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3.29
예배명 :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리라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42-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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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4월 18일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선언을 선포하기 약 1년 전입니다. 곧 아직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입니다. 보스턴에 사는 어느 소년이 마구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영국장교들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내일 영국군대가 미국군대를 쳐들어 갈 것이라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독립이 안 되었으니 미국 독립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소년은 급히 자기가 잘 아는 은 세공사 폴 리비어(Paul Revere)라는 아저씨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사실 폴 리비어씨는 얼마 전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어 왔고 최근에는 영국 해군들의 움직임이 부쩍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던 차입니다. 폴 리비어는 자기 친구와 상의합니다. 이들은 모든 정황을 살핀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영국군은 먼저 렉싱턴(Lexington)을 침공해서 독립군의 리더인 존 행콕(John Hancock)과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를 체포하고 그 후 콩코드(Concord)에 있는 독립군의 탄약고를 공격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 날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스턴 주변에 있는 마을에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리비어씨는 찰스타운에서부터 말을 타고 렉싱턴까지 두시간만에 달려갑니다. 13마일을 달린 것입니다. 찰스타운에서 메드포드, 캠브리지를 지나 달립니다. 마을의 책임자들 집 문을 두드리며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경고를 합니다. 곧 이어 교회는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합니다. 보스톤 주변의 모든 주민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Lincoln) 마을 사람들은 밤 한시, 서드버리(Sudbury) 마을 사람들은 새벽 세시, 앤도버(Andover) 마을 사람들은 새벽 다섯 시 그리고 우스터(Worcester)가까이는 그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드디어 4월19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렉싱턴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 모입니다. 16살에서 60세에 이르기까지 손에 칼과 총을 들고 모여듭니다. 잠시 후 데드햄(Dedham)과 린(Lynn)등 이웃 마을 주민들도 몰려듭니다. 모두 평민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독립군을 얕잡아 보고 마음 놓고 렉싱턴으로 들어가는데 드럼소리가 들립니다. 예상 밖의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독립군의 정예 군인들을 먼저 쓰러뜨립니다. 그리고는 탄약고가 있는 콘코드로 향했습니다. 한편 그곳에서는 전보다 더 큰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영국군은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합니다. 바야흐로 역사적인 독립전쟁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다음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곧 폴 리비어의 밤새껏 말을 타고 달린 것이 미국 독립혁명(American Revolution)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미국판 유관순이야기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줄 압니다. 마치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이 유관순 여사에 대해서 잘 알듯이 미국 어린이 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금방 오신 분들은 좀 생소한 도시들 이름이라고 생각되는 이름들이 있을 줄 압니다만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모두 너무나 친근한 도시들 이름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미국 역사에 너무도 중요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미국합중국이 있게 하는 독립 전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립전쟁은 군인과는 거리가 먼 평민인 은세공사 폴 리비어라는 사람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해진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티핑 포인트(The Tipping Point)”라는 책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글쎄요, ‘분기점’이라고 할까요. 이 책에서 이 분이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세상은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지만 늘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무너질 것 같지 않지만 정확한 곳을 찌르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군대가 무너질 것을 아무도 예측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세공자인 폴 리비어가 가장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역할을 통하여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폴 리비어는 자기가 말 타고 밤새 달리기만 하면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그의 하룻밤의 수고가 세계를 변화시키게 된 것입니다.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대영제국이 무너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제로 설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을 향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서로 고백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시지 않을까요? 절대적으로 움직여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대영제국의 군대가 보스턴에서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무너져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요? 분명히 오늘도 움직여져야 할 것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하여 이 일을 시작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일들을 진행시키실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너무나 잘 아시는 초대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라는 전통과 권위였습니다. 그 전통과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유대교의 전통과 권위만큼 움직이기 어려웠던 것은 없을 줄 압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의 최고의 종교가 된 것은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무너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42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된 이들이 한 첫 번째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밖에 나가서 선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까? 사회정의를 위하여 외치기 시작했습니까?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서로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믿자마자 세상 일에 더 열심을 낸 것도 아닙니다. 온 동네를 다니며 열심히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폐쇄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 교제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쳤기에 이들은 이처럼 폐쇄적인 공동체,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는 자들이 되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교제하라” 사도들이 명령한 것 같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제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직접 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신이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해서 신학적인 가르침을 많이 하였지만, 12사도들은 주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모아 놓은 것이 어떻게 보면 복음서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 중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이들이 이처럼 교제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저는 사도들이 어떤 가르침을 했을까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도 물론 가르쳤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들 가슴에 깊게 팍 들어 온 가르침은 이번 사순절의 주제인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을 줄 압니다. 사도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설교하였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느 날 말씀을 전하시고 계신데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청중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당신의 모친과 동생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형제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서로 형제 자매가 아니겠습니까?”
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곧바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의 음성으로 듣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음성을 통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들 앞에서 하시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서로의 모습 안에서 형제와 자매, 모친과 부친이 되어 있는 축복을 느낍니다. 곧 형제와 자매된 삶을 실천합니다. 교제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제는 두 가지로 꽃을 피웠는데 하나는 떡을 같이 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밥상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기도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도 쉐마의 밤 행사를 가졌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하였죠. 먼저 6:30분에 만나서 밥상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7:30분부터는 예배하며 기도를 같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입니다. 폐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참된 교제를 시작하니 놀라운 일이 더욱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들이 함께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한 결과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교제가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사도들은 더욱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는 안 믿는 사람들은 점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고 있는 믿는 자들은 아마 더 신이 났을 줄 압니다. 자기들의 교제와 기도로 인해서 사도들을 통해 더 큰 역사가 이루어지니 말입니다. 이제는 떡을 떼고 기도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교제를 시작합니다. 44절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이들은 이제 집에서 음식을 해서 음식을 나눠 먹는 것 가지고도 부족함을 느꼈나 봅니다. 더 깊은 교제를 원한 것 같습니다. 같은 형제 자매이니 네것 내것 할 것 없이 물건을 함께 나눕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죠. 46, 47절 말씀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전통과 권위의 유대교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이라고요? 교제입니다. 폐쇄적인 교제입니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떡을 떼며 기도하는 교제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나타납니다. 후에는 그것도 부족해서인지 서로 물건을 나누는 교제로 발전합니다. 이들의 심도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온 세상은 뒤엎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서로를 어떻게 대했기에 밥상공동체를 넘어 물건까지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나? 달리 표현하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는 주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들는 자들은 이웃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되나 궁금해집니다.
말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저의 경험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난 번 안식년에 제가 뉴욕주에 있는 브루더호프(Bruderhoff)공동체에 들어가서 3일간을 지내었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처럼 자신의 재산을 다 바치고 들어와서 함께 먹고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3일간 어느 가정집에 손님으로 지내었는데 숙소는 따로 있지만 그 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먹었고, 점심은 온 공동체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은 저를 호스트 한 가정이 아닌 다른 가정에서 저를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도 해서 기쁘게 찾아 가서 아침을 나누었습니다. 남편이 자기가 왜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원래 천주교인이었는데 교인들끼리 서로를 미워하면서 함께 예배를 보고 같이 성만찬을 나눈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찾다가 이곳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분의 말을 들으면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생겨났나요? 초대교회는 서로의 갈등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갈등을 넘어 서로가 형제 자매인 것을 보는 자들로 인해 생겨 난 것입니다. 분명히 브루터호프(Bruderhoff)에서 제가 만난 사람과 같은 의도의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공동체의 분들의 교제는 어떤 교제였을까요?
저는 다음 이야기에서 참된 교제 안에 있는 한 특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상과학소설가인 레이 브레드버리(Ray Bradbury)가 지은 이야기입니다. 여행객들이 역사이전의 시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기 한참 전 시대로 간 것입니다. 여행자들에게 길을 갈 때 조심하라고 하면서 인도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해서 한 마리의 쥐를 죽이면 우리는 그 쥐로 인해 생기는 엄청난 쥐 자손들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못 밟아 죽이면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죠. 일 년이 지나면 12마리를, 5년이 지나면 1천 마리를, 백년이 지나면, 수백만 마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한 여행자가 질문합니다.
“죽이면 어떻습니까? 죽이면 죽이는 거지. So what?”
“’So what?’이라구요. 쥐를 먹고 사는 여우는 어떻게 됩니까? 쥐 열 마리가 사라지면 한 마리의 여우가 죽습니다. 열 마리의 여우가 죽으면 한 마리의 사자가 굶주립니다. 사자 한 마리가 없어지면 자연계에 큰 혼동이 옵니다. 수많은 벌레들이 들끓게 되고요. 그뿐 아닙니다. 앞으로 수백만 년 후 인간이 나타났을 때 먹을 것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금방 굶어 죽게 되죠. 사실 이 사람으로 인해 또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해서 인류가 생기고 문화가 생기는 것이죠. 결국 대영제국이 생기고 미국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발 디딤에 달려 있답니다. 여러분이 잘못 발을 디뎌 쥐 한 마리를 지금 죽이면 앞으로 수억 년 후에 있을 대영제국과 미국을 멸망시키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 조심하세요.”
저는 그동안 과학 공상소설을 무시하고 지내왔는데 어느 책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저의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형태의 문학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깨달은 메시지는 한 마리의 쥐가 전 인류의 문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쥐 한 마리가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데 주님의 모친이요 동생들인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참된 교제는 바로 이웃 안에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인데 그 안에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가 형제 자매됨을 생각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본 것이 아닐 줄 압니다. 이 형제와 자매를 통해서 펼쳐질 무한대의 세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서로 서로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서로 이웃 안에 있는 무한대의 세계를 본 이들은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면서 물건까지 공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많은 수가 노예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별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아무리 세상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이었지만 서로 서로는 상대방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본 것이 아닐까요?
쥐 한 마리로 인해서 미국이란 큰 나라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판인데 한 교인으로 인해서는 얼마나 큰 역사가 펼쳐지겠습니까? 이들은 이런 자세로 이웃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런 교제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 무한대의 세계는 수백억년 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타나곤 하였던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자꾸 더해지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분깃점이 되어 간 것입니다.
지난 주 한국에 가신 어느 목사님이 기다리던 자녀가 출생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저에게 소식과 함께 따님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다른 이메일 답장을 비롯해서 할 일이 많은데 파일을 열어 따님의 사진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한국 아이들 모습 다 똑 같지 뭐” 하면서 다음 이메일로 넘어 갔습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이 아이를 통해서 놀라운 우주적 역사가 펼쳐질텐데….” 그리고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메일을 열고 따님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내 동생을 보라.”
교우 여러분, 이번 남은 사순절 기간 이웃 안에 있는 놀라운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십시다. 내가 오늘 이분과 참 교제를 나누지 않으면 어떤 위대한 일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십시다. 아니 그것은 부정적인 관점이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분과 참 교제를 나눌 때 위대한 일이 이 분을 통해 장차 일어 날것을 생각하십니다. 그러다보면 놀라운 기적은 멀리서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체험하게 될 줄 압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어느 교회 전도 집회를 인도하다가 들은 교우님의 간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이분은 그 교회에서 작은 예수로 불리어지는 분이었는데 자수성가하여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어떤 작은 공장이 있는 회사 하급직원으로 출발하셨습니다.
한번은 직장에 취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도난 사건이 있었는데 혐의가 자기에게 쏠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 들어 왔고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부장되시는 분에게 문초를 받은 후 당장에 그만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는데 아내가 쓴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의심하기보다 차라리 의심받는 사람이 된 것이 감사합니다. 당신의 억울함은 하나님이 벗겨 주실 것이고, 나는 당신이 당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억울함을 느끼는 그런 어두운 직장이기에 나는 당신이 그런 직장에서 빛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회사를 청소하고 나오면서 자기를 문초한 부장의 책상 위에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저는 부장님을 원망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로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오늘의 세상이 된 것을 원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런 세상은 정직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채찍으로 오늘의 교훈을 삼겠습니다. 부장님을 축복합니다.”
얼마 후에 그의 누명은 벗겨졌고 그는 회사 모든 이들의 신뢰 속에 진급을 계속하다가 자손이 없던 은퇴하는 대표 이사에게 회사를 넘겨받았다고 합니다.
이웃을 의심하진 않는 자가 받은 축복입니다. 이웃을 의심하지 않는 자가 이러한 축복을 받는데 이웃 안에 있는 놀라운 세계를 보며 함께 교제하며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더 없이 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 분은 개인적으로 놀라운 일을 체험하였지만, 이웃과 참된 교제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분기점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1775년 폴 리비어가 보스톤에서 미국 역사의 분깃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의 분깃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보스톤에서….
우리 함께 고백하십시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