시 에서 살고 있는 자들인데 어린아이라 하니 말이 됩니까? 세련미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최고로 성숙한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하여튼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더 기가 막힌 표현을 듣습니다. 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젖먹이 어린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궁금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면 과연 성장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시기와 분쟁 가운데 있는 자들을 바로 육신에 속한 자요 어린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좀 마음이 켕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이 분명히 그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살피면 “너희가 육신적인 인간들이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곧 육신적인 인간이 되어서 둘로 갈라져서 서로 팽팽하게 경쟁하고 다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파가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파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경쟁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갈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경쟁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기 때문에…. 경쟁이 몸에 배어 있는 모습 이것이 바로 어린 신앙의 소유자인 고린도 교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우들도 이해가 갑니다. 고린도는 유명한 상업도시인데 상업도시가 되려면 필수적인 것이 경쟁입니다. 많은 상업인들이 모여서 경쟁을 하였기에 그 도시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서로 견제하다 보니 어느새 분쟁과 시기 가운데 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삶 속에 배여 있는 것이 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보스톤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보스톤도 경쟁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도시입니다. 상업도시보다 더 경쟁이 심한 곳이 바로 교육도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교우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학 병원에서 일하시는데 교수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학 교수라고 해서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시기와 분쟁 사이에서 커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보스톤이 아니라 해도 한국인은 경쟁으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 작은 나라가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이 된 것은 경쟁해서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한국인이면서 보스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 다했죠. 우리는 대단한 경쟁의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들 몸과 피에 깊게 경쟁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경쟁심이 정말로 우리에게 성숙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no.” 이 경쟁심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 아니 우리 한국인들은 신앙의 어린이의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지 이 성장의 계절에 계속 자랄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사도바울에게 귀를 기우려 보겠습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경쟁관계로 보았지만 실상은 이들은 협력자였다는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눈병이 걸린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과 아볼로는 협력자라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6절 마지막 부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이들은 배후에서 자라나게 하시는 이가 계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아주 평범한 말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시는 이심을 알지 못했을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만 말씀하지 하나님은 어디로 향하여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무들은 하늘을 향하여 자라는데 우리는 어디로 향하여 자라야 하나요? 그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을까요?
신앙의 성숙함 가운데 지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입니다. ‘산에서 큰다’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산에서 큰다.
언제나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대답 없는 대답
침묵의 말씀
고개 하나
까딱 않고
빙그레 웃는 산
커단 가슴 가득한
바위
풀향기
덤덤한 얼굴빛
침묵의 성자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달래다
호통도 곧잘 치시는
오라버니 산
오늘도
끝없이 산에서
큰다.”
제가 이 시를 읽고 저 나름대로 감상문을 써 보았습니다. 제목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수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큰 산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며 큰 산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서있는 그 큰 산보다 더 커지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죠, 만일 그 큰 산이 하나님이라면 말입니다. 그 큰 산을 하나님이라고 가정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지금 수녀는 그 큰 산과 겨루고 있습니다. 그 큰 산처럼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녀는 더 이상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는 경쟁의 의욕을 잃은 듯합니다. 큰 산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큰 산 앞에 서서 큰 산과 겨루기에 그는 끝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가 자란만큼 산도 자라갑니다. 그래서 더욱 신나게 겨룹니다. 겨루면 겨룰수록 자신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한편 큰 산도 신이나 보입니다. 아무도 감히 당신과 겨루는 이가 없었는데 당신과 겨루는 자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더욱 산은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산의 위대함은 어느덧 수녀의 위대함이 됩니다. 수녀는 또 자란 것입니다. 끝없이….”
어떤 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경쟁하나?”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5장 48절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경쟁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실재로 주님과 겨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까지 온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은 자라게 하시는 이심을 알지 못했던 이유가 자명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자라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경쟁하지 않고는 자라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세상과 경쟁하게 됩니다. 아니 세상과의 경쟁을 위하여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세상과 경쟁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들은 늘 신앙의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쟁과 시기가 늘 그들의 삶에 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전 학원목회를 하다가 이제는 일반 주민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학생들이 더 교회에 열심이죠. 특히 대학원과정 학생들은 논문을 위해서 늘 기도하기 때문에 일반주민들보다 더 뜨겁습니다. 요즘 저희 교회는 안정되어 있지만 그런 뜨거움은 사라졌습니다.” 이 목사님은 좋은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자신의 목표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학위를 받고나면 열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의 경쟁은 이웃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와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경쟁하자.”
교우 여러분, 우리가 왜 아직까지 “내가 못 먹을 밥 재나 뿌리자” 하면서 살아갑니까? 귀한 진주를 바다에 던지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이웃과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 서는 자들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진주를 이웃에게 그냥 주면 주었지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다. 그것 없이도 풍성함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경쟁함에서 오는 최고되심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성장의 계절 하나님 앞에 서십시다. 하나님이라는 큰 산 앞에 서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자라 가십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십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한 걸음씩 하나님을 향하여 자아 가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9, 10절 말씀입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는 자들은 언제나 이웃을 돕는 자들입니다. 이웃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는 것을 돕는 자들입니다. 곧 크신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은 늘 멍하니 하나님의 산만을 바라보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웃을 통하여 또 다른 큰 산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늘 이웃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이웃과 함께 성장하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조쉬 멕도웰(Josh McDowell)이라는 한 학원순회 전도자가 비행기를 탔는데 여 승무원이 장미를 들고 웃고 서 있었습니다. 승무원에게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애인에게 받으셨나요?” 이에 승무원이 답변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저 자신을 위하여 샀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으셨는지요? 혹시 오늘이 생일이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살아 있고 여기에 존재하고 오늘도 이 비행기 내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을 만나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선택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요. 나 자신을 축하하고 싶었답니다.”
남을 섬기는 자신의 모습을 축하하는 삶, 이것이 바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삶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는 자들은 자연히 이웃이 자라도록 섬기는 자들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가슴에 꽃을 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난번 한국의 김연아 선수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많은 꽃을 받았습니다.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경쟁하는 자들도 꽃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안 달아도 꽃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갈 때 그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이 이번 성장의 계절에 누려야 할 축복들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십시다. 우리는 끝없이 자랄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이라는 큰 산에 서게 하도록 도우십시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주간 우리 모두 꽃을 달고 지내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 어느 천주교 서점에 들렸습니다. 책을 사고 나오는데 일하시는 분이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니 곧바로 다음과 같이 저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 순례 오셨군요. 순례 기간 중 어느 때가 제일 좋았습니까?”
순례라는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순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09년도 순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2009순례 기간 중 어느 때가 제일 좋았습니까?” 물으신다면 우리 이렇게 대답하십시다.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성장의 계절이라는 순례의 시간을 지나기 때문이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