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2.08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자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6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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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가게에서 친구 두 명이 정신없이 보석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보석의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에 그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을 붙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 빛도 없고 모양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돌 하나가 거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궁금해졌습니다. 하찮은 한 돌이 어째서 거기에 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돌로 인해 다른 보석이 더욱 빛나게 보이게 하려고 놓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가게 주인에게 묻습니다. “저 평범한 돌은 왜 보석들 사이에 진열해 놓으셨어요?” 가게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그 돌을 손에 쥐고 잠시 있어 보십시오.”
그래서 돌을 손으로 쥐고 있다가 펴자 평범해 보이던 돌이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전문가인 주인은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팔입니다. 소위 말하는 교감의 보석이죠. 오팔은 따뜻한 손의 접촉만 있으면 자신의 멋진 색깔과 광채를 보여 줍니다. 따스하게 고요하게 불을 붙여 소리 없이 자신의 빛을 발하지요.”
저는 보석 중에 오팔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는 아직도 한 번도 오팔을 보거나 만져 본적이 없습니다. 소유해보기는 커녕… 한 번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했지만 왜 제가 오팔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짐작하실 줄 압니다. 오팔의 이 이야기가 저로 하여금 “보석” 하면 오팔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팔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물도 보석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모든 돌도 보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오팔은 평범한 돌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줍니다. “나도 보석이 될 수 있다.” 한편 보석들에게 는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보석들에게 오팔은 말합니다. “너희도 다 돌이다,”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오팔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석 가게는 마치 이 세상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보석은 다양한 외모, 태도, 문화, 취미를 가진 세상 사람들로 보입니다. 보석의 모양과 빛깔이 다양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그중에는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외모나 행동은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질병, 슬픔, 의기소침 또는 다른 개인적인 걱정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런 사람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저 사람은 왜 자살했을까?’ ‘저 사람은 왜 우리처럼 밝고 명랑하며 힘차게 일하지 못하지?’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전문가인 보석상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바로 그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을 두 팔로 안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너희의 온기와 사랑으로 채워 보아라. 그러면 이들은 다양한 모양과 광채를 낼 것이다.’ 오팔이 그러하듯 각 사람 안에는, 아무리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접촉과 호의로 깨울 수 있는 어떤 훌륭한 것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보석임을 알고 계십니까? 오팔의 축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목을 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붙이고 싶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는 몇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을 살피기 전 먼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실 그 말씀은 2절에 나오는데 2절 내용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라는 내용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단 오늘의 설교제목을 생각할 때는 2절 말씀에 국한해서 잡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전체에서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가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같은 보석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성경 전체는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와 같은 보석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같은 보석이 될 때 그리스도의 법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모두가 최고의 보석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일 줄 압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먼저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먼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이웃이 범죄한 일이 들어나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석이 되게 하는 것인데 이웃이 죄를 지었다면 보석이 상한 보석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새롭게 하여야겠죠. 그러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이웃을 바로 잡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온유한 심령’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잡는다 하면서 더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깨끗케 한다고 하면서 더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석은 돌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평범한 돌보다 더 단단합니다. 더 깨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석을 다룰 때 어떻게 합니까? 다치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다루지 않습니까? 돌 중에 가장 강한 돌이 다이어몬드가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의 다이어몬드가 어떤 보석보다도 강하다고 자랑하면서 시험 삼아 땅 바닥에 내치는 사람 있습니까? 이처럼 지금 사도바울은 보석과 같은 이웃이 죄를 범했을 때 조심조심 다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보석처럼 대하라는 겁니다. 한편 그 다음 표현이 눈에 띕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남의 죄를 깨끗케 하려다 보면 자칫 잘못하여 자신의 보석이 상하게 될 경우가 종종 있나 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먼지를 털 때 그 먼지가 어디로 날라 갑니까? 이웃의 어깨에 먼지가 뽀얗게 싸여있는 것을 보고 먼지를 털어 줍니다. 그 먼지가 하늘로 날라 가지만 그 중에 어떤 먼지는 우리들의 어깨에 내려앉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교회가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기초 공사를 하는 일꾼들을 보면 먼지를 뒤집어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휴식 시간이 되어 공사 사무실로 들어 올 때 제가 한 사람 한 사람 어깨에 먼지를 털어 줍니다. 그들은 깨끗해졌습니다. 제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의 죄를 고쳐준다고 해도 이웃의 죄의 얼마는 우리에게 날라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아 합니다. 특히 우리가 지적한 이웃의 죄와 똑 같은 죄를 짓기 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아름답게 한답시고 그들을 바로 잡으려 할 때 우리의 아름다운 보석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할 일이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서로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나 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 두 번째인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인 서로의 죄를 바로잡는 것이 보석을 깨끗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짐을 서로 지는 것은 보석이 더 화려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같은 보석이라도 큰 보석이 있고 작은 보석이 있지 않습니까? 가급적이면 큰 보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정교하면서 큰 보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하나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을 깨끗케 할 때는 먼지가 우리에게 날아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조심해야지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서로 짐을 져줄 때는 그러한 염려가 없습니다. 이웃을 도울 때 마음껏 도우십시요.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도울 때마다 우리는 큰 보석이 되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처럼 유명한 신학자가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암환자들을 위한 전임(full time)사역을 하였었습니다. 후에 회고록에 암 환자들을 돌보며 병동에서 일하였던 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웃의 짐을 서로 질 때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체험을 한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서로가 보석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책상 앞에 오래 남아있다고 유명한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레를 감당할 때 훌륭한 신학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문제는 다 해결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보석이 되어 가는 것인데 염려 없이 보석이 되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쫓아다니면서 남의 일을 도와드리면 됩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드리면 됩니다. 괜히 이웃의 죄를 깨끗케 한다 하다가 올무에 걸리지 말고 그저 이웃의 일을 빼앗아서라도 도와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화려한 보석이 되어 갈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가지의 ‘짐’이 나옵니다. 2절과 5절에 나옵니다.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5절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한글로는 같은 ‘짐’이지만 원어로는 다릅니다. 2절에 나오는 ‘짐’은 헬라어로는 ‘바레’입니다. 5절에 나오는 ‘짐’은 ‘포르티온’입니다. 곧 2절에 나오는 바레는 나누어 함께 져야하는 짐입니다. 포르티온은 혼자서 져야하는 짐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짐이 있는 것입니다. ‘바레’가 있고 ‘포르티온’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바레’가 있습니까? 나누어 지십시요. 이웃의 포르티온이 있습니까?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 3절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바로 바레와 포르티온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포르티온까지 다 자신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자기가 다 처리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이웃을 도와 드려야 할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레는 서로 도울 때 보석이 되어갑니다. 포르티온은 돕지 않고 혼자 하도록 내버려둘 때 보석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보석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곧 ‘바레’라는 보석 ‘포르티온’이라는 보석이 필요합니다. 이 두 보석을 가지려면 두 보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바레’와 ‘포르티온’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4, 5절이 이에 대한 답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자기의 짐을 먼저 질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자신의 포르티온이라는 보석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포르티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바레라는 보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자신의 포르티온이라는 보석을 발견한 사람은 바레라는 보석을 쉽게 발견합니다. 그 때 그리스도의 법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의 신학교 친구인 한 미국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현재 중동지방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늘 갑상선이 안 좋아서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저에게 이메일을 다음과 같이 보내 왔습니다.
“이런 경험이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들 안에서 성취되기를 확신합니다. 그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소서.”
이 친구의 포르티온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선교지에서 이웃을 위한 바레를 감당하는 자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의 짐만 지는 사람도 보석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짐만 지는 사람도 보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포르티온이라는 보석과 바레라는 보석은 늘 함께 존재합니다. 홀로 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레보다 포르티온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에게도 포르티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먼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7~9절에 예수님의 포르티온이 잘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먼저 7절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처럼 썩어질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영원히 사시기 위해서는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포르티온이었습니다. 이 포르티온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8,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당신의 포르티온을 발견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바레를 발견하셨습니다. 포르티온을 잘 감당하셨기에 이제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셨기에 포르티온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아울러 그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바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레가 되신 예수님은 이제는 온 세계를 보석화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포르티온과 바레를 잘 가꾸도록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팔이라는 보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보석이 있습니다. 포르티온과 바레라는 보석입니다. 각자의 짐을 감당하십시다. 그리고 이웃의 짐을 나누십시다. 우리는 오팔보다 훨씬 값진 보석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1945년 성금요일에 라벤스브룩(Ravensbruck)이라는 유대인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 92,000명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날입니다. 여인들이 가스실로 가는 줄에 서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이 히스테리칼하게 울고 있었습니다. 가스실로 가지 않는 줄에 서 있었던 한 여인이 나와서 말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대신 당신의 자리에 설게요.”
엘리자베스 필렌코(Elizabeth Pilenko)라는 남러시아의 부요한 농부의 딸이었습니다. 후에 수녀가 되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녀원에 유대인들을 숨겼다가 그만 체포되어 라벤스브룩(Ravensbruck)수용소에 붙잡혀 온 것입니다. 유대인 여인을 대신해서 그녀는 가스실로 향했습니다. 후에 천주교에서는 그녀는 Mother Maria라고 부르게 됩니다. 포르티온을 감당하였던 그녀는 바레를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녀는 큰 보석이 되어 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가 모두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로 잡읍시다. 각자의 짐을 지십시다. 서로의 짐을 지십시다.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십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