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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날짜 : 2009.03.01
예배명 :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성경본문 : 마가복음 14장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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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루슬로라는 시인의 글입니다.
제목은 “또 다른 충고들.”
고통에 찬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충고하려 들지 말라.
그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올 것이다.
너의 충고는 그를 화나게 하거나 상처 입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선반 위로 제자리에 있지 않은 별을 보게 되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풀과 돌, 새와 바람, 그리고 대지 위의 모든 것들처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시계추에게 달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문제들을 가지고
너의 개를 귀찮게 하지 말라.
그는 그만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 마디로 남의 일에 너무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말라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고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경우 충고하는 사람의 자신의 문제가 더 크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크기에 달팽이에게 충고하려들고 별을 보고 충고하려 들고 강물을 보고 충고하려 들고 시계추를 보고 충고하려 들고 끝내는 개들에게까지 충고하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고가 충고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웃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달팽이에게 시계추에게 개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보면 충고의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충고가 정말로 상처를 안 주고 덕을 세우는 충고이면 다행인데 많은 경우 상처를 주는 충고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시대가 되면서 급속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얼마 전 한국에서 유명한 탤런트들이 자살을 연이어서 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가 인터넷에 뜬 댓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들은 피상적인 얘기를 가지고 판단한 다음 글을 올립니다. 자기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된 채 남의 문제를 풀어준다고 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상처를 주는 충고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즘 댓글만 올리면 전 세계에서 어느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장 루슬로 시인이 언제 이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추측하기는 인터넷시대가 오기 전 앞으로 올 인터넷 시대를 위해서 예언의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상처를 주기 쉬운 인터넷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바른 충고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이 인터넷이 상처를 주는 역할이 아니라 건설적인 충고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상처 주는 충고가 세계를 범람하는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인터넷시대가 도래하지도 않았는데 상처를 주는 충고를 하는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어떻게 보면 지당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받아도 될 만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당시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평민들이 일 년 내내 일해서 번 수입입니다. 미국식으로 하면 평민들의 일 년 수입이 약 4만 불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이 여인은 4만 불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가만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여인에 대한 도전이요, 또한 예수님께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대한 도전도 되는 것을 다 아셨지만 태연하게 말씀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곧 상처주는 충고는 그만두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위 사람들이 여인만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나무라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뻔뻔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기가 막혀 했을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이 예수라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왕도 4만 불짜리 향유를 한 순간에 소모할 왕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한술 더 뜹니다. 당신은 가난한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데 당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4만 불짜리 향유를 순식간에 소모해도 좋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미칠 것만 같습니다. ‘아예 말을 안 꺼냈어야 하는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웅성웅성 여기저기에 새로운 불평의 소리가 들립니다. 한편 계속해서 태연하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갑자기 장내는 찬물을 껴얹은 듯 조용해집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 할 말을 잃게 됩니다. 4만 불이 아니라 4백만 불도 죽음과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금방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자기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젠 할 말을 잃고 사람들은 서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향유를 부었는지 아니면 자기를 어두운 생활 가운데서 건져준 그 사실 하나로만도 너무 감사해서 향유를 부었는지 알 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이 여인과는 두 분만이 아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학생 집을 대학부 교사되신 집사님과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가용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사장님들만 자가용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슬쩍 물어 보았습니다. “이 분은 직업이 뭐야, 어떻게 자가용을 몰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사장님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전혀 자가용을 몰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제 질문을 눈치 챈 친구가 설명해 줍니다. “우리 대학부에 아무개 여자 집사님 계시지? 그 분이 사준 차야?” 저는 눈이 더 똥그래졌습니다. 여자 집사님이 유부남 집사님께 차를 사주었다니? 친구는 놀란 저를 달래려고 계속 말합니다. “그 여자 집사님이 이 집사님 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데. 너무 고마운 나머지 선물을 하나 하겠다고 하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는 거야. 집사님은 정말 원하는 것 무엇이나 사주겠냐고 물었더니,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 그 보다 귀한 선물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무엇이든 사주겠다고 이 여자 집사님이 대답하셨대. 남자 집사님은 심방하는데 필요하다며 차를 사달라고 했지.”
이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여자 집사님이 남자 집사님에게 차를 사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여자 집사님은 오늘의 이 여인처럼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친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큰 실수를 했을 뻔했습니다. 그 두 분은 대학부 교사 자격이 없다고 떠들면서 다녔을 것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인터넷에 당장 올렸을 것입니다. ‘아무개 여집사가 유부남 집사님에게 자가용을 사주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두 분만이 아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상처나는 충고를 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절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습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게다가 이 여자가 행한 일이 전하여지며 이 여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진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아마 이 여인도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메아리처럼 소리가 들려옵니다. “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인은 어리둥절해집니다. 이 여인도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아시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이 여인의 삶을 주제로 만들어진 찬송가를 부르게 됩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구)찬송가 346장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예언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여인과 예수님만이 아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충고를 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상처 받은 이 여인을 위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지금 오늘 우리를 통하여 완성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여인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도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지만 우리도 놀라운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에 대한 예언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격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마음이 무거울까요?
우리는 이 여인을 노래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상처 주는 충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알지 못 해서 상처를 주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우리들 사이에는 상처 주는 충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유가 인터넷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십자가의 이야기는 변질이 되었나요?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보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할몬 스미스(Harmon Smith)라는 성공회 신부님이 독일의 다하우(Dachau)라는 지방을 방문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역사의 현장을 가 본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루터교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마틴 루터와 바하의 고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까?” 목사님이 답변하십니다. “그것은 아주 쉬운 질문이죠. 교회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에만 집착했습니다. 현실에만 집착한 셈이죠. 그들은 비전을 잃었었습니다. 앞을 보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점차 잊게 된 셈이죠.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히틀러는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들에게 비전을 주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을 정리한다면 그 당시 기독교는 십자가는 들고 다녔지만 참된 십자가의 이야기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변질된 십자가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질된 십자가의 이야기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전을 잃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십자가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함을 알고 국민에게 비전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참 비전을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기독교인들이 참된 십자가의 이야기를 바로 기억 하였다면 참 비전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 중에 가장 중요했던 비전은 유대인들을 향한 비전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 교회의 조직만 세우는데 연연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전을 잃었습니다. 특히 이웃을 위한 비전을 잃었습니다. 변질된 십자가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십자가의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비전이 넘쳐흐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한 비전이 넘치게 갖고 계셨습니다. 이 여인의 삶은 당신의 보혈의 피로 단지 영생을 받는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름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꽃 피어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참된 십자가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비전이 넘쳐나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비전뿐이 아닙니다. 이웃을 향한 비전이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그 여인 안에 있는 놀라운 보화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화는 세상 곳곳을 아름답게 할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이 비전 없이 예수님의 이야기는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이야기는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이 여인을 충고할 때 우리는 이 여인에게 상처만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만 비전이 있었을까요?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을 위한 비전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요? 이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말씀하신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이 여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향한 뜻이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보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오고 가는 세대에 빛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만나는 것은 집에서도 가능합니다. 제가 교회에 나와 기도하길 좋아하는 것은 새벽 동이 틀 때 새벽 하늘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매일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리쉬(Irish)사람들에겐 이 새벽 하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루이스네(Luisne)’라고 합니다. 아침에 멋진 하늘을 보면 저는 마음속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저에게 luisne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곧이어 저의 머리에 계속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있다 없어질 새벽하늘을 이처럼 아름답게 하시는데 하물며 나의 삶일까 보냐.” 거기서 계속 이어집니다. “나의 삶을 luisne로 삼으신 하나님, 모든 사람의 삶을 luisne로 삼으셨겠지.” 그리고는 정신이 바짝 들어서 이웃을 축복하면서 교회로 걸어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줄 압니다. “거룩하고 복된 가정입니다. (Holy and blessed. Holy and blessed.)” 특히 우리교회 이웃집을 향하여 중얼거립니다. “거룩하고 복된 가정입니다. (Holy and blessed.)”

사실 주석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지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luisne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죄 많은 여인의 삶을 luisne로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우리 이웃의 삶을 luisne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오늘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평생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로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 때 죄로 점철된 그 분의 삶은 luisne가 된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은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luisne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luisne의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의 이야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의 삶은 luisne 가 됩니다.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온 세상을 아름답게 봅니다. 곧 그 어느 누구를 보아도 십자가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luisne를 보게 됩니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 있는 luisne를 열심히 찾는 자가 됩니다.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로 지킵니다. 지난 주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사순절 기간 성경에 나오는 우리들의 모친과 동생,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가 모두 모친이요 부친이요 형제 자매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야기의 마지막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일줄 압니다. 곧 모친과 동생들의 luisne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luisne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luisne를 더욱 자랑하기 위하여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충고는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이웃의 luisne를 보기 전에는 결코 충고하지 마십시다. 상처만 주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의 십자가의 이야기를 더욱 깊이 만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흉내를 내 보십시다.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우리 모친과 동생들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왜냐하면 십자가의 이야기는 이웃의 luisne를 보는 것으로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라는 평신도 운동 창시자가 있습니다. 매독이라는 무서운 성병에 걸린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도로시 데이의 숙소에서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자기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냅니다.
“나는 매독에 걸린 여인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매독으로 죽어 가는 여인의 모습 안에 luisne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luisne가 지금 온 세계를 아름답게 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luisne는 그 여인만 소유한 luisne였습니다. 아마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겠지만 지금도 그 빛은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luisne는 주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눈에 십자가로 인한 눈물을 소유한 자들은 그 누구에게나 있는 luisne를 보게 됩니다. 사순절 기간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다. 각자의 luisne를 되찾읍시다. 이웃의 luisne를 새로이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외치십시다.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우리 이웃들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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